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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가 되고 싶어 - 읽고 옮기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개정판
이윤정 지음 / 동글디자인 / 2025년 7월
평점 :
이 책은 번역이라는 일에 대한 낭만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 속에 담긴 치열함, 고요한 고독, 언어와 씨름하는
매일의 고된 리듬도 솔직하게 펼쳐 보인다.
한 문장을 고르고, 수십 번 곱씹고, 가장 어울리는 말의 결을 찾아내는 일.
그 섬세한 고뇌와 기쁨이 이 책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출판이라는 세계에,
그리고 그 세계를 떠받치는 번역가라는 존재에 묘한 동경을 품고 있었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들, 그 미묘한 어조와 결을 온전히 옮겨내는 사람.
그것이 내가 생각했던 번역가였다.
이 책은 그런 나의 로망에 단단한 뿌리를 내려주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번역이란 결국 ‘사람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요즘 들어 종종 드는 의문이 있었다. AI가 점점 더 정교한 번역을 해내는 시대에,
과연 번역가라는 직업은 지속될 수 있을까? 기계가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닐까?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번역은 단순히 문자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었다.
그 언어가 지닌 문화의 결, 말 너머에 흐르는 감정의 온도까지도
함께 옮겨야 하는 섬세한 여정이었다.
문맥 속에 조용히 스며든 작가의 숨결을 포착해,
그것을 또 다른 언어로 다시 숨 쉬게 하는 일.
그것은 단순한 전달을 넘어, 번역 그 자체가 하나의 창작이며,
진심을 다해 재탄생시키는 예술이라는 것.
그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작업이었다.
기계는 문장을 옮길 수는 있지만, ‘의도’와 ‘온기’는 번역하지 못한다.
한 문장을 선택할 때 느껴지는 떨림, 그 미묘한 뉘앙스를 다듬는
손끝의 감각은 결국 사람의 몫이다.
『번역가가 되고 싶어』는
번역이라는 작업에 내재된 숭고함을(그 고된 여정까지도)
숨김없이 펼쳐보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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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3
영어라는 외국어를 배운 보람과 재미는 영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때 가장 크게 와닿는다. 그래서 번역가의 역할이 더 중요한 거 아닐까? 누구나 다 외국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는 없으니, 우리말로 번역된 자막을 보면서도 외국어로 볼 때와 똑같은, 혹은 최대한 비슷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도록 중간 역할을 해 주는 게 번역가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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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7
출판사에서 샘플을 볼 때는 원문과 일대일로 비교하며 채점을 하는 게 아니라, 한국어로 번역된 글만 읽었을 때도 글이 아주 자연스럽게 읽히면서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명확하게 드러나는지를 중점으로 본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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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6
저자가 어떤 정보를 주려고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으면 그 내용의 배경지식을 찾아서 읽어보고 저자가 하려는 말을 정확히 이해한 다음에 한국어로 옮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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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2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 인터뷰에서 "좋은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꼭 필요할까요?"라는 질문에 아주 신선한 대답을 내놓았다. "귀. 음감이 나쁘면 번역을 못 합니다"라고. 회고록을 번역해 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굳이 그 문장을 소리 내서 읽지 않아도 눈으로 읽으면 귀에 들리잖아요"라는 그의 대답에 나는 '그래, 바로 이 느낌이야'라고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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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2
행복이란 게 별건가? 한 단어, 한 문장을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다 마침내 번역한 문장이 마음에 쏙 들 때, 몇 달간 붙들고 있던 역서가 출간돼 증정본이 도착하면 오탈자가 보일까 실눈을 뜨고 책장을 펼치다가도 이내 촤라락 종이 냄새를 맡으며 결과물의 물성을 느낄 때, 표지나 책날개에 찍힌 내 이름 석 자와 프로필을 확인할 때, '살다 나온' 작품의 장면들을 회고하고 인상 깊은 문장들을 훗날 곱씹을 때,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놀다가도 집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는 순간 번역가로서의 자아를 만날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그토록 하고 싶고 잘하고 싶던 일을 하면서 '고맙다', '멋지다'라는 말을 들을 때, 그런 작지만 소소한 보람과 재미들을 '실감으로써, 그리고 경험칙으로써' 알 때, 행복하게 일하고 있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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