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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의 거울 ㅣ 메타포 1
미하엘 엔데 지음, 에드가 엔데 그림, 이병서 옮김 / 메타포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책장을 덮고 나니, 굳이 중요한 글귀를 새기고 기억하는 것이 무의미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자잘한 이야기들은 모두가 하나의 색채를 또렷하게 간직하고 있는 비즈이기 때문이고 그 비즈들을 엮어서 한 권의 책으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의미 하나의 글귀에 몰두하는 것보다는 어우러지는 흐름을 읽거나 각각의 색채를 주목하거나 마지막으로 비즈들을 재구성해서 또 다른 목걸이를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 책의 첫 장에는 차례가 없다. 게다가 한 작품마다 따로 소제목도 붙어있지 않다. 오로지 우리에게 남겨진 하나의 명제는 ‘거울 속의 거울’이라는 거대한 제목뿐이다. 거울 속에 거울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 4차원의 문틈을 살짝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것은 무한하게 반복 또는 복제된다. 어떤 것이 시작이었는지 처음이었는지 원본이었는지는 무의미하다. 무수한 거울 속에서 단 하나의 가치란 지금 그 거울을 무엇을 비추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거울은 실체가 없다. 거울 자체는 오로지 자신의 매끈한 겉면에 무엇인가를 비추는 역할을 할뿐이다. 고로, 거울이 비추고 있는 것이 나라면 그 거울은 끊임없이 나를 복제 해내고 창조해낸다.
남미의 소설가 보르헤스를 단편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우스 떼르띠우스」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거울과 부성은 가증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증식시키고, 마치 그것을 사실인 양 일반화시키기 때문이다.’ 아니러니 하게도 이 책은 미하엘 엔데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책이다. 거울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창조해내는 양 하고 있다면 아버지 역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창조해냈다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거울은 표면적인 적을 카피하는 것에 그치지만 아버지는 미하엘 엔데의 근간을 세우고 엄숙하면서도 다정하게 창조적 열정을 불태우게 해주었다(이 책의 두 번째 단편에서 나오는 스승이자 아버지가 아마도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거울과 아버지의 관계를 보르헤스를 열쇠로 내가 풀어냈다면(혹은 풀어냈다고 믿는다면) 이 책의 다른 여러 가지 작품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물론 답은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보고 다녔다는 세계 여행가도 결국에 가서는 아무 것도 아닌 자의 안내를 받아서 또 다른 세계에 발을 붙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아무도 아닌 자(Nobody)는 정말 아무도 아닌 것이 아니라 딱히 규정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존재에 대한 통칭이다. 내 생각에는 여기에는 독자도 미하엘 엔데도 그리고 미하엘과 엔데도 포함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하나의 미로와 같지만 그 미로를 풀어내는 열쇠는 아무도 아닌 자들에 맞춰서 달라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처음에 읽기가 수월하지 않다면(처음에 나오는 부분은 모호하게 의도된 바대로 시점과 인칭이 바뀐다) 한 번에 통독으로 훑고 구성이 눈에 조금 잡은 다음에 정독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읽을 때마다 그 의미와 맛과 형태가 바뀌리라 장담한다. 이 책은 이러한 열린 구조와 모호하지만 통일된 색채로 언제고 다시 읽어도 그 재미가 반감하지 않을 작품이다. 위에서 잠시 언급했던 보르헤스의 작품과도 같이 말이다. 다분히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보르헤스가 떠올랐다. 작품의 열려있는 구조 그리고 하나의 끝이 없는 미로를 보고 있는 느낌, 거기에 정해진 하나의 답이 없다는 것까지. 실마리를 잡으려고 하면 무수한 갈래 속에서 어떠한 것도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청하게 되지만 그것 또한 맛인, 그런 작품 말이다. 참고로 읽다가 분에 번뜩하는 느낌이라서 기억을 해두었는데, 어쩌면 미하엘 엔데 본인도 이 글을 쓰면서 보르헤스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22번째 단편에서 나오는 구절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도서관에 있는 장님 신사와 운명의 본질에 대해 토론도 했다.’ 여기서 나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도서관에 있는 장님 신사는 분명히 보르헤스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여담을 넘어, 이 서평에는 전체적인 감상만 에둘러 썼다. 하나의 열쇠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계속 말했던 차였고, 책을 읽기 전에 이 서평만 먼저 읽는다면 자유로운 유영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의 열쇠 또한 한 번의 읽음에 그저 치기어린 단평을 넘어서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함께 읽고 같이 머리를 맞대고 열쇠를 푸는 시간을 가지면 더욱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