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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젊은 시인이 보낸 편지 - 릴케와 카푸스 왕복 서한집
라이너 마리아 릴케.프란츠 크사버 카푸스 지음, 최성웅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3월
평점 :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시인을 꿈꾸던 청년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가 주고받은 편지를 엮고, 해설까지 덧붙인 서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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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담긴 릴케의 편지들은 단 한 통도 가볍게 쓰여진 것이 없었다. 매번의 답장에는 그의 깊은 진심과 사유가 담겨 있었으며, 하나의 작품처럼 심사숙고하여 써 내려간 흔적이 돋보였다. 단순한 조언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 속으로 침잠할 것, 고독을 견디고 사랑을 배울 것, 그리고 외부의 평가가 아닌 내면의 필연으로부터 글을 써야 한다는 철학적 사유가 돋보이는 본질적인 통찰과 가르침들을 진심을 담아 전했다.
그에게 글쓰기란 기술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서 비롯되는 필연이며, 이러한 태도는 편지 전체를 관통하는 단단한 중심으로 자리한다.
한편 카푸스는 시인을 꿈꾸는 청년으로서의 설렘과 긴장을 안고 편지를 시작하지만, 릴케와의 서신이 이어질수록 점차 삶과 예술을 함께 사유하는 존재로 변화해 가는 모습이 보인다.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독자로 성장하는 동시에, ‘글을 쓰고 싶은 사람’에서 ‘글 쓰는 존재’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 성장의 이면에는 결핍이 함께 자리하는 것 같았다. 사유가 깊어질수록 그의 글쓰기와 시에 대한 갈망은 더 선명해지고 커져만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카푸스가 이러한 감정적 혼란을 보여주는 와중에도 릴케는 끝까지 흔들림 없이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그는 고독을 회피하지 말고 견뎌낼 것을, 그리고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태도와 내면의 진실성을 지켜낼 것을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제시한다. 일관된 내면과 필연을 강조하는 릴케의 사유와 태도가 이 서신집을 더욱 깊이 있고 의미 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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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6
그러니 아이러니가 절대로 도달하지 못할 깊이를, 사물의 깊이를 추구하십시오. 그리하여 위대함에 조금이라도 가닿게 된다면, 그 즉시 당신을 거기까지 이끈 사고 방식이 당신 존재의 필연에서 나온 것인지 살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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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7
그리고 무엇보다도 책을 사랑하길 바랍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수천 배로 보답 받을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앞으로 당신의 인생이 어떻게 바뀌어 가더라도, 그 어떤 경험과 환멸과 환희의 올올을 얻게 되더라도, 책에 대한 사랑은 늘 중요한 한 올로 남을 것이며, 그 한 올은 결국 당신의 장래라 불리울 피륙 전체를 꿰어 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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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8
이때 시간은 어떠한 척도도 될 수 없습니다. 햇수는 조금도 유효치 않습니다. 10년의 세월도 아무것이 아닌 바, 예술가 로서 존재하기란 셈이나 계산을 않고 그저 나무처럼 무르익는 것입니다. 나무는 수액을 억지로 짜내지 않으며, 봄날의 폭풍에 시달릴 때도 여름이 오지 않을까 격정하는 법 없이 의연히 서 있습니다. 여름은 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여름은 오직 인내하는 자들에게만, 마치 영원을 앞에 둔 것마냥 근심 없이 고요하고도 광막하게 서 있는 자들에게만 찾아옵니다. 저는 이러한 교훈을 매일, 다름 아닌 고통 속에서 얻고 있으며 그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인내가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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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9
하지만 그럴 때야말로 고독을 키워낼 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래 성장하는 고독은 성장하는 소년처럼 고통스러워하며, 막 시작된 봄처럼 슬퍼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런 감정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없어서 아니될 것은 오직 고독, 크나큰 내면의 고독뿐입니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기, 그리고 오랜 시간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기. 거기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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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4
고독과 불안 속에서, 저 높은 곳을 향해 치닫는 심장에 의식을 집중하고, 온 존재를 걸고, 전심전력으로,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허나 배움의 시기는 오랜 고립의 시기이며, 따라서 사랑이란 오래도록 자기 안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일인 것...... 이는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고독입니다. 보다 높고 깊어진 홀로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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