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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의 랑데부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54
코넬 울릿치 지음, 김종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1. 국민학교 3학년 때 홈즈와 뤼팽 전집을 독파하며 추리소설의 세계에 눈을 떴고, 이후로 6학년 때까지 점심시간에는 언제나 학교 도서관에 처박혀서 도서관에 있는 추리소설이란 추리소설은 죄다 찾아 읽곤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의 풍경은 약간 코믹하기도 하고 좀 슬프기도 하다. 커다란 창으로 햇살이 쏟아져내리는데, 두꺼운 안경을 쓴 여자애가 도서관 책상에 혼자 앉아 음습한 추리소설에 코를 박고 있는 모습. 어쨌건 덕분에 그때 홈즈와 뤼팽 이후로 아가사 크리스티와 코넬 울리치, 엘러리 퀸, 딕슨 카 등을 처음 접할 수 있었다(그 중에서도 엘러리 퀸의 <이집트 십자가 살인사건>은, 해문추리문고 시리즈 특성상 친절한 일러스트레이션을 켜켜이 끼워놓았던 탓에 이집트 십자가의 이미지가 잠자리까지 따라와서 며칠 동안 내내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2. 코넬 울리치 또는 윌리엄 아이리시의 소설은 언제나 견딜 수 없게 로맨틱하다. 대도시의 밤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미스테리어스한 사건들에는 예정된 시간과 희생자라는 전제가 깔려져 있다. 그 도시성과 더불어 '예정'이라는 운명론적인 시각 때문일까. 사실 그래봤자 지금까지 읽은 울리치 소설이라고는 <환상의 여인><새벽의 추적><검은 옷의 신부><상복의 랑데부> 뿐이지만, 그래도 크리스티나 여타의 추리소설들을 읽을 때와는 느낌이 좀 다르다. 굳이 비교하자면 레이몬드 챈들러의 로맨티시즘에서 하드보일드한 건조함을 삭제하고 난 뒤와 닮았다고나....
3. 국민학교 때 읽었던 <검은 옷의 신부>는 결혼식 날 신랑을 잃은 미모의 여인이 몇년에 걸쳐 당시 죽음에 연관되었던 이들을 차례차례 없애나간다는 줄거리였는데, 어린 마음에도 그와 같은 파국의 전개가 꽤 인상적이었던지 아직까지도 몇몇 구절이 생생하다. 타란티노의 <킬 빌> 줄거리를 처음 들었을 때도 어, 그거 울리치 소설이랑 똑같잖아! 싶었는데 정작 인터뷰를 읽어보니 타란티노는 이 소설을 알지도 못했다고.....(트뤼포가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 버전도 꽤 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영 오질 않는다).

(트뤼포가 연출하고 잔느 모로가 주연을 맡은 <검은 옷의 신부> 포스터)
4. 번역이 썩 좋지 않으나 아쉬운 대로 보듬고 있는 동서 미스테리 북스 시리즈에서 새로 나온 <상복의 랑데부>를 얼마 전에 사서 읽었는데, 흠 제목만큼이나 <검은 옷의 신부>와 거의 흡사한 설정이었다. 끝에 가서 꼭 '그'를 그런 식으로 처벌해야 했는지가 상당히 불만스러웠지만(그냥 리플리 씨처럼 완전범죄로 해주면 안되는 건가?-_-) 어쨌든 소설 전편에 흘러 넘치는 도저한 낭만성은 거의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지경이었다. 영화의 첫장면처럼 소설의 첫구절은 정말 중요한데, 이 소설 같은 경우 '두 사람은 매일 밤 8시에 만났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오는 날에도, 달이 뜬 밤에도 뜨지 않는 밤에도. 이것은 요즈음 시작된 일이 아니다. 지난해에도 그랬고, 그 지난해에도, 또 그 지지난해에도 그랬다...' 로 시작한다. 워워워- 이런 문장이야말로 (The Smiths의 기타리스트와 이름이 똑같은) '조니 마'라는 남자가 한 여자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사랑했고 그 사랑이 그의 평생을 결정짓는 독약 한방울이 되어버리는 설정의 시작으로 얼마나 안성맞춤인가!
5. 인상적인 구절 몇가지를 옮겨보자면...
"당신은 굉장히 괴로운 얼굴인데, 마음 속도 그처럼 괴로우세요?"
"마치 하늘의 빛을 비친 듯이 빛나는 도로가 곧장 뻗어 있고, 그 위로 그녀의 소형 로드스타가 달려갔다. 그 로드스타는 어떤 형사라도 따라가지 못하리라. 그것을 운전하는 여자는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날개가 있다. 속도계 따위를 읽을 필요가 없다."
" 다른 사람에게는 제각기 자기를 기다려주는 애인이 있는데, 내 애인은- 내 애인도 역시 기다려주었군! 그의 팔이 굶주린 자처럼 그녀에게 감겼다."
6. 동서 시리즈에서 분명히 <검은 옷의 신부>도 다시 나온다고 한 게 몇개월 전인데 왜 여태 소식이 없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