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의 그림일기
오세영 지음 / 글논그림밭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고등학교 시절, <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라는 책을 친구로부터 선물받은 적이 있었다.(어쩌면 졸업 후에 받았는지도... 가물가물...) 참 재미있는 책이었고, 많은 공부가 되었던 책이었다. 그 책 속에서, 나는 두 편(?)의 만화를 볼 수 있었는데 그 하나가 당시 [한겨레신문]에 연재되던 박재동 화백의 만평이었고, 다른 하나가 바로 오세영의 단편 만화 <투계>(월북작가 안회남의 단편 소설을 만화화)의 한 장면이었다. 돈이 떨어져 술에 굶주린 술꾼 심가가 꿈 속에서 한 주전자 가득 받아온 술을 사발에 따라서 입을 한껏 크게 벌리고 한 잔 걸치려는 찰나.

그 그림이 어찌나 생생하게 그려졌는지 당시에는 술을 마실 줄 모르던 내 입 안에 한가득 침이 고일 지경이었다. 오세영의 만화가 너무나 보고 싶어진 나는 그의 만화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했으나 만화책은 커녕 오세영이란 만화가를 아는 사람조차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아직 pc통신 조차도 대중화 되지 않았던 시절...) 대체 오세영이란 만화가가 존재하기나 하는 것인지... 지구를 홀라당 뒤집어서 탈탈 털어봐도 그의 만화책은 한 권도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1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후에, 나는 [서울문화사]에서 <오세영 한국 단편 문학선>이란 시리즈가 나와있다는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다른 제목일지도 모른다. -_-;)
어찌어찌해서 몇 권을 구해서 보았지만, 어린 시절 보았던 그 장면이 들어간 만화는 찾을 수 없었다.(분명히 그 시리즈의 어느 한 권에는 들어가 있을 만화인데도...) 그리고 다시 몇 년이 흐른 후, 비로소 나는 <부자의 그림일기>라는 오세영의 만화를 구입하게 되었고 그 책에서 10여년 간 보고 싶어했던 만화를 만날 수 있었다.

한국 리얼리즘 만화의 대표자로 알려져 있는 오세영의 만화를 보는 일은 그러나 그리 즐겁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아픈 현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다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만화를 통해,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이나 환상이 이루어지는, 상상 속에서나 이루어질 법한 아름다운 낭만 같은 것들을 만나는 것에만 익숙해지고 길들여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세영의 만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꿈 속, 환상 속이 아닌 현실 속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현실을 아프게, 끔직한 만큼 생생하게 보여준다. 내가 만난 오세영의 만화는 대부분 우리나라 소설가들의 옛 단편들을 만화로 재구성해낸 것들인데, 글로 읽을 때와는 또다른 이미지와 느낌으로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문학적 상상력, 회화적 이미지, 영화적 연출... 힘들고 아프지만 가슴 시리게 아름다운, 오세영의 만화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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