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톰 라이트 지음, 최현만 옮김 / 에클레시아북스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E. P. 샌더스를 필두로 한 새 관점은 신학계의 뜨거운 감자이다. 게다가 톰 라이트는 현재 새 관점의 백기사로 떠오르는 인물이다. 하지만 톰 라이트를 바라보는 복음주의자들의 시선이 곱지 만은 않다. 필자는 톰 라이트의 신학을 나름대로 이렇게 분석해보았다.

 

1. 새 관점, 과연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이 필요할까?

 

우선 새 관점의 주창자라고 할 수 있는 E. P. 샌더스의 말을 들어보자.

 

바울 당시 유대교는 행위로 말미암은 의를 주장하는 율법주의적인 종교라는 관점이 당연시되어 왔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유대교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언약의 틀 안에서 그 기능을 발휘한다.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은혜에 대한 적절한 반응으로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백성으로 들어가기(get into)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머물기(stay in)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율법 준수는 언약의 백성으로 머물기 위한 것이지 결코 들어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새 관점주의자들의 견해에 톰 라이트도 같은 보조를 취하고 있다.

 

장차 그 정당함이 입증될 이스라엘에는 누가 들어가게 되는가? 모든 유대인인가, 아니면 일부만 해당되는가? 우리가 미래에 하나님께 인정받게 될 것에 대한 현재의 증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한 언약적인 의무에 지금 우리가 충성을 다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율법의 행위들은 하나님께서 행동하실 그때, 우리가 그분의 백성으로 보일 것임을 현재 이 시점에서 증명해준다.” 165p.

 

유대인들은 일종의 펠라기우스주의자처럼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에 의한 칭의와는 무관하며, 오히려 최종적인 종말론적 대결에 앞서 참된 이스라엘이 누구인지 정의하고자 한 사람들이다. 유대인들은 현재 율법을 지킴으로써 미래에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임을 확신하고자 했다. 따라서 칭의는 구원론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교회론에 대한 것이며, 구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교회에 대한 것이다.”197-198p.

 

이렇게 사도 바울과는 달리(3:21, 4:14, 7:4, 2:16, 19, 3:10, 11, 21, 5:4) 율법 준수자들을 옹호하는 톰 라이트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의 신학에는 복음의 은혜로 가득한 기독교를 버리고 유대교로 개종시키려는 힘이 있는듯하다.

 

2. 칭의, 과연 법정이라는 맥락 안에서 보아야 하는가?

 

톰 라이트는 칭의를 법정이라는 맥락 안에서, 162p”볼 것을 강조한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복음을 믿는 사람에게 수여되는 것(3:22, 4:25, 벧후 1:1) 을 원천봉쇄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는 법정의 개념을 강조하면서 심판자 하나님의 의는 신자에게 전가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판사가 자신의 의를 원고나 피고에게 전가한다거나, 나누어준다거나, 증여한다거나, 전달한다거나 또는 건넨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의는 법정이라는 공간에서 이동 가능한 구체적인 물체나 물질 혹은 기체가 아니다.” 163p.

 

우리는 칭의의 첫 번째 사례가 창세기 15장에 있음을 알고 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전능성을 확신하면서 하나님을 믿었고, 그러한 믿음은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15:6). 그리고 하나님과의 은혜의 언약이 체결되었다. 칭의는 본래 법정의 개념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전능성에 기초한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의 개념만 있다.

 

그렇다면 칭의는 언약의 백성으로 들어가기(get into) 위한 것이지, 그 안에 머물기(stay in) 위한 것이 아니다. 바울의 복음은 칭의에 터 잡고 있었고(13:39),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은혜에 들어갔고, 어떤 사람들은 버림을 받았다(14:1-4). 칭의는 처음부터 언약의 백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3. 복음은 개인의 구원과는 관계없는 것인가?

 

톰 라이트의 지적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사울과 같은 유대인들은 추상적이고 무시간적이며, 비역사적인 구원의 체계에는 관심이 없었다. ‘죽었을 때 천국에 가는 것에 대해서도 원래부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관심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다고 믿었던 그 구원에 있었다.”47p.

 

사실상 우리의 복음 전도는 죽었을 때 천국에 가는 것으로 왜곡되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주기도문에서처럼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6:10). 게다가 복음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제자로 살게 하는데 있다. 이 모든 제자도는 영혼 구원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톰 라이트는 이 점을 약화시킨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었다.” 94p.

바울의 선교를 그저 개인 전도로, 즉 장차 천국에 들어가도록 각 사람의 영혼을 한 명씩 구출해내는 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250p.

 

4. 톰 라이트의 신학은 현대판 유대교의 부활인가?

 

세상에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영혼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지, 유대교의 메시지가 아니다.

 

하지만 톰 라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 내부의 진실한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참 백성으로 인정받게 된다.” 44p.

바울이 이 예수를 경배한 것은 유대인 가운데에서도 가장 충성스러운 유대인으로 계속 남으려는 목적이며 또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116p.

세상에는 비유대교적인 메시지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세상에는 이미 충분히 많은 비유대교적인 메시지가 있었다. 세상에 필요한 것은 유대교의 메시지였다.” 289p.

 

톰 라이트의 신학은 필자에게 신약을 구약과 연결해서 성경을 조망할 필요성을 강하게 어필해주고 있으며, 신약을 구약과 단절해서 해석할 때 이를 수 있는 치명적인 오류의 위험성을 경고해주었다. 그럼에도 톰 라이트의 책은 성경에 견고한 뿌리를 두지 않은 사람이 읽기엔, 너무도 벅찬 작품임에 틀림이 없다.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전파한다는 의미는 그 복음을 온 삶으로 살아내는 것을 포함한다. 276.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목적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바로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선택한 목적이었다.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은 청천벽력 같이 기괴하고 새로운 사것이 아니었다. 역사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은 신적인 계획을 마무리하는 절정으로 볼 수 있다. 133.

바울에게 있어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위를 찬탈하여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던 모든 권세에 대항해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세상의 창조자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승리의 수단이며 상징이다. 이 사실이 바로 십자가가 복음의 핵심인 이유이다. 7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