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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여자의 공간 - 여성 작가 35인, 그녀들을 글쓰기로 몰아붙인 창작의 무대들
타니아 슐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봄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 글쓰는 여자의 공간 >
- 타니아 슐리 / 남기철 옮김 / 이봄 -
이 책은 나올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책입니다.
글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책의 제목부터 궁금증을 슬쩍 슬쩍 건드리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책은 35명의 여류작가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게 되었는지 공통되는 주제로 묶어 한 사람씩 짤막하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유명한 이들도 있고 생소한 이들도 있습니다.
200여 년전에 살았던 이도 있고 생존하고 있는 이도 있습니다.
글은 간결하고 글 중간중간 그녀들의 사진들이 있어 지루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여자들이라면 한 번쯤은 누구나 꿈꿨을지도 모를 '자신만의 공간'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시선을 더 끌어당기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어릴 적부터 내게는 작은 공간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즈음엔 교회 언니들과 작은 다락방에 배를 깔고 누워 미스 유니버스 아가씨들을 수도 없이 배출해내었지요.
책 크기의 누런 종이에서 쏟아져 나오는 그녀들은 새로운 의상과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미래이기도 하고 도달할 수 없는 현실 너머의 머나먼 신기루이기도 했습니다.
교회와 집들이 철거된 후 이사온 곳에선 몇 년 후에 가지게 된 내 방이 있었습니다.
물론 여자 형제가 없다는 이유로 할머니와 함께 사용했지만 할머니는 대부분 나에게 맞춰 주셨고, 그 방은 곧 내 방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창문이 없어 불을 끄면 다락방의 그 때와 같은 분위기를 내던 방에서 그 때보다는 조금 더 용감한 여자들이 튀어 나왔습니다.
남장을 한 여탐정도 있고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용감한 딸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내게 영향을 주던 남자들은 대부분 탐정이나 대도 혹은 말을 타고 달리며 의에 분연히 일어서던 개척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커서 내게 주어진 공간은 독서실이었습니다.
물론 부모님은 공부를 하라고 보내주셨지만 난 그 작은 책상의 구석에서 속삭이는 불빛을 바라보며 그 빛보다도 더 희미한 현실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남매이지만 여자는 혼자라는 이유로 내 방은 늘 배려해주셨고, 어쩌면 난 나만의 공간이라는 선물을 오래도록 받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결혼 후엔 내가 아니라 우리라는 개념을 다시 쌓게 되었고, 지금도 역시 아이들과 가족을 위한 공간으로만 구성된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작년에 이사를 하게 되면서 구석 어딘가에 내 공간 하나를 심으려고 노력했지만 역시 어려웠습니다.
나만의 공간에 익숙해서 살았던 20년과 나만의 공간을 잃은 20년은 묘한 대비를 주며 내게 새삼스레 다가옵니다.
그러다가 만난 이 책은 또 다른 꿈을 꾸게 만듭니다.
공간이라는 것이 어떤 곳에 거하는 것으로서의 공간도 있지만, 나를 불러들이고 불사르게 하는 어떤 존재 역시 공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이에겐 당연한 일이었고 또 어떤 이에겐 목숨을 내놓고 걸어야 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쓴 이도 있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 쓴 이도 있습니다.
잠깐 쓰다가 사라진 이도 있고 오래도록 사랑하는 이들의 곁에 머물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이도 있습니다.
결국 쓴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이고 그렇게 쓰는 공간은 그의 체취나 피였을 것입니다.
솔직히 이름만으로는 모르는 이가 더 많았지만, 책을 이야기하면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들어있던 사진을 통해 그녀들의 글을 만나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습니다.
눈빛에서, 펜을 잡고 있는 손가락에서, 단정하거나 혹은 삐딱하게 앉아 있는 자세에서, 그녀들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녀들처럼 거창한 길은 아니어도, 나 또한 나만의 공간을 꿈꿉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노라면, 공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통해 자신에게 부여된 삶을 녹여내고 저항하기도 한 인생들의 아름다움을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 또한, 보이는 공간 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 맘 속 공간에서 나도 만나고 너도 바라보며 담담하고 연한 글들을 풀어내고 싶습니다.
아마도 내가 머무는 공간 그곳에선 풀냄새가 언뜻 느껴졌으면 좋겠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나 마음 따뜻해지는 연한 잎차 같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