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몰리션 엔젤 모중석 스릴러 클럽 28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박진재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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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권의 하드보일드 범죄소설에는 어느 정도 공식 설정이 있다. 주인공은 범죄 분야에 프로급 실력을 갖춘 지독한 워커홀릭이지만, 과거에 어떤 사고로 트라우마 또는 병마에 시달리는 중이며, 그 후로 인간관계가 틀어져 철저하게 싱글 플레이어로 살아가는 캐릭터여야 한다. 이들이 상대하는 악역은 넘사벽 범죄 스펙을 자랑하는데다 항상 주인공의 트라우마를 컨트롤하는 지능까지 겸비해야 한다. 여기에 비협조적인 아군들과 내부의 적까지 있어 수사는커녕 주인공이 궁지에 몰리는 상황이 생겨야 한다. 이 정도만 열거해도 알려진 범죄소설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걸 알 수 있다. 너도나도 따라 하는 공식에 무슨 개성이 있고 독창성이 있겠나 싶지만, 그런 작품들이 전부 대박 난 걸 보면 성공으로 가는 공식이 맞긴 한갑다. 비록 클리셰 범벅이라 해도 독자들이 좋아죽는다면야. 이번에 읽은 <데몰리션 엔젤>을 보며 그러한 생각이 계속 들더랬다. 좋으면 장땡이지 뭐.


LA 도심 한복판에서 폭탄이 터진다. 폭발물 처리반의 베테랑이 죽었고, 이 사건은 폭파범인 미스터 레드의 짓으로 판명되었다. 여형사 스타키가 사건의 담당을 맡고, 레드를 쫓던 FBI 요원이 스타키와 팀이 된다. 레드는 폭탄 처리반의 베테랑들을 사냥해왔고, 다음 목표는 바로 스타키였으나 그녀는 이 사실을 모른다. 앞전의 사건이 범인의 모방범 짓임을 알아낸 스타키. 아무도 그녀의 말을 안 듣자 결국 단독 행동하다 정직 처분을 받고야 만다. 더 잃을 것도 없어진 스타키는 그동안 외면해왔던 진실의 아픔을 레드와의 교감으로 마주하는데...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원하지만 지나치게 새로운 건 또 싫어한다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선상에서 새로워야지, 그 범위를 벗어난 새로움은 신선하기보다 낯설게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조건으로 볼 때 작가들도 참 고충이 많겠다 싶다. 그럼 적당히 익숙하면서 신선함을 주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대표적으로는 인물들의 출신 또는 직업을 바꾸는 것인데 범죄소설에서는 대부분 형사, 탐정, 변호사, 프로파일러, 군인이 주인공이다. 여기서 하드웨어를 바꾸면 낯설지만 소프트웨어를 바꾸면 신선해진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폭발물 처리반 출신의 형사라는 설정이 그야말로 나이스였다. 물론 그에 따라 악역도 폭파범이 될 수밖에 없겠지만, 내가 알기로는 전문 폭파범이 범인이었던 작품은 없었으므로 이것 또한 적당히 신선한 설정이 된 셈이다.


또 다른 소프트웨어의 변형이라면 죄책감을 동반한 트라우마에 있다. 물론 누군가의 죽음으로 주인공의 심장이 메마른 것도 공식 설정이긴 하다. 아무튼 작가들은 충분히 납득할만한 과거사로 주인공을 열심히 굴려줘야 한다. 주인공이 괴로워할수록 솟아나는 이 페이소스가 인물의 입체감을 더해주거든. 스타키의 트라우마는 동료이자 연인이던 남자가 그녀를 대신해 폭탄을 맞고 죽은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폭발에 휩싸이던 그 느낌, 혼자만 살았다는 죄책감, 몸 곳곳에 박힌 파편 조각. 그날의 기억은 영육 간에 큰 타격을 입혔고, 악몽에 시달리는 현재 술 담배로 겨우 버티는 망가진 삶이 돼버렸다. 여기서 작가는 두 가지 방법으로 주인공의 치유를 시도한다. 먼저는 기본 공식을 따라 타인의 다정함으로 닫혔던 마음을 열려고 했다. 다음은 캐릭터의 정체성을 찾아줌으로써 고통을 극복시켰다. 스타키는 범인의 것과 동일한 폭탄을 몸소 조립하고 해체함으로써 폭탄 주인에 대해 알아가고, 결국 본업에 충실할 때가 자신을 되찾고 회복하는 방도임을 깨닫는다. 두 번째 방법은 설정의 변형이 아니고서야 절대 나올 수 없는 것이온데, 과연 크레이스의 짬밥도 보통 짬밥이 아니올시다.


폭탄이라는 특정 분야에 전문적인 설명들을 보며 굉장히 제프리 디버 스타일과 닮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만약 이 책을 디버가 썼다면 범인의 연속된 폭파 사건으로 독자의 혼을 쏙 빼놓았을 거다. 거기에다 반전도 몇 개 심어 둘 거고. 대중성을 중요시하는 디버는 독자들의 입맛을 충족시켜주는 편이니까. 그런데 크레이스는 인트로의 폭파 사건 말고는 범인의 활약을 제로로 만들었다. 게다가 범인에 대한 프로파일링보다 현장 뒷수습 및 자료조사에 대한 분량이 더 많고, 주인공과 주변인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장면이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다룬다. 사실 이런 건 독자들이 원하는 방향은 아니다. 실제로 이 책은 액션 스릴러임에도 액션이 전무하고 쪼이는 맛도 별로 없긴 하다. 독자가 어떻게 실망할지를 알면서도 크레이스는 대중성보다 작품성을 택했고, 차곡차곡 벽돌을 쌓아 견고한 성벽을 세웠다. 하나 더, 보통 범죄소설에서는 범인 검거가 1차 목표이지만, 최종 목표는 주인공의 트라우마 극복이다. 그게 해결되어야 진짜 끝이므로 작가는 계속해서 수사와 개인사를 같이 가져간다. 이처럼 공식마다 약간의 변형을 넣는 것이 곧 작가만의 개성이라 하겠다. 정말 간만에 고품격 범죄소설을 발견하여 반갑기 그지없다. 아직 미출간된 크레이스의 작품이 많은 줄로 아는데, 출판사들이 좀 더 열일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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