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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등 이펙트 - 지금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
로빈 스턴 지음, 신준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심리학자인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의 ‘학습된 무기력 실험’을 혹시 아는지 모르겠다. 방에 개를 가두고 피하기 쉽지 않은 장애물과 트랩을 설치한 후 방에 전기충격을 가한다. 처음 개는 피하려고 하지만 장애물과 트랩 때문에 피하지 못하고 전기충격을 받게 된다. 그러는 사이, 그 타성에 물들어 나중에는 장애물을 없앴는데도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전기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장애물이 없는 방에 두 부분으로 나누어 처음의 전기충격 실험을 받은 개와 그렇지 않은 개를 함께 둔다. 방의 한 부분에는 전기충격이 오도록, 나머지 부분에는 오지 않도록 하고 두 마리의 행동을 관찰한다. 전기충격이 오면 전에 전기충격실험을 했던 개는 전기충격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으며 그렇지 않았던 개는 전기충격이 오지 않는 방으로 탈출한다. 아무런 장애물이 없고 다른 개는 이미 탈출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처음의 전기충격을 피하지 않고 무기력한 상태로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학습된 무기력 실험이다. 처음에는 무기력 하지 않지만 계속 반복된 상황에 물들어 결국에는 무기력에 젖어 의지조차 잃는 상태. 이 책에서 등장하는 ‘가스등 이펙트’는 이러한 ‘학습된 무기력 실험’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가 어떤 관계에서 알게 모르게 서로의 영향력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문제는 그러한 영향력이 좋은 쪽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자신의 입맛대로 조종한다는 데에 있다. 모든 영향력이 그렇진 않겠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영향력은 나의 견해를 위해서 상대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른바 ‘가스등 이펙트’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게다가 주 대상을 여성으로 삼고 있는데 저자의 말에 따르면 높아진 여성의 지위와 함께 수반된 과거의 여성 지위를 꿈꾸는 남성과의 이해관계가 이러한 사례를 만들어내는 원인과 다르지 않다. 허나 이러한 대인관계의 일은 굳이 이러한 말을 덧붙이지지 않아도 남성 대 남성, 여성 대 여성, 남성 대 여성 등 성별을 따지지 않아도 될 만큼 그 사례가 많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 피해자와 가해자의 유형, 극복 방법을 자세한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자세히 들어가서, 어떠한 불화의 상황에서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하는 말은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원색적인 인신공격에서부터 부드럽지만 비수가 꽂힌 말까지 우리는 다양한 비난과 오해를 받은 경험이 있다. 그리고 피해자는 떠올린다. ‘아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상대의 언행에 처음에는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 ‘아니 내가 정말 그런가?’라고 떠올리며 상대에게 인정 혹은 부정의 단계의 거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그런 것이었어.’ 위에서 언급한 학습된 무기력과 같이,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은 처음에는 상황을 원래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점차 반복됨으로써 상대에게 인정받고 싶거나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고 결국에는 영향력을 미친 사람의 말처럼 된다. 일련의 과정은 영향력 혹은 주도권에 따라서 마침내 복종하게 되는 상태를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자기애의 결여와도 닿아 있다.
사람의 마음은 약한 것이라서 누군가 자신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더 힘을 얻게 마련이고 주위의 갖은 비난에는 흔들리고 쓰러지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내용들도 그와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관계에서의 동등함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휘둘리는 것이 사람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관계에 대한 믿음 자신에 대한 믿음 바로 이 두 가지이다. 목표가 뚜렷한 사람에게는 비난도 자신의 길에 대한 신념을 부과하지만 흔들리는 사람은 아무리 목표가 옳을지라도 비난에 쓰러진다. 처음 쓰러지고 나면 그 쓰러질 때의 패배감과 무기력은 수치로 남는다. 하지만 한 번 쓰러졌기에 다시금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면 다시 쓰러지게 되고 결국에는 그러한 실패와 무기력에 젖어 모든 의지를 상실하게 된다. 회생의 길은 있다. 연인관계 부모관계 직장관계 등 무수한 관계들 혹은 자신의 길 위에서 이미 쓰러졌을지라도 이 책에서는 다시금 그런 관계를 끊고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 ‘가스등’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이 형사의 말에 다시금 제 모습으로 돌아왔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러한 형사를 찾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한 형사는 사실 제 마음 속에 있으며 잃은 의지를 되찾기 위해서는 자신이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일면 심리학 저서라고는 되어 있으나 이 책은 좀 더 심리적인 자기계발에 가깝기도 하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애라는 것도 그러하지만 책의 전체에 걸쳐서 나뉘어져 있는 유형 정리는 심리학적인 측면보다는 그저 다년간의 심리치료사의 경험에 따른 일방적인 분류처럼 보인다. 게다가 나만 그런지는 몰라도 책의 내용에서 등장하는 고민과 상황들은 단지 지배와 피지배와 같은 하나의 도식이라기보다는 대인관계에서 누구나 하게 되는 고민들과 같다. 물론 그 위험성을 지적한 것은 맞다. 그마저도 이미 마틴 셀리그만이 했으니 문제이긴 하지만. 쉬엄쉬엄 읽기엔 좋은 세미-심리학이라고 부르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