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2
정유정 지음 / 비룡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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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 버스회사가 파업을 했다. 하는 수 없이 동네 친구들과 한 시간 넘게 학교를 걸어 다녔다. 이런 곳을 삼 년이나 다닐 생각에 자퇴 욕구가 나날이 들끓었지만, 한 달 두 달 다니다 보니 어느새 장거리도 익숙해져 버렸다. 아마 함께 걷던 친구들이 있어줘서 그냥저냥 버틴 것 같다. 삼십분을 걸을래도 한숨 나오는 지금에 와서 그 시절을 떠올리면 참 무모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근데 살면서 한두 번쯤은 무모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나의 진짜 욕구를 마주할 수가 있고, 그렇게 습득한 경험과 감정은 평생의 자양분이 되어주거든. 다 큰 어른들이 소년만화에 열광하는 현상 또한 그 무모함의 참맛이 그리워서가 아닐까.


오늘의 정유정 작가를 있게 해준 작품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를 읽었다. 스릴러 여제라는 분이 이런 청소년 문학으로 등단했다는 게 참 미스테리지만, 기대만큼 말랑말랑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예상외로 하드코어 한 장면도 많았고, 묵직한 메시지도 여러 번 날리곤 했다. 이로 보건대 정유정의 성향은 원래부터가 하드보일드 쪽인듯하다. 많은 작가 지망생이 딱총 들고 전장에 임할 때, 정유정은 양손에 샷건 들고서 뛰어든 느낌이랄까. 이렇게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우니 아군으로써 마다할 사람이 있겠나. 개인적으로 청소년 문학은 잘 안 읽는다. 흑인문학처럼 청소년 문학도 솔직히 다 비슷비슷하거든. 청소년들의 무대는 너무나 좁고 소재도 매우 한정적이라서 어떤 독창성을 갖추기가 어려운데 그 힘든 걸 이 분은 해냈더라. 이런 경우를 본투비 사기캐라고 하는가 보다. 부럽다요.


환자 된 친구를 대신해 그의 형에게 중요한 물건을 전달해주려는 중학생 김준호. 그 형은 데모하다 전국 경찰에 쫓기는 지명수배자였다. 경기도민 준호는 온천지에 깔린 경찰을 피해서 먼 지방까지 내려가야 한다. 근데 이 비장한 여행길에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끼어든다. 정신병원을 탈출한 할배와, 평소 말도 안 하던 두 친구와 맹견 한 마리까지. 그렇게 졸졸 따라다니며 감놔라 배놔라 하는 프로참견러들을 상대하다 뚜껑 열린 준호는 부탁이고 뭐고 간에 그냥 다 때려치고 싶어졌다. 호구 잡힌 준호의 네버엔딩 개고생 스토리는 그렇게 쭉 이어진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소년만화의 플롯을 따라간다. <반지의 제왕>을 예로 들어볼까. 호빗에겐 반지 파괴라는 목적이 있고, 준호에겐 친구 형을 만나겠다는 목적이 있다. 호빗은 원치 않던 친구들이 따라나서고, 준호도 계획에 없던 사람들과 여행하게 된다. 호빗은 반지를 노리는 적들을 피해 다니고, 준호는 들키지 않기 위해 경찰들을 피해 다닌다. 호빗은 반복된 시련으로 절망에 빠지고, 준호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여러 번 패닉이 찾아온다. 호빗은 친구들의 협조로 반지 파괴에 성공하고, 준호도 팀원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형을 만난다. 흔한 기승전결이지만 그만큼 익숙한 것이어서 몰입하기도 좋고 주제를 강조하기에도 그만이다. 그런데 재밌게도 작가는 소소한 메시지만 던지다가 후반부에 가서야 주제를 드러낸다. 내내 무방비였던 독자의 뒤통수를 갑자기 때리는데, 그제서야 작가가 심어둔 떡밥들이 생각나면서 마치 보물섬을 발견한 기분마저 들더랬다. 이게 정말 청소년 문학입니까? 선 지대로 넘었는뎁쇼.


이 작품의 키워드는 ‘아버지의 부재‘와 ‘해방된 자유‘로 나눌 수 있다. 준호는 존경하던 아빠가 가출한 뒤로 웃음을 잃었다. 친구 승주는 자신을 과잉보호하는 엄마를 막아줄 아빠가 필요했다. 친구 정아는 개장수 아빠의 폭력을 피해 온 동네를 쏘다녀야 했다. 단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단 이유로 먼 길을 떠났나 했더니, 후반에 할배 이야기가 나오면서 사연들이 하나의 주제를 갖춘다. 할배는 버려진 갓난 아를 주워다 친딸처럼 키웠는데, 그 딸이 죽고부터 이상 증세를 보여 유치장에 들어가고 병원에도 보내졌단다. 딸에게는 나뿐인데,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하며 비통해하던 할배는 한 아이의 아버지였고, 세 친구에게는 이런 아버지의 애정이 필요했다. 참된 아버지의 부재로 준호는 아직도 아빠에게 버림받던 날의 악몽을 꾸며, 승주는 엄마의 참견으로 학교에서 기피 대상이 되었으며, 정아는 온몸에 상처를 입고도 엄마를 돌봐야 했다. 숨 막히는 현실을 벗어나려 뛰어든 무모한 여행이었지만 끝에 가서는 각자만의 자유를 찾아낸다. 이들의 자유는 부재중인 아버지한테 있던 게 아니라, 아버지라는 이름에서 해방될 때라야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성장과 독립을 가로막는 게 무엇인가. 작가는 계속해서 질문한다. 무모했던 아이들은 자유를 찾았고, 무모한 도전으로 정유정은 멋진 소설가가 되었다. 이렇듯 무모함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 무모함이 젊고 어린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님을 작가는 증명해 보였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취약해도 되고 무모해도 좋다. 그러니 세상에 너무 겁먹고 기죽고 그러지 말자. 그리고 오늘의 치킨을 내일로 미루지도 말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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