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3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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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책을 찾다가 킨케이드의 <루시>를 골랐다. 흑인문학의 절제된 감성과 저조한 텐션을 잘 못 견디는 편인데, 이 책은 워낙 짧아 지루해지기 전에 끝나서 다행이었다. 저자의 자전소설인 <루시>는, 카리브해의 섬에서 자란 소녀가 미국에서 보모로 지내던 시절의 내용이다. 일부러 집을 떠나온 루시는 낯선 사람들과 지내면서 고향의 기억을 하나하나 지워간다. 근데 이 편안한 생활에 적응할수록 제 처지와 계급과 인종을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 그리하여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향해 현실의 속박을 벗어던지기로 한 루시. 거짓된 자유 속에서 자아실현의 욕구와 싸웠던 저자의 생생 목격담에 저절로 숙연해진다.


엄마에 대한 루시의 증오는 줄어들지를 않는다.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엄마의 기억들은 유령처럼 쫓아다닌다. 남동생들만 사랑하고 나를 차별 대우하던 엄마는 주기적으로 편지를 보내온다. 루시는 마음 약해질까 봐 아예 읽지도 않는다. 자신이 돌보는 네 명의 아이와 그 부모의 화목함에도 별별 감정이 다 든다. 저들이 베푸는 친절이 썩 달갑지 않았던 건, 유대관계는 너무 쉽게 무너진다는 걸 엄마한테 배워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의 바람으로 부부는 헤어지고, 애들 엄마는 일을 관두려는 루시를 냉대하기 시작한다. 이 모든 상황에도 침묵했던 루시는 고향이나 미국이나 똑같다면서 더더욱 마음 문을 닫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들들은 애지중지하면서 딸에게는 여자 망신 시키지 않을 정도로만 가르친 루시의 부모. 남자는 원래 제멋대로인 동물이라지만 엄마는 같은 여자면서 왜 나를 그렇게 대했을까. 어째서 엄마는 나를 소유물 따위로 여기는 걸까. 모녀의 연결고리를 끊어내고자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일삼는 루시. 남자들과 잠자리도 즐기고, 소문 나쁜 부류와 어울리며, 마리화나에도 손대는 등 엄마의 교육에 철저히 반항하는 그녀였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쾌락과 취향과 스타일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들은 지배받는 삶에선 결코 얻어낼 수 없단 사실도 깨닫는다. 한 가지 더.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루시를 프레임 씌운다. 그것은 자신이 더 높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행동이었다. 상하관계와 타인의 판단에 구속받지 않기 위해 그녀는 모든 관계에서 몇 발자국 물러나기로 한다. 그렇게 자의식 부수기에 성공한 루시는 마침내 자신이 생각했던 독립에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과 증오의 감정은 동일선상에 있다고 한다. 그 말처럼 엄마에 대한 증오에는 사랑의 감정도 담겨서 루시는 괴로웠다. 결코 평범치 않은 사고와 관점을 갖게 한 엄마의 존재는, 더 넓은 세상과 자유를 갈망하게끔 만들어준 셈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고마워해야 하는 게 맞을까. 온전한 나로 살아간다는 건, 엄마랑 다르단 걸 평생 증명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루시의 진짜 독립은 엄마와의 공존을 받아들였을 때에 완성된다. 그러지 않는다면 아무리 저항해 본들 뒷맛이 개운치 않을 테니까. 아니 뭐 어쩌라고, 그냥 생긴 대로 살라는 말이냐 하실 분들은 네네, 지금처럼 쭉 사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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