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쟁이 예수
박총 지음 / 살림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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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총, 삶의 이야기 -<욕쟁이 예수>를 읽고


 

박총이라는 저자의 책을 처음 읽어 보았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그의 생각뿐 아니라 인생관과 생활 모습까지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이 넷이며 그 아이들의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까지 알 수 있었다. 글로 대화하기 위해 스스로에 대해 열어놓았다는 느낌, 그래서 한 사람의 인간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진솔하듯 예수의 진솔한 모습도 스케치해준다. 강하게 표현하자면 예수는 욕쟁이였고 술꾼이었고 파티보이이기도 했다. 저자는 이렇게 예수의 색다른 면모를 각 장의 제목으로 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세 가지 이야기들을 여기에 남기겠다.

저자는 무늬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부터 철저히 회심하여 세상을 바라보라고 권한다. ‘유색인 예수’라는 장에서 그는 백인우월주의적인 시각을 깨뜨려주었다. 백인들은 추위와 맞서 싸워야 해서 일찍이 생존을 위한 기술문명이 발달한 것이고, 연중 산물이 풍부한 열대에 사는 흑인들은 태평스런 성품에 맞춰 음악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산업 기술에 따라 선진국과 후진국을 나누는 서양적 사고체계를 받아들이고 무의식중에 나라간 우열을 가렸던 내 모습을 반성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이 시대의 문화에 대해서도 기독교적 관점을 제시한다. 특히 ‘찍사 예수’라는 장에서 저자의 기독교적 사진 미학을 인상깊게 읽었다. 누구나 하나쯤 사진기를 가지고 있지만 과시욕의 수단으로 사용할 때가 많다. 이런 시대에 저자는 '사진의 방식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서의 사진’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실 때 ‘좋았더라’ 하셨던 그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남들보다 더 깊은 사랑으로 대상에 천착할 때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진찍기가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배우고 그것이 조심스러웠던 내게 사진찍기 선배의 또다른 소중한 가르침이었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연인 예수’라는 장이었다. 여기선 저자의 삶의 숨결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배우자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저자가 아내에게 헌사를 쓴 것으로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나는 안해의 영혼을 깊이 사랑했다.”라는 문장이 주는 울림은 상당했다. 연애가 소비주의와 손잡고, 돈이 없으면 연애도 할 수 없다는 세상의 분위기 속에서 돈이 들지 않고도 10년 동안 데이트를 하였던 그들의 풍경이 풋풋하면서 값져 보였다. 그리고 저자는 예수의 사랑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참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고백도 빼놓지 않았다.

카페에서 오랜 시간 누군가의 살아가는 이야기, 삶에 대한 생각을 들은 기분이다. 그러나 그는 가벼운 사람이 아니고, 현대의 그리스도인이 생각해야 할 것에 대해 짚어주는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도 삶의 작은 부분에서부터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을 되찾고 싶어졌다. 지방선거 전날 후보자 정보를 검색해 읽은 것도 하나의 실행이었다. (사실 ‘투표하는 예수‘라는 장의 한 문장, “다른 사람은 어찌하든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죄다.”가 한몫 거들었다.) 박총은 대담하면서도 세심하게 예수를 드러내었고 그 분 닮은 삶을 살고자 하였다. 그리고 예수 닮은 삶을 함께 살아가자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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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사람들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 / 비전과리더십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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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향해 아직도 가야할…

-<거짓의 사람들>을 읽고


악에 대해 탐구한 <거짓의 사람들>은 악이 거짓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면 사탄은 ‘거짓의 아비’라고 성경에 나온다. 저자는 정신과 의사이자 유명한 저술가인 스캇 펙이었다. 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윤리적인 책에서 많이 다루었지만, 정신 과학자의 입장에서 악을 치유해야할 질병으로 보고 접근하는 책은 이 책을 본 것이 처음이었다. ‘악’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들여다보고 있기 꺼림칙하면서도 흥미를 유도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지닌 악의 모습은 다양했지만, 자신과 타인을 속이길 원하는 거짓의 속성이 공통적으로 드러났다.

스캇 펙이 볼 때 악은 회피에서 비롯된다. 첫 사례로 나온 조지의 강박증 이야기 역시 그랬다.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글자가 현실이 될까봐 괴로워하면서 신경쇄약에 걸린다. 강박증을 없애기 위해 악마와 계약을 하기에 이른다. 그가 악인의 기로에 섰다고 파악한 스캇 펙은 그를 강하게 권면한다. “조지, 한마디로 말해서 당신은 겁쟁이입니다. 일이 좀 어려워진다 싶으면 내빼지요.” 조지는 과거의 기억이나 삐거덕거리는 결혼생활, 죽음의 공포에 대해 회피하기만 했고 그 결과 강박증에게 쫓겨 다니게 된 것이었다. 질병이 그러하듯이 악을 치유하기 위해서도 고통을 직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악한 이들에게는 단지 자신의 의지만이 있을 뿐인데, 이것은 정신의학용어로 ‘악성 나르시시즘’이라 불리며 일반적으로 ‘교만’이라고 불린다. 교만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이들은 내면의 그러한 혼돈을 절대 밖으로 내비치지 않으며 존경받는 이미지를 고수한다. 그러므로 자기 성찰 작업인 정신 치료 역시 받으려 하지 않는다. 스캇 펙도 이들에게 치료를 권하지만 거부당한다. 기독교에서는 교만을 큰 죄로 여긴다. 잠언 곳곳에 교만을 경계하라는 메시지가 들어있다. 세상이 나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 악은 참으로 오만한 얼굴을 하였다.

악은 타인에 대해 세심한 관심을 가지지도 못하게 한다. 악한 부모는 자신의 자녀에게 무심한 나머지 그를 병들게 한다. 바비의 부모는 바비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형이 자살한 권총을 주면서도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바비는 자신도 자살해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례로, 로저의 부모는 로저의 필요를 무시한다. 로저가 기숙사 학교로 가길 원했을 때는 성 토마스 고등학교에 보냈다가 이제 그 학교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는 기숙사 학교에 보내버린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괴이한 행동이다. 이 정도는 아니겠지만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도 이런 악이 숨어 있지 않을지 주의해야 한다.

악에 대한 글을 읽고 또 쓴다는 건 힘들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내 안에도 존재하는 지배욕과 소유욕, 위선적인 모습을 돌아보아야 했던 것도 어려웠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불완전한 자기 모습을 인정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리라. 하지만 이러한 인정이야말로 선을 향한 첫걸음이라니, 고통의 시간을 가져볼 필요가 있겠다. 그러고 보면 나의 부족함 때문에 울어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그래서 마음은 평온했겠지만 겸손이라는 덕목을 쌓는 데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언제쯤 나 자신을 부정하고 참으로 겸손해질 수 있을지, 아직은 평온한 마음을 보며 한숨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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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러스 (2disc) - 아웃케이스 없음
크리스토퍼 바라티에 감독, 제라르 쥐노 외 출연 / 기타 (DVD)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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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코러스>를 보고

 


기숙사, 합창단... 그런 이야기가 내 마음 속에 오래 머물렀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에서>를 읽은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몇 년간 모자원에서 자랐던 과거의 기억이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던 중 기숙학교 합창단을 배경으로 한 영화, 크리스토프 바라티에르 감독의 <코러스>를 보게 되었다. 이야기는 교향악단의 지휘자 모향주에게 옛친구 페피노가 일기장을 들고 찾아오며 시작된다. 일기장은 60여년 전 그들을 사랑해주었던 마티유 선생님의 것이었다. 이제 영화는 일기장 속, 그들이 함께했던 시절 속으로 들어간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프랑스 마이세이유의 작은 기숙학교로.

카메라는 하루하루 그들의 생활을 잔잔하게 비춘다. 그런 시선이 좋았다. 축구를 하는 장면, 걸레질을 하는 장면, 선생님을 골탕 먹이는 장면... 체벌이 만연하는 학교, 가난한 학생들, 특별하지 않은 일상이 현실적이어서 좋았다. 거기에 나의 과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를 아름다운 색깔로 채색해보려 하면 곧 진실의 장벽에 부딪친다. 과거라고 해서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그 자체로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리운 어떤 힘을 느낄 것이다.

모항쥬는 반항아적인 기질이 있지만 얼굴이 천사처럼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알고 보니 노래도 무척 잘 불렀다. 합창단을 만든 마티유 선생님은 모항쥬의 재능을 알아보고 아낀다. 영화 후반에 모항쥬의 눈이 클로즈업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은 말썽을 용서받은 안도감,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는 기쁨과 감사의 눈이었다. 나도 그런 눈을 했던 적이 있었다. 특별히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이 나를 아껴주셨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라는 책에서 제제에게 뽀르뚜가 아저씨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마티유 선생님은 불의의 사고로 학교에서 퇴출당하게 된다. 교장과 한판 싸우고 나오면서 마티유 선생님의 마음에 ‘실패한 작곡가’라는 교장의 말이 남는다. 실패한 작곡가였던 그는 학교에 있는 동안에도 대내외적으로 크게 이룬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학교를 나온 이후에 화려한 성공을 거머쥐게 될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었던 아이들을 향한 사랑, 신뢰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작별인사를 금지당한 아이들의 기발한 배웅과 학교 교문을 나서는 선생님의 자조적인 독백은 서로 교차하며 보는 이의 눈물을 자아내었다.

이 영화는 프랑스 900만 관객을 동원하였다. 선생님과 학생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코러스>에는 여타의 사제지간 감동스토리와 구분되는 점이 있다. <화이트 스콜>, <죽은 시인의 사회>, <블랙>이 극적인 갈등, 해결을 보여주며 폭풍과도 같은 감동으로 몰고 간다면, <코러스>는 감정이 고조될만한 설정들을 비켜갔다. 전반적으로 쾌활한 분위기인데다가 소박하고 잔잔한 설정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나는 더욱 과거를 회상하며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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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인생최고의 가치 예배3부작 1
김기현 지음 / 죠이선교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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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무엇인가 -<예배, 인생최고의 가치>를 읽고

 

예배에 대한 강조가 설교나 이야기 중에 많이 나온다. 수련회에 가면 공동체의 예배가 회복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빼놓지 않고 한다. 예배라는 단어도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왜인지 그 실체가 손에 잡히지 않는 느낌이 있었다. 자주 사용하는 만큼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아무리 말해도 추상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기현의 <예배, 인생 최고의 가치>를 읽었다. 예배는 가장 가치있는 것, 그것을 인정한다는 뜻이었고 가장 가치 있는 분께 합당한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행위였다. 새삼 예배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 책의 각 부분을 정리하고 느낌을 써보았다.

 

1부는 예배의 문자적인 정의부터 시작하여 희생제사, 안식, 싸움으로서 예배가 지니는 의미를 설명한다. 특별히 예배가 지닌 안식이라는 의미가 와닿았다. 고든 맥도날드는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에서 주일 예배들이 현대에 와서는 안식일의 의미를 놓쳤다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김기현의 1인 1사역 제안은 교회의 현실을 존중하면서도 안식의 의미를 놓치지 않은 적절한 조언이라 볼 수 있다. 교회 자체의 일거리가 많은 교회에서는 안식으로서 드리는 예배를 주의해야 할 것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에서는 거짓 교회의 특징 중 하나로 하나님보다 교회나 교회 프로그램을 중시하는 것을 들었다.


2부는 예배의 태도와 종류를 이야기한다. 이 부분은 자칫 주일날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만족하기 쉬운 교인들이 예배의 태도에 대해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리고 예배의 종류로 개인예배, 공동예배, 생활예배, 가정예배가 있다는 것을 차근차근 알려준다. 가정예배가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는 점이 와 닿았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니 진리다! 그리고 공동예배와 생활예배가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와 닿았다. 생활예배가 안 되는 사람의 공동예배는 티가 나게 된다. 나 자신을 대입해서 적용해 보면 집에서 하기 싫은 것은 교회에서도 하기 싫었다.


3부는 예배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묶었다. 돈이나 공부보다 하나님을 선택해야 한다는 점, 예배 찬양이나 열린 예배에서 기억해야할 점, 교회력 예배가 예배의 한 형식이라는 점이 적혀있다. 3부는 장소나 형식, 감정, 음악적 선호나 외모보다 하나님 한 분을 높여드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예배를 드리지 못했던 때가 많았다. 주위 교인들의 시선이나 친구의 출석 여부에 더 관심을 기울였고 목사님의 설교를 평가하거나 찬양 선곡을 판단하기도 했다. 예배의 모습은 있었으나 예배의 내용은 잃어버렸지 않았나 반성하였다.


요즘 교회의 모습이나 공동 예배 자체에 반감을 가지고 떠나는 교인들이 많다. 교회가 맞지 않거나 참 교회라고 생각되지 않는다면, 과감히 옮기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아예 공동 예배를 외면해버리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저자는 공동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이유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요, 몸인 자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인간이 모인 교회도 아름답고 거룩하기만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간을 위해 예수님께서 피 흘리셨다. 때론 교회로 인해 상처를 받고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놓치지 않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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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 10장을 쓰는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황혜숙 옮김 / 루비박스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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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말의 구슬을 꿰는 글쓰기 -<원고지 10장을 쓰는 힘>을 읽고

 


사이토 다카시가 지은 <원고지 10장을 쓰는 힘>을 읽었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언어학자로 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다. 대표작으로는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일본어>와 <신체 감각을 되살린다>가 있다. 그는 글을 잘 쓰고 싶지만 어떻게 노력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알기 쉽게 조언을 해준다. 그에 따르면 원고지 10장 분량을 계속 쓰면 그 이후엔 어떤 분량의 글이든 쓸 수가 있다. 달리기도 1킬로미터를 꾸준히 연습한 사람이 10킬로미터 달리기가 쉬운 것처럼 말이다. 한 마디로 질보다 양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양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되어야만 내용에 집중하기 쉽다.

다음으로 그는, 글이 구성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흥연주를 하는 뛰어난 음악가도 머릿속에 전체 구상을 해놓는다. 글쓰기 전엔 철저한 구성이 필요하다. 그는 어떻게 하면 구성을 잘 할 수 있는지도 자세히 알려준다.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는다면, 여러 색의 펜을 사용해서 어떤 부분을 글에 써먹을지 밑줄을 긋고 여백에 메모를 한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키워드(핵심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를 정한다. 그리고 세 개의 키컨셉(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세우고 그것을 연결시킨다. 키컨셉은 성격이 달라야 하고 이렇게 다른 것들을 얼마나 잘 연결하느냐가 독창성을 판가름한다. 그 후 글의 설계도라할 수 있는 레쥬메(글의 구성이나 글 안의 항목을 정리)를 작성한다.

문체를 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연기자에 비유하자면 구성력은 연기력이고 문체는 존재감이다. ‘존재감이란 자기 나름의 스타일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117p)’ 먼저는 구성력을 열심히 훈련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이면 문체도 확립해야 한다. 글을 쓸 때 자신의 포지션이 어디인지 찾아보면 자신의 문체를 알 수 있다. 소리 내어 글을 읽어보고 생명력이 느껴지는가 하는 것으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문체를 만들려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읽고 따라 쓰는 게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이나 영화, 이 세상을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잘 풀어내는 훈련이 필요하다. ‘어떤 대상에게서 받은 수동적인 영향을, 글을 쓰는 능동적인 행위로 반전시키는 것이다.(140p)’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깨달은 건 ‘구성’이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걸 익히 들어왔으면서도 체계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글을 썼던 적이 많았다. 구성이 어렵기 때문이다. 말도 생각나는 대로 하면 쉽다. 그러나 이미 세운 주제에 맞춰서만 말하라고 하면 어렵다. 글도 마찬가지다. 끈질기게 두뇌를 굴려서 설계해야 하니 쉽지가 않은 게 당연하다. 게다가 글은 말과는 달리 상황을 초월하기에,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써야 한다. 나는 이러한 글의 공공성을 간과할 때가 많았다. 혹은 객관과 주관을 잘 조화시키지 못해서 사실 설명이 불충분하거나 반대로 너무 딱딱한 글을 쓰기도 했다. 앞으로 구성을 할 때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는 연습도 필요하다.

책을 읽으며 인생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었다. 글과 삶은 닮아 있다. 방향을 잘 잡고 자기 스타일을 찾아서 꾸준히 노력하여 페이지를 채워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미래를 구상하지 않고 살면 시간을 중구난방으로 쓰게 되고 후회의 눈물만 남을 것이다. 글이든 인생이든 키워드를 정하고 그 키워드에 맞게 구성하여 채워나간다면 알찬 결실을 맺는 날이 온다. 앞으로 글쓰기 연습을 다시 시작하고 글 구성에 머리를 굴리려고 한다. ‘묘사’가 뛰어난 작품들을 자세히 읽어 단조로움이라는 약점도 극복할 것이다. 내 인생의 구성에서 글쓰기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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