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가지 이야기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최승자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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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사람을 가끔 미칠 정도로까지 몰고 가는 그의 집요한 문체.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혹은 타인과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상실감. 영원히 과거에 사로잡힌 인물들. 매일 아침마다 "오늘은 죽기에 완벽한 날이군"이라고 중얼거릴 것만 같은 그들의 편집증적인 세계관.
샐린저의 소설을 읽다보면 옴쭉달싹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내게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폐소공포증의 세계. 샐린저에게 딱히 열광하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왜 그의 소설들에 지배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까.
단편 모음집 <아홉 가지 이야기> 중에서 가장 매혹적이었던 작품들은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코네티컷의 비칠비칠 아저씨> 두 편이다. 특히 <코네티컷의 비칠비칠 아저씨>의 마지막 두 문장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난 멋있는 여자였어, 안 그래?"
그녀가 애원했다.



...재밌는 건 <작은 보트에서>의 주인공의 성이 탄넨바움이라는 것이다. 예전에 <프래니와 주이>를 읽었을 때, 어딘지 웨스 앤더슨의 <로얄 테넌바움>이 소설 속 '천재 가문'을 모델로 하지 않았을까 하는 어렴풋한 추측이 들었는데, 물론 탄넨바움과 테넌바움의 영어 스펠링 자체가 다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끈질기게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어렴풋한 천재'를 주인공으로 삼는 샐린저의 분위기가 그 영화와 아주 다른 것 같진 않다.  

... 샐린저의 또다른 소설 <프래니와 주이>에선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깊이가 없다는 것은 내가 안고 가야 할 영원한 고통이자
목발이라고 말했다. 그것만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평가라는 것이었지. 그러니 주이, 절름발이들이 서로
그렇게 하듯 우리도 서로 도우며 친하게 지내도록 하자." 
 

"우리는 기형이야. 그것뿐이야. 그 두 놈이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거라구.
우리는 이를테면 문신을 한 여자야.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문신을
할 때까지는 죽을 때까지 잠시 잠깐이라도 평화로울 수 없을 거란
말이야...우린 '현명한 아이'라는 콤플렉스에 걸려있어. 우린 결코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어느 누구도 말야. 우린 말을 하는게 아니라
장황하게 떠벌리고 있는 거야. 우린 함께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라
혼자서 상세히 설명을 하고 있다는 말이야. 적어도 나는 그래."


진정으로 '어둠의 자식들'을 대변하는 문구랄까; 샐린저 본인은 그닥 호감이 가진 않지만 그가 쓴 문구들은 불만 많은 청춘들의 성스러운 경전이 될 법도 하다. 스무살때부터 시작된 사춘기, 언제쯤이면 조금 잠잠해지고 평정을 되찾을까? 그런데 모리스 피알라는 죽을 때까지도 평정을 못 찾았던 걸까? 광주영화제에서 봤던 <우리들의 사랑>에서 그랬다. "슬픔은 어디에도 있다. 슬픔은 영원히 지속된다"라니. 괴팍한 노인네가 스크린을 넘어서서 나에게 거의 낙인을 찍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의 다른 영화 제목은 <우리는 함께 늙어가지 않을 것이다>였다.

...그러나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를 읽을까 말까, 아직도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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