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안의 알약
슈테피 폰 볼프 지음, 이수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20세기의 위대한 발명을 다섯 개 꼽아보자. 그 중에서 한 언저리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경구피임약’의 발명이다. 어째서 경구피임약을 그토록 대단한 발명으로 치는 것일까. 상대성 이론이랄지 양자역학이랄지 하는 것들의 틈바구니에서 알약 하나가 위대한 것은 여성이 집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임신과 육아에서 해방시켜 준 것이 바로 이 피임약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이 집밖으로 나온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수세기에 걸쳐서 제한된 노동만을 할 수 있었던 여성이 드디어 남성과 동등한 노동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이 하나의 알약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등장하는 릴리안이 가진 알약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중세 시대를 흔히들 암흑기라고 말한다. 그건 오로지 문화의 주체가 되는 것이 종교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안에는 어두운 기독교의 역사가 들어있다. 또한 여성의 사회적 지휘란 대단히 낮은 것이라서 여성 자체는 토지, 가축과 다르지 않은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게다가 봉건제도의 확고함 아래에서 농노와 귀족이라는 흑백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렇게 부조리한 중세에서 릴리안이 가진 알약은 비단 여성의 해방뿐만이 아닌 중세의 모든 인습과 장벽을 깨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작은 알약 하나가 그토록 중요한 알약이었던 것이다.


   이 알약을 지닌 릴리안과 그의 동료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독일(사실 그 시절에는 독일이 아니었지만 지금의 독일 영토)에서부터 영국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유쾌한 여행에는 독자가 흥미를 느낄만한 것들이 많다. 예술과 역사 그리고 문화에 이르기까지 릴리안의 일행들이 가진 상징성은 다양하다. 그리고 이건 분명 시대가 가지는 성장통을 아이러니컬하게 그려내는 것임에 틀림없다. 실천하지 못하는 지식인과 무분별한 수용과 불평밖에 하지 못하는 인물들이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주인공 릴리안은 분명 열여덟 소녀이지만 이 이야기는 한 인물의 성장기에 대한 이야기이기보다는 사회에게 던지는 작가의 메시지에 가깝다. 표지의 귀여움에 혹했다가 읽었다면 경악할만한 내용도 들어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위대한 알약을 들고 여행을 떠나는 군상이 펼치는 이야기의 종착점은 어디인가. 그건 바꾸고자하는 궁극적인 진실이 있는 세계다. 우리의 중세는 이미 잔혹하게 지나가 버렸고 현재에 이르렀다. 하지만 소설 속의 중세는 자유롭고 즐거운 세계로 변모하며 끝이 난다. 이른바 우리가 바꾸고 싶었던 세계를 통쾌하게 바꾸고 끝이 나는 것이다. 마지막에서의 유쾌함은 과정에서의 재미도 있지만 결말에의 통쾌함 때문에 더 빛나는 것이다. 만약에 정말로 릴리안이 있었고 알약이 있었던 중세라면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상상하는 것도 재미가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과거의 현재를 비교하면서 끝을 내볼까 한다. 과거 혹세무민의 시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릴리안이 바꾸고자 했던 세계는 완전히 바뀌었을까. 분명 아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아직도 무자비한 종교가 지배하고 있고 어떤 나라에서는 아직도 계급의 차이 때문에 절망하는 사람이 있다. 게다가 아직도 여성이 가축처럼 재산으로 여겨지는 나라가 있다. 물론 위의 것들이 해결되어 있더라도 아직 인류는 해결해야할 문제가 산적해있다.  아직도 릴리안이 바꾸고자하는 세계는 오지 않은 것이다. 소설에서처럼 자유롭고 즐거운 나라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희망의 메시지도 함께 날리고 싶다. 아직 바꿀 것이 있는 곳은 희망이 남아 있는 곳이 아니겠는가. 현대의 릴리안들에게 권투를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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