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아
김필산 지음 / 허블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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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엔트로피아』는 “미래에서 과거로 되살아온 한 선지자의 이야기”라는 놀라운 시간 설정을 통해, 인간 존재와 역사의 본질을 묻는 장편 SF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결단에 이르게 하는 서사의 힘을 깊이 있게 보여주고 있다.


프롤로그에서 노쇠한 선지자를 기대하던 로마 장군 앞에 아기의 모습으로 등장한 선지자는, 진리를 설파하지 않는다. 대신 세 권의 책, 세 편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묻는다. “당신이 직접 판단해 보라”고.


그중에서도 두 번째 이야기인 <책이 된 남자>는 이 책의 백미다. 이 이야기의 설정은 충격적일 만큼 잔인하면서도, 동시에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 싶을 만큼 신박했다.


읽는 내내 불편함과 경탄이 교차한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작가의 탁월함이 느껴졌다. 이야기의 끝에서, 독자는 단지 한 권의 소설을 읽은 것이 아니라 자신 안의 판단과 신념을 조우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엔트로피아』는 단순한 SF가 아니다. 이 책은 시간이라는 수단을 빌려, 인간이라는 존재의 중심을 조용히 흔들어 놓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 중심을 향한 여정에서 결국 깨닫게 된다. 진실은, 듣는 이가 스스로 결단하는 이야기 속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


p.370

"선지자여, 그대는 세 가지 이야기를 통해 나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소. 그대의 이야기들은 무척이나 흥미로웠고, 그런 점 때문에 난 가슴이 뛸 정도로 큰 감동을 받았소.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여전히 그대의 말을 전부 믿지 못하오. 그대는 이야기를 통해서는 그대만의 권능을 증명해 보이지 못했소. 선지자께서는 주사위의 눈을 미리 말하고 그것을 던지는 식으로 아주 손쉽게 권능을 증명해 보일 수 있소. 하지만 선지자께서는 길고 긴 이야기를 통해 나를 설득하고 절대적이며 변화 불가능한 우주의 법칙을 이해시키려 하였소. 그 이유가 무엇이오? 선지자께서는 어째서 나에게 감명을 주는 이야기를 통해 나를 감화시키고 설득하려 한 것이오?"


선지자가 답했다.


"장군처럼 현명한 인간에겐 길고 긴 변론만이 이 위대한 진실을 직접 마주하게 할 수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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