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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아니 에르노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은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였다 -_-;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화자는 자신의 어머니와 꼭 닮은 여자, 아니 에르노의 사진을 보고 매혹되어 [아버지의 자리]라는 책을 샀다고 회상한다. 그 책을 읽은 후로 아니 에르노의 이름은 18살 무렵의 내 머리속에 꼭 박혀 있었다.
[단순한 열정]의 머릿말은 바르트의 구절로 시작한다. "'우리 둘'은 사드보다 더 외설스럽다." 이 구절은 이 책의 모든 내용을 암시한다. 남자와 여자, 그 둘 사이의 미친 듯한 열정의 기록, 끔찍하게 솔직하고 단순하게 외설스러운 그 사랑의 이야기.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실제 겪었던 그 열정의 시간에 관해 차분하게 입을 열기 시작한다. 유부남이자 외국인인 그 남자, 아니 에르노는 그 남자를 위해 서슴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 시작한다. 이 열정은 너무 치명적인 중독과도 같아서 그녀는 이 중독에 기꺼이, 행복하게 자신을 내맡긴다.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남겨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지니고 있기 위해 다음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았다""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어진 것은 시간의 질서 속으로 사라져갔다" "내 아이들은 그런 순간에 빠져있는 엄마를 늙은 수코양이를 따라다니는 발정난 암코양이쯤으로 생각할 뿐이다""대중가요는 그 당시 내 생활의 일부였고, 내가 사는 방식을 정당화시켜주었다"" 이별이 예정되어 있는 열정은 2년 동안 그녀를 꼼짝없이 사로잡았고, 그녀는 남자와 헤어진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이 사랑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나는 원래 고백체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박일문의 소설들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 키치적인 나르시시즘의 고백에 질린 탓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찰스 부코우스키의 [시인의 여자들]도 몇몇 구절의 번득이는 재기 외에는 별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의 고백이 나를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는 이 열정의 시간이 지나간 후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기 직전까지 그녀가 수없이 되씹었을 그 사랑의 시간들, 그리고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 걸까 등의 왜?라는 무수한 질문들, 그렇게 느리고 힘겹게 얻어진 냉정한 성찰의 시선으로 그려내는 기억의 초상들. 나는 그녀의 그 엄정한 솔직함과 열정을 그리되 냉정을 유지하는 그 문체가 좋았다. [르 몽드] 지의 평을 빌리자면 '화해도, 양보도, 심리 분석도 없다. 정확한 단어들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해야 할까. 어떤 한계까지 가본 이들이 그 경험에 관해 타인에게 들려줄때 이 정도의 냉정한 통찰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드문 독서경험을 제공한다.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 할 수 있었다.....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 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고백체의 소설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나는 쉴 새 없이 나에 대해 표현하고 싶어한다. 굳이 말로 말하지 않더라도 글로 어떻게든 가장 정확하게 나의 경험에 대해, 나의 연애들에 관해, 그때 나의 느낌들에 대해 표현해 보고 싶어한다. 그것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얘기되든 아님 혼자 쓰는 일기에든, 그것은 일종의 노출증이고 극대화된 나르시시즘이다. 그것을 끊임없이 의식하기 때문에 말하고 쓰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쑥스러운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그리하여 반대급부로 그런 식의 책을 쓰는 이들을 못본척 하게 되고. 그러나 아니 에르노의 글은 그렇지 않았다. 내 자신이 썼던 그 기나긴 일기들, 말로 전할 수 없었던 그 감정들을 쏟아붓듯이 미친 듯이 써내려갔던(그리고 보내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았던) 편지들을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따뜻한 위로는 아니다(이 책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뭐랄까,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라고만 덤덤하게 말해주는 그런 식의 위안이라고 해야 할까.
--이 책을 읽고 나서 쿠르베의 그림 [세상의 근원]을 다시 보면, 느낌이 굉장히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