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수의 고백은 비극적인 삶을 긍정으로 승화시킨 성자의 독백처럼 다가온다. 특히 어린시절 서희의 연분홍 치마를 바라보며 품었던 애틋한 연정과 부끄러움의 기억은 악인의 집안에서 홀로 피어난 가장 순결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20권의 긴 여정을 마무리 하면서 드는 생각은 드디어 끝을 봤다는 생각에 벅참도 있었지만 약간의 아쉬움도 남았다. 1권부터 서희의 서슬퍼런 복수와 한 그리고 그녀가 겪어낼 생의 결말을 숨죽여 지켜보았기에 결말부가 한 인 간의 내밀한 인생사가 아닌 민족의 광복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닫힌 결말은 다소 허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서희의 삶에서 결코 떼어 놓을 수 없는 길상의 종적이 마지막에 뚜렷이 수습되지 않은 채 오히려 조병수의 오랜 연정이 서희를 향한 시선으로 부각된 지점은 낯설고 의아함을 남겼다. 최참판댁의 거대한 비극 속에서 길상과 서희가 나누었던 그 질긴 인연의 매듭을 작가가 어떻게 묶어낼지 기대했던 독자로서는 아쉬운 대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는 "살아남는다는 것은 남을 죽게 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는 산의 이치처럼 결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생의 무게를 온전히 마주하게 해 주었다. 부모의 멍에를 진 자손들의 죄의식, 정처 없는 남희의 고독, 운명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함까지. 20권에 걸쳐 눌러 담은 그 수많은 삶의 편린들은 필사의 기억과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