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자 1
수잔 최 지음, 유정화 옮김 / 문학세계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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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알드리치 회고전에서 <그리솜 갱단>을 보고 패티 허스트 사건을 떠올렸다. 부잣집 외동딸이 갱단에게 납치당한뒤 그 중 한 명과 사랑에 빠진다는 줄거리는 시간상의 갭에도 불구하고(영화의 원작인 <미스 블랜디시>는 1938년엔가 나왔고, 영화는 1971년에 만들어졌으며, 패티 허스트 사건은 1973년에 발생했지만), 이런 스톡홀름 신드롬 류의 이야기에는 어느 정도 계급적인 관점이 필수적으로 깃드는 것 같다. 인질이 된 부르주아가 과연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몰아넣은 하층 범죄자/게릴라에게 진심으로 공감하고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인가? 만약 사람은 결코 자신의 토대를 떠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생존 본능과 변덕만을 재차 입증할 것이다. 만약 그 교감이 진심이었다면, 그러나 그 교감이 과연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




: 패티 허스트가 게릴라들과 함께 은행 강도에 가담했을 당시의 수배 전단지.

그래서 신간 소식란에서 수잔 최의 <미국 여자> 기사를 읽고 얼른 사보았다. "..1974년 미국 언론재벌인 허스트가의 19살 상속녀 패티 허스트가 도시 게릴라 단체인 공생해방군(SLA)에 납치된다. 허스트는 납치된 지 두 달만에 라디오 방송국에 테이프를 보내 ‘민중의 권리’를 요구하는 공생해방군과 뜻을 같이 한다고 밝혔다. 허스트는 이에 그치지 않고 ‘혁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공생해방군과 함께 카빈총을 들고 은행을 털기도 했다. 수잔 최의 소설 ‘미국 여자’는 허스트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수잔 최는 자신이 동양계 미국인(한국계)인 만큼 허스트(소설 속엔 폴린으로 등장한다) 사건과 연루된 일본계 미국인인 실존 인물 웬디 요시무라(소설 속의 20대인 제니 시마다)에 주목한다. 웬디는 허스트 사건의 관련자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돌봐줬던 여성. 소설 속의 제니도 베트남전에 항의하기 위해 징집사무소를 폭파한 뒤 쫓겨 숨어있다 뉴욕주의 외딴 농가를 세내 납치범들과 합류한다. 일종의 도피자인 이들은 서로 부대끼면서 정신적인 공황에 빠져든다. 수잔 최는 그들이 겪는 혁명과 투쟁방식에 대한 혼돈을 그려내고 있다." (from 경향신문)

잠깐 딴길로 새자면, 요즘 들어서 더욱 심해진 책버릇인데, 이제 나는 현대 소설들을 거의 읽지를 못하겠다. 특히 한국 젊은 작가들의 소설. 마지막으로 끝까지 읽은 게 아마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었을 텐데 그걸 읽으면서 들었던 느낌이 한국의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 대한 나의 총체적인 거부감에 제일 근접했던 것 같다. 일단 재밌다, 술술 읽힌다, 냉소의 감각이 탁월하다, 그리고 그만큼의 강도로 자기애가 강하다, 결론적으로는 '나는 이 책에서 별로 배운 게 없다'. 꼭 어떤 지식이나 교훈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단지 내가 어떤 텍스트를 선택했을 때 그 안에서 내 굳어진 사고 체계를 깨뜨려주거나 건드려주는 거 하나 정도는 있어줬으면 하는 게 책을 대하는 내 바램이다. 그러나 삼미슈퍼스타즈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깔깔거리고 웃으며 읽었고, 다 읽은 다음 다시는 그 책을 들춰보지 않았다. 요즘의 나는 아주 고전이거나, 혹은 현대 중에서도 스릴러/추리/SF/판타지 장르문학밖에 읽지 않는다.

그런데 <미국 여자>는 달랐다. 대단히 아름답고 정교하고 묵직했다. 이 책은 많은 현대 소설에서 매달리고 있는, 거의 토하고 싶을 정도의 '사소하고 진부한 숙고'도,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인 '내면으로의 침잠-개인주의로의 환원'도 피한다. 90년대 쏟아져나왔던 한국의 후일담 문학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문학적 성취를 이 책은 해내고 있다. 70년대를 다루되, 단지 70년대의 그 특정 몇년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제2차세계대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잔 최는 섣불리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은 채, 폴린과 제니, 폴린과 그의 가족, 제니와 그의 가족과 연인으로 수많은 잔가지를 뻗어나간다. 그리고 그 잔가지 하나하나는 미국인들의 부서진 영혼의 모자이크를 형성한다. 개인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어느새 전체의 유효한 조각으로서의 개인이며, 전체를 이야기하는가 싶으면 개인에게 스며들어 있는 전체를 말한다. 급진주의 혁명가들의 비일상적인 삶은 그저 미국인들의 잊고 싶은 악몽으로 치부되지 않는다. 그들은 차라리 집집마다 커튼 뒤에 숨어 있는 뒷문같은 존재다. 어느 누가 커튼을 걷어서 그 존재를 발견할진 모르지만, 언제나 열려져 있다. 언제나 집과 바깥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패티 허스트 사건은, 폴린과 제니의 이야기는 어느 새 "봐라, 내가 여기 살았다"는 아버지의 선언으로 이어진다.
...나는'총체성'이 여전히 유효하며 굉장히 훌륭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었던 순간은 그거였다. 폴린과 제니가 결국에 체포되는 순간, "손들어! 꼼짝마!"라는 단말마의 비명같은 경고가 터지는 그 순간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그 이후 예정된 냉혹한 현실의 벽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나도 제니처럼 폴린을 용서할 수 있을까....그리고 나서 마지막 장을 읽을 때, 슬펐지만 다행스러웠다. 제니가 살아간다. 그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에도 제니는 살아간다.

"동부는 한때 그녀에게 피난처가 되리라는 기대를 갖게 했었다. 그런 기대를 품었던 것은 그녀가 동부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녀는 밀착된 관계가 숨이 막히게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너무나 오래 저 사람들과 지내왔던 것이다. 그들이 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의 온몸으로 스며들게 방치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싹 말라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심장이 혼란과 두려움으로 요동치는 걸 느꼈다. 그녀는 혀를 한 여자 속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가 움찔하며 주춤거렸다. 그리고는 다시금 밀어 넣었다. 이럴 때, 처음에는 언제나 욕망에 이끌린다기보다는 고분고분했다. 그리고 나서야 불현듯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최면 같은 그 무엇을 향한 욕망을 걷잡을 수 없이 쏟아냈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으나 이번에도 그런 식이 될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이것은 반절쯤 이해되는 열에 들뜬 꿈이 될 것이다."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은 행운에 기대어 살아가게 되어 있다."

"아직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며 깊은 밤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기도 했다. 그러면 뭐라고 분명하게 형언할 수 없는 그때의 우울했던 기분이, 어떻게 소리내야 좋을지 몰랐던 그녀만의 깊은 고독이 입을 떡 벌리고 하품을 했다."

"자신을 납치한 사람들에게 합류했을 때 폴린이 분명 깨달았듯이, 그녀 또한 모든 결속에는 그 고유의 위대한 구원적 요소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머지 방식이 아무리 터무니없다 하더라도. 그때 그녀는 폴린에게, 폴린의 격렬한 운명에 스스로를 묶었다."


수잔 최의 데뷔작 <외국인 학생>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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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와의 결혼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23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김석환 옮김 / 해문출판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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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 원서로 찾은 표지그림에 레이 브래드버리가 헌사를 남겼잖아....*_* 코넬 울리치는 매 세대마다 재발견되어야 한다니, 작가로서는 저런 말만큼 행복한 찬사가 또 없지 않을까!!




"우리는 이 일과 싸워왔다. 생각나는 모든 방법으로. 남겨진 모든 방법으로. 방법이 없다. 어쩔 수 없다. 도망갈 길은 없다. 우리는 올가미에 걸려 꼼짝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내가 범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게다가 그도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로서는 뚫고 나갈 수 없다. 도망갈 길은 없는 것이다....어떤 게임인지 나는 모른다.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인지 방법도 모른다. 다른 사람은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이다. 단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 게임 도중 어딘가에서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 뿐이다. 이 게임에서 이겼다면 어떤 상품을 받게 되었을지 나는 모른다.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 상품을 받지 못했다는 것뿐. 우리는 졌다. 나로서는 그것밖에 모른다. 우리는 패배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미 게임이 끝난 것이다." (<죽은 자와의 결혼> 마지막 문단)

가진 것 없고 절망에 휩싸인 젊은 여인이 열차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행복한 신혼부부와 우정을 나누다가, 열차 사고로 부부가 숨을 거두자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떠밀려 죽은 여인으로 정체를 가장하고 전혀 낯선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그때부터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남자가 그녀를 협박하고, 그녀는 모처럼 찾은 이 행복하고 다정한 새 삶을 버리고 싶지 않다. 결국 살인이 일어난다. 그녀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누가 범인인가? 그녀의 새로운 연인인가? 그러나 그녀는 연인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혹은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누가 범인인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고, 결국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불안감의 지속이라는 짐을 짊어지게 된다. 그녀는 자신과 운명 사이의 내기에서 패배한 것이다.

1903년에 태어나 40년대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코넬 울리치는 작가로서의 부와 명성을 거머쥐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내몰면서 뉴욕의 호텔을 전전하는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뉴욕 뒷골목의 정서와 분위기를 완벽하게 체화했기 때문에 그의 추리소설들은 다른 작가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분위기가 떠돌 것이다. <죽은 자와의 결혼>에서도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저항하는 인간들에 대한 섬세한 애정과 도저한 낭만성으로 점철되어 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의 다른 작품들이 번역되는 걸 하염없이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원서를 읽는 쪽이 빠를지도 모른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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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가지 이야기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최승자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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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사람을 가끔 미칠 정도로까지 몰고 가는 그의 집요한 문체.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혹은 타인과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상실감. 영원히 과거에 사로잡힌 인물들. 매일 아침마다 "오늘은 죽기에 완벽한 날이군"이라고 중얼거릴 것만 같은 그들의 편집증적인 세계관.
샐린저의 소설을 읽다보면 옴쭉달싹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내게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폐소공포증의 세계. 샐린저에게 딱히 열광하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왜 그의 소설들에 지배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까.
단편 모음집 <아홉 가지 이야기> 중에서 가장 매혹적이었던 작품들은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코네티컷의 비칠비칠 아저씨> 두 편이다. 특히 <코네티컷의 비칠비칠 아저씨>의 마지막 두 문장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난 멋있는 여자였어, 안 그래?"
그녀가 애원했다.



...재밌는 건 <작은 보트에서>의 주인공의 성이 탄넨바움이라는 것이다. 예전에 <프래니와 주이>를 읽었을 때, 어딘지 웨스 앤더슨의 <로얄 테넌바움>이 소설 속 '천재 가문'을 모델로 하지 않았을까 하는 어렴풋한 추측이 들었는데, 물론 탄넨바움과 테넌바움의 영어 스펠링 자체가 다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끈질기게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어렴풋한 천재'를 주인공으로 삼는 샐린저의 분위기가 그 영화와 아주 다른 것 같진 않다.  

... 샐린저의 또다른 소설 <프래니와 주이>에선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깊이가 없다는 것은 내가 안고 가야 할 영원한 고통이자
목발이라고 말했다. 그것만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평가라는 것이었지. 그러니 주이, 절름발이들이 서로
그렇게 하듯 우리도 서로 도우며 친하게 지내도록 하자." 
 

"우리는 기형이야. 그것뿐이야. 그 두 놈이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거라구.
우리는 이를테면 문신을 한 여자야.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문신을
할 때까지는 죽을 때까지 잠시 잠깐이라도 평화로울 수 없을 거란
말이야...우린 '현명한 아이'라는 콤플렉스에 걸려있어. 우린 결코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어느 누구도 말야. 우린 말을 하는게 아니라
장황하게 떠벌리고 있는 거야. 우린 함께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라
혼자서 상세히 설명을 하고 있다는 말이야. 적어도 나는 그래."


진정으로 '어둠의 자식들'을 대변하는 문구랄까; 샐린저 본인은 그닥 호감이 가진 않지만 그가 쓴 문구들은 불만 많은 청춘들의 성스러운 경전이 될 법도 하다. 스무살때부터 시작된 사춘기, 언제쯤이면 조금 잠잠해지고 평정을 되찾을까? 그런데 모리스 피알라는 죽을 때까지도 평정을 못 찾았던 걸까? 광주영화제에서 봤던 <우리들의 사랑>에서 그랬다. "슬픔은 어디에도 있다. 슬픔은 영원히 지속된다"라니. 괴팍한 노인네가 스크린을 넘어서서 나에게 거의 낙인을 찍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의 다른 영화 제목은 <우리는 함께 늙어가지 않을 것이다>였다.

...그러나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를 읽을까 말까, 아직도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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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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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은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였다 -_-;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화자는 자신의 어머니와 꼭 닮은 여자, 아니 에르노의 사진을 보고 매혹되어 [아버지의 자리]라는 책을 샀다고 회상한다. 그 책을 읽은 후로 아니 에르노의 이름은 18살 무렵의 내 머리속에 꼭 박혀 있었다.
[단순한 열정]의 머릿말은 바르트의 구절로 시작한다. "'우리 둘'은 사드보다 더 외설스럽다." 이 구절은 이 책의 모든 내용을 암시한다. 남자와 여자, 그 둘 사이의 미친 듯한 열정의 기록, 끔찍하게 솔직하고 단순하게 외설스러운 그 사랑의 이야기.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실제 겪었던 그 열정의 시간에 관해 차분하게 입을 열기 시작한다. 유부남이자 외국인인 그 남자, 아니 에르노는 그 남자를 위해 서슴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 시작한다. 이 열정은 너무 치명적인 중독과도 같아서 그녀는 이 중독에 기꺼이, 행복하게 자신을 내맡긴다.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남겨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지니고 있기 위해 다음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았다""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어진 것은 시간의 질서 속으로 사라져갔다" "내 아이들은 그런 순간에 빠져있는 엄마를 늙은 수코양이를 따라다니는 발정난 암코양이쯤으로 생각할 뿐이다""대중가요는 그 당시 내 생활의 일부였고, 내가 사는 방식을 정당화시켜주었다"" 이별이 예정되어 있는 열정은 2년 동안 그녀를 꼼짝없이 사로잡았고, 그녀는 남자와 헤어진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이 사랑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나는 원래 고백체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박일문의 소설들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 키치적인 나르시시즘의 고백에 질린 탓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찰스 부코우스키의 [시인의 여자들]도 몇몇 구절의 번득이는 재기 외에는 별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의 고백이 나를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는 이 열정의 시간이 지나간 후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기 직전까지 그녀가 수없이 되씹었을 그 사랑의 시간들, 그리고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 걸까 등의 왜?라는 무수한 질문들, 그렇게 느리고 힘겹게 얻어진 냉정한 성찰의 시선으로 그려내는 기억의 초상들. 나는 그녀의 그 엄정한 솔직함과 열정을 그리되 냉정을 유지하는 그 문체가 좋았다. [르 몽드] 지의 평을 빌리자면 '화해도, 양보도, 심리 분석도 없다. 정확한 단어들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해야 할까. 어떤 한계까지 가본 이들이 그 경험에 관해 타인에게 들려줄때 이 정도의 냉정한 통찰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드문 독서경험을 제공한다.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 할 수 있었다.....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 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고백체의 소설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나는 쉴 새 없이 나에 대해 표현하고 싶어한다. 굳이 말로 말하지 않더라도 글로 어떻게든 가장 정확하게 나의 경험에 대해, 나의 연애들에 관해, 그때 나의 느낌들에 대해 표현해 보고 싶어한다. 그것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얘기되든 아님 혼자 쓰는 일기에든, 그것은 일종의 노출증이고 극대화된 나르시시즘이다. 그것을 끊임없이 의식하기 때문에 말하고 쓰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쑥스러운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그리하여 반대급부로 그런 식의 책을 쓰는 이들을 못본척 하게 되고. 그러나 아니 에르노의 글은 그렇지 않았다. 내 자신이 썼던 그 기나긴 일기들, 말로 전할 수 없었던 그 감정들을 쏟아붓듯이 미친 듯이 써내려갔던(그리고 보내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았던) 편지들을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따뜻한 위로는 아니다(이 책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뭐랄까,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라고만 덤덤하게 말해주는 그런 식의 위안이라고 해야 할까.

--이 책을 읽고 나서 쿠르베의 그림 [세상의 근원]을 다시 보면, 느낌이 굉장히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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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의 랑데부 동서 미스터리 북스 54
코넬 울릿치 지음, 김종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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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민학교 3학년 때 홈즈와 뤼팽 전집을 독파하며 추리소설의 세계에 눈을 떴고, 이후로 6학년 때까지 점심시간에는 언제나 학교 도서관에 처박혀서 도서관에 있는 추리소설이란 추리소설은 죄다 찾아 읽곤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의 풍경은 약간 코믹하기도 하고 좀 슬프기도 하다. 커다란 창으로 햇살이 쏟아져내리는데, 두꺼운 안경을 쓴 여자애가 도서관 책상에 혼자 앉아 음습한 추리소설에 코를 박고 있는 모습. 어쨌건 덕분에 그때 홈즈와 뤼팽 이후로 아가사 크리스티와 코넬 울리치, 엘러리 퀸, 딕슨 카 등을 처음 접할 수 있었다(그 중에서도 엘러리 퀸의 <이집트 십자가 살인사건>은, 해문추리문고 시리즈 특성상 친절한 일러스트레이션을 켜켜이 끼워놓았던 탓에 이집트 십자가의 이미지가 잠자리까지 따라와서 며칠 동안 내내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2. 코넬 울리치 또는 윌리엄 아이리시의 소설은 언제나 견딜 수 없게 로맨틱하다. 대도시의 밤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미스테리어스한 사건들에는 예정된 시간과 희생자라는 전제가 깔려져 있다. 그 도시성과 더불어 '예정'이라는 운명론적인 시각 때문일까. 사실 그래봤자 지금까지 읽은 울리치 소설이라고는 <환상의 여인><새벽의 추적><검은 옷의 신부><상복의 랑데부> 뿐이지만, 그래도 크리스티나 여타의 추리소설들을 읽을 때와는 느낌이 좀 다르다. 굳이 비교하자면 레이몬드 챈들러의 로맨티시즘에서 하드보일드한 건조함을 삭제하고 난 뒤와 닮았다고나....

3. 국민학교 때 읽었던 <검은 옷의 신부>는 결혼식 날 신랑을 잃은 미모의 여인이 몇년에 걸쳐 당시 죽음에 연관되었던 이들을 차례차례 없애나간다는 줄거리였는데, 어린 마음에도 그와 같은 파국의 전개가 꽤 인상적이었던지 아직까지도 몇몇 구절이 생생하다. 타란티노의 <킬 빌> 줄거리를 처음 들었을 때도 어, 그거 울리치 소설이랑 똑같잖아! 싶었는데 정작 인터뷰를 읽어보니 타란티노는 이 소설을 알지도 못했다고.....(트뤼포가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 버전도 꽤 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영 오질 않는다).



(트뤼포가 연출하고 잔느 모로가 주연을 맡은 <검은 옷의 신부> 포스터)

4. 번역이 썩 좋지 않으나 아쉬운 대로 보듬고 있는 동서 미스테리 북스 시리즈에서 새로 나온 <상복의 랑데부>를 얼마 전에 사서 읽었는데, 흠 제목만큼이나 <검은 옷의 신부>와 거의 흡사한 설정이었다. 끝에 가서 꼭 '그'를 그런 식으로 처벌해야 했는지가 상당히 불만스러웠지만(그냥 리플리 씨처럼 완전범죄로 해주면 안되는 건가?-_-) 어쨌든 소설 전편에 흘러 넘치는 도저한 낭만성은 거의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지경이었다. 영화의 첫장면처럼 소설의 첫구절은 정말 중요한데, 이 소설 같은 경우 '두 사람은 매일 밤 8시에 만났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오는 날에도, 달이 뜬 밤에도 뜨지 않는 밤에도. 이것은 요즈음 시작된 일이 아니다. 지난해에도 그랬고, 그 지난해에도, 또 그 지지난해에도 그랬다...' 로 시작한다. 워워워- 이런 문장이야말로 (The Smiths의 기타리스트와 이름이 똑같은) '조니 마'라는 남자가 한 여자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사랑했고 그 사랑이 그의 평생을 결정짓는 독약 한방울이 되어버리는 설정의 시작으로 얼마나 안성맞춤인가!

5. 인상적인 구절 몇가지를 옮겨보자면...

"당신은 굉장히 괴로운 얼굴인데, 마음 속도 그처럼 괴로우세요?"

"마치 하늘의 빛을 비친 듯이 빛나는 도로가 곧장 뻗어 있고, 그 위로 그녀의 소형 로드스타가 달려갔다. 그 로드스타는 어떤 형사라도 따라가지 못하리라. 그것을 운전하는 여자는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날개가 있다. 속도계 따위를 읽을 필요가 없다."

" 다른 사람에게는 제각기 자기를 기다려주는 애인이 있는데, 내 애인은- 내 애인도 역시 기다려주었군! 그의 팔이 굶주린 자처럼 그녀에게 감겼다."


6. 동서 시리즈에서 분명히 <검은 옷의 신부>도 다시 나온다고 한 게 몇개월 전인데 왜 여태 소식이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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