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과 마요네즈
나나난 키리코 지음, 문미영 옮김 / 하이북스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만화를 즐겨보는 사람에게라면 단골 만화방이 있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편리하다. 그 편리함은 대체로 '익숙'하다는 데서 오는 편리함이다. 원하는 만화책이 어디쯤에 진열되어 있는지, 음료수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 콜라 캔 하나에 500원인지 600원인지를 따로 물어볼 필요가 없다는 것은, 특히 다른 사람에게 말붙이기를 꺼려하는 나 같은 종류의 인간에게는 굉장한 편리함인 것이다. 게다가 몸에 익숙해진 단골 만화방의 소파는 너무나 편안하고 따스해서 마치 내 몸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지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골 만화방에서 누릴 수 있는 여러 가지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낯선 만화방을 찾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 바로 단골 만화방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만화책 찾아내기'이다. 가끔 헌책방이나 중고 음반점을 뒤지거나, 집 앞의 비디오 가게를 놔두고 두 번이나 길을 건너야 하는 아파트 단지의 '영화마을'까지 비디오를 빌리러 가는 것과 같은 이유로, 나는 낯선 만화방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 낯선 공간의 진열대에서 보물처럼 숨어 있던 '작품'을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은, 지하철에서 우연히 옛친구를 마주쳤을 때의 즐거움에 견주어도 좋을 만한 것이다. 그렇게 만난 옛친구와 서로에 대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 '작품'이 품고 있던 소중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다.

<호박과 마요네즈(KIRIKO NANANAN, 닉스미디어)>는 바로 그렇게 '발견'한 사랑스러운 작품 중 하나이다. <호박과 마요네즈> 등장인물들의 가장 큰 특징은 별다른 특징이 없다는 점이다. 조그만 양품점의 아르바이트생인 주인공 츠치다. 음악가를 꿈꾸는 백수이며 츠치다에게 '얹혀' 살고 있는 세이. 어쩌면 이 도시에서 마주칠 수 있는 젊은이들 중 절반 정도는 이들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평범한, 그야말로 '만화 주인공답지 않은' 인물들이 스토리를 이끌어나간다.

게다가 그들이 만들어 가는 스토리 또한 어찌나 평범한지 츠치다가 아르바이트로 나간 술집에서 일어난 손님과의 트러블이라든가,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옛사랑을 만난다든가 하는 사소한 일들이 그야말로 커다란 '사건'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오죽하면 작품 말미에 주인공 스스로가 '우리들의 이 흔해빠진 일상은...' 이라고 독백을 다 하겠는가.
그러나 그 '흔해빠진' 일상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나의 이야기, 혹은 내 가까운 친구의 이야기인 것만 같아서 친근하고 아련해진다.

스토리와 인물은 평범하지만 이 정체불명의(아직까지 이 작가에 대해 들어본 바가 전혀 없으므로) 작가 KIRIKO NANANAN의 그림과 연출은 결코 평범하지가 않다. <호박과 마요네즈>의 그림은 마치 '사진'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는 사진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그려놓았다는 뜻이 아니라, '정지'된 느낌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낙엽은 땅을 향해 떨어지고 있지만 그림 속에서 '정지'해 있다. 물론 애니메이션이 아닌 출판 만화인 이상 떨어지는 낙엽의 움직임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작가는 낙엽의 움직임을 나타내줄 수 있는 보조선의 사용마저도 지극히 절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진 같은 느낌을 주는 또 하나의 이유는 우습지만 '사진과 다르기 때문'이다. 사진은 앵글 속의 풍경을 모두 담아내지만(물론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앉아 있는 사람의 뒤통수라든가 그 사람이 기대앉은 의자의 등받이 같은 경우에는 사진에 나타나지 않지만 여기서는 3차원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2차원적으로 생각하기로 하자) kIRIKO NANANAN의 그림은 사진과는 달리 많은 것을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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