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 속에는 당대의 여러 가지 지식들이 용해되고 투영되어 있다.
당빌의 지도는 한국과 중국의 국경 문제에 대한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다.
그것은 중국 황제가 실측에 참여하여 제작한 지도이기 때문이다. 고지도는 과거의 것을 그린 단순한 지도가 아니라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담고 있는 창고인 셈이다.

우리는 모두 거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보기 위해 그 거울에 비춰본다. 비춰진 그 영상을 보면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린다. 우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거울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람들도 자신의 거울로 우리를 비춰보고 그들 나름의 해석을 내린다. 그 해석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해석과 다를 수 있다. 우리의 해석이 ‘주관적’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의 해석은 ‘객관적’이라고 한다. 사실 다른 사람들도 주관적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객체의 관점이라 객관적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두 가지 관점을 모두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우리를 대외적으로 대표하기 때문이다. 서양 고지도란 바로 다른 사람들의 거울에 나타난 우리의 모습이다.

서양 고지도의 역사는 AD150년 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 전통이 단절되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은 15세기경이다. 그러나 상업적인 고지도가 인쇄되고 판매된 것은 16세기 후반부터이고 초기의 서양 고지도에는 한국의 모습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서양이 한국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서양에서 맨 먼저 한국에 대해 안 사람들은 아랍인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옛 가사와 일부 묘지의 석상 중에도 아랍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알 이드리시라는 지리학자는 1154년에 지은 저서에서 sila가 섬으로서 금이 많이 나는 나라이며, ‘와꾸와꾸’옆에 있다고 소개하였다. 그것이 최초의 한국에 대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의 해석으로는 ‘신라’를 ‘Sila’라고 표기하였고, 아마도 장보고의 청해진에 들렀던 아랍상인이 신라를 섬이라고 한 것이 알 이드리시가 섬이라고 한 것의 발단이 되었다고 추정한다. 또한 ‘와꾸와꾸’ 란 중국인이 ‘왜국’이라는 나라가 있다고 한 것을 발음이 분명치 않아 어린이 언어에서처럼 반복하여 ‘와꾸와꾸’라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4세기, 동방견문록에 카올리(Caoli)로 첫 등장

그 후 1300년경 마르코 폴로가 감옥에서 회고록 형식으로 쓴 <동방견문록>에 ‘카올리(caoli)’라는 지명이 나오는 데 ‘고려’를 중국식으로 발음한 것을 옮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후 두라도가 1568년에 만든 포르투갈 고지도에 ‘comra’라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m’은 착오로 삽입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이 ‘조선’이라는 지명으로 명확하게 표기된 지도는 랑그렌이 1590년에 제작한 <동양지도>에서다. 한국은 좁다란 반도로 그려져 있고, 국명은 ‘corea’, ‘Tiauxeu’, ‘Cory’의 세 가지로 혼용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하다.

16세기 말부터는 베네룩스가 지도 제작의 중심이 된다. 특히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과 벨기에의 항구도시 앤트워프에서 많은 지도가 제작되었다. 그 중에서도 인도에서 여러 해를 보내면서 각종 해도를 수집한 린쇼텐이 암스테르담에 돌아와 1591년 랑그렌과 함께 출판한 <동양수로지>에 한국에 대해서는 부정확하지만 흥미로운 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포르투갈어로 표기되어 있고 인도 철학의 영향을 받아 동쪽을 위쪽에 두고 있는데, 한국은 거의 둥근 섬으로 그려졌고 일본은 한국 아래에 새우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더 특이한 점은 한국이라는 지명 아래에 ‘도적섬’이라는 주석이 붙은 것이다.

그러나 그 호칭은 한국에 맞지 않는다. 외국과 거의 교류가 없던 한국이 누구를 도적질한 경우가 없었고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의 해안지방까지 노략질한 것은 일본인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에 대한 설명에 들어가야 할 표현이 한국에 잘못 적용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다른 지도들은 그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일부 서양 고지도는 16세기 말경까지 한국을 빠트리거나 혹은 섬으로 그렸는데, 그것은 압록강과 두만강에 의하여 만주와 단절된 섬으로 그려진 한국의 천하도나 고지도가 서양에 전해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601년 헤라 라의 <서인도제국지도>에서도 한국은 기다란 섬으로 나타나고 아랍지도의 영향인지 국명을 ‘Cory’라고 표시하고 있다. 그러한 상황은 17세기에 들어오면서 많이 달라진다.

1 우선 마태오 리치의 지도에는 한국이 섬이 아닌 반도로 그려져 있다. 그의 지도가 서양 고지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17세기부터는 중국에 다녀온 선교사들이 동양의 지도를 제작하게 된다. 마르티니 신부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천문과 지리에 정통한 신부로서 마태오 리치의 요청에 의해 중국으로 갔다.

중국은 서양 선교사들에게 두 가지만을 허용하였다. 즉 대포 만드는 법의 전수와 지도 제작이었다. 마르티니도 대포를 만들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중국을 비롯한 극동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귀국 후 지도제작에서 명성을 날리던 요한 블라우와 함께 1655년 <중국지도첩>을 발간하였다. 그의 지도첩은 중국(한국까지 포함)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포함하고 있다.

18세기, 파리에서 발간된 지도에 동해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다

1703년 드 페르가 파리에서 발간한 <아시아 지도>에도 한국이 나타난다. 한국 해안선의 표시가 단순화되어 있다. 그의 지도에는 동양을 잘 모르는 서양인을 위한 지지적 설명이 간단히 첨부되어 있다. 그는 동해에 대한 설명에서, 서양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바다이지만 달달인(만주족)들이 ‘동해’라고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19세기 초, 세계에서 가장 늦게 탐사된 동해의 표기에 관하여 잠시 살펴보자.
이탈리아의 보르도네(Bordone)는 1528년 동해를 Mare Oriental라고 표기하였고 일부 16세기 지도들은 중국해, 한국해, 동양해, 마태오 리치의 1602년 지도는 일본해라고 표기하고 있다. 중국해라는 명칭은 일종의 오류로 17세기부터는 거의 사라졌다. 한국 옆에 있기 때문에 한국해라고 하고 서양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양해라고도 했다.

마태오 리치가 일본해라고 표기한 것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해는 일본 쪽 바다에 부쳐진 이름이고 한국쪽 바다에는 한국에 대한 지지적 설명을 하다보니 여백이 없어서 한국해를 표기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마태오 리치 이전에 동양 지도를 만든 포르투갈 인들의 지도를 보면 한국 쪽에는 한국해, 일본 쪽에는 일본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가 포르투갈 인들이 만든 지도를 참고하여 <곤여만국지도>를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하튼 그의 지도는 서양의 고지도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중국에 다녀온 신부들이 그와 다른 지도들을 만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당빌의 1737년의 <신중국지도첩>은 그 좋은 예라고 하겠다. 당빌은 그 후에 제작된 거의 모든 지도에 영향을 끼쳤다. 그의 <신중국지도첩>은 본래 뒤알드 신부의 4권으로 된 <중국백과 전서>의 부록으로 발간되었다. 그 자료는 중국 강희제의 명에 의하여 레지스 등의 신부들이 실측을 토대로 만든 지도의 원판을 받아서 당대에 이름 있는 지도제작자 당빌이 중국어를 프랑스어로 바꾸어 지도화한 것이다. 그의 지도첩에는 <한국전도>가 들어 있는데 그 지도는 전적으로 실측한 지도가 아니라 궁중에서 보관하던 극비의 지도를 선교사들이 입수한 후 일부 거리를 실측한 후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프랑스에 보낸 것이다.

그의 지도첩은 지도의 역사에서 가장 가치 있는 업적으로 평가받는데 그의 지도에는 산맥과 강들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동해에는 아무런 표기가 없다. 마태오 리치가 부친 일본해라는 명칭은 부적당하고 그렇다고 한국해라고 하기에도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그의 영향을 받은 다른 지도들은 대부분 한국해 또는 동해로 표기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18세기는 지식산업이 꽃핀 시대로 지도 제작도 가장 활기를 띤 시대이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해·동해’로 표기된 지도와 ‘일본해 또는 일본 북해’라고 표기된 지도는 어떤 도서관 지도에서는 3:1, 다른 도서관지도에서는 6:1 정도로 한국해·동해로 표기된 지도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 사실을 일본 학자들도 사석에서는 인정하고 있다.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글을 써나가는 서양 문화에서는 왼쪽에 있는 주어 혹은 목적어의 성수와 일치해야 한다. 따라서 지도에서도 보통 왼쪽에 있는 나라의 이름이 오른쪽 바다에 표기된다. 그리하여 북에서 이름을 남긴다.

그에 비하여 일본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구부러진 섬나라이고 그 이름이 바다에 붙여진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더욱이 일본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태평양 쪽 바다를 일본해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해가 뜨는 바다이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합당하다. 그에 비해 동해는 ‘해가 지는 바다’이기 때문에 이름을 붙이자면 ‘일몰해’라고 하는 것이 맞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동해를 최초로 탐사한 라페루즈가 귀국 후에 작성한 1797년의 <항해도첩>에 동해를 일본해라고 명명한 후 상황은 달라진다. 동해를 일본해라고 표기하는 지도들이 많아졌고, 그렇게 되면서 일본은 슬그머니 자기의 주장을 바꾸고 동해를 ‘일본해’라고 쓰게 되었다. 또한 일부 국수주의자들은 동해를 자기들의 ‘안방’정도로 착각하게 되었다.

 

동해 한가운데 있는 독도에 대해서도 일본의 고지도 <삼국통람도설>에 한국의 섬이라고 명기되어 있고,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클라프로트가 쓴 <삼국 총도>에도 한국의 섬이라는 설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그 섬이 자기 것이라고 억지를 쓰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고지도 속에는 당대의 여러 가지 지식들이 용해되고 투영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당빌의 지도는 한국과 중국의 국경 문제에 대한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다. 그것은 중국 황제가 실측에 참여하여 제작한 지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지도는 과거의 것을 그린 단순한 지도가 아니라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담고 있는 창고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20세기에 들어와 미국 선교사들은 영어의 (K)가 ‘K’로 표기되기 때문에 ‘Corea’를 ‘Korea’로 쓰기로 한 것이 우리의 영문 국호가 되었는데 K를 C로 복원해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 논의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동해를 일본해와 함께 병기해야 하는 타당성,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하는 정당성, 나아가서는 만주 남쪽의 우리 영토를 찾아야 하는 문제 등은 서양의 고지도가 우리에게 남겨준 중요한 숙제이고, 그러한 숙제를 담고 있는 서양 고지도가 역사교육에 활용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글·그림_서정철(한국외국어 대학교 명예교수)

 
 
 
출처 - ANTIQU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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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5-04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대낮에 왠일이시래요^^

데메트리오스 2005-05-04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치보면서 알라딘에 접속했어요 ㅋㅋ

물만두 2005-05-04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