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 읽던 중 “스타벅” 이름 보는 순간 <배틀스타 갤럭티카> 떠올랐다. 모비 딕이 이런저런 (많은) 작품의 어느 지점들에서는 원형일지도. 이제 에이해브 선장 만나기 직전인데, 선장과 고래는 어째서인지 별로 안 궁금하고 오히려 이슈메일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 읽을수록 그렇다. 미리보기 점역 파일 올리면서 몇 문장 인용하려다 말았다. 읽을수록 인용하고 싶은 부분이 많아질 듯했다. 십 년 전에 비해 잘 읽힌다. 시간과 경험이 쌓여서인지 요즘 이런저런 철학 책을 읽거나 필사해서 기분에 그런 것인지. 소설이 아닌 듯하다. 개연성 있는 거짓말을 왜 힘들여 읽나 하는, 이상한 생각에 픽션보다 논픽션 쪽이 나는 좋았다. 그러고 보니 하루키 작품도 소설보다는 에세이나 논픽션을 좋아했다.
“이 책은 희랍 시대부터 근대까지 철학사의 대표적인 고전들을 통해 형이상학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세계의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형이상학은 유한자로서의 인간이 무한자의 입장에 올라서려는 고투의 학문이다. 변함 속에서 변함 없음을 향해 가는 이러한 사유 행위를 통해서라야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와 자신의 근본적인 모습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위 인용문이 적힌 <<철학고전강의>> 앞날개를 본문 보다 자주 본다. 데카르트에 와서는 특히 그랬다. 라티오 팟캐스트를 들어도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유튜브를 봐도, 심지어 평서문으로 바꿔 읽어도 따라가기 힘들었다. 자신에 대해 주체적인 사유는커녕 생각을 안 해와서 그런 건 아닐까. 생각을 하려면 좀 멈췄어야 하는데 쉴 새 없이 자신을 “착즙”하며 살아와서 그런 건 아닐까. 일 생각은 많이 했는데. 이랬다.
데카르트와 홉스가 주고받았다는 논변에 와서는, 점 또는 선으로 보던 것을 면 또는 망으로 보게 됐다.
<<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를 일단 읽을까 말까 하다가 <<에로스를 찾아서>> 필사하던 중 읽기로 했다.
라티오 책은 두꺼워도 한 손으로 접어 읽기 가볍고 편해서 좋다. 난 갖고 나갈 일이 없어 책상에서 펴놓고 읽지만 한번 접어봤다.
작년 3월 이후의 “절망과 분노에서” 못 벗어났다. <<국가>>를 읽으며 “내 나라가 왜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를 차근차근 되짚어 봐야만 한다”는데, 3·1절 기념사를 저따위로 해대는 것과 저런 것을 지지한 절반에 대한 “절망과 분노”가 또 올라온다. 유퀴즈에 나온 한국사 신동에게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