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혀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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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에 놓인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의 생명이야. 칼은 그들의 생명을 끊는 도구가 아니라 그들을 굴복시키는 도구야. 칼을 다룰 때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재료들은 접시에 오르는 순간까지 말썽을 부리잖아. 칼은 등을 보여서도 안 돼. 칼날로 재료를 지그시 눌러가면서 놈들의 눈을 제압해. 숨통을 단박에 끊어 놓을 듯 위협하면서 동시에 재료 고유의 빛깔과 싱싱함이 다치지 않도록 배려해.(98p)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그만큼 글의 중요성을 나타낸, 글의 힘을 보여주는 문장이라면 이 책을 통해서는 아마도 혀의 힘, 말이 아닌 맛의 힘을 느낄수가 있을 것이다. [전쟁터의 요리사들]에서 익히 보지 않았는가. 전쟁이 나도 전쟁에 참여하는 군대의 대원들도 먹어야 산다는 것을. 먹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만큼 음식은 인간에게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기체들에게 중요하다.

중국과 일본과 한국.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의 이야기. 당연히 한국은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간헐적으로 모여서 독립운동을 하는 처지. 중국 또한 일본의 지배아래서 일본군인들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시기였다. 장소는 만주. 본국에서 어떤 지시를 내려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곳이다. 이 곳에서 모인 한.중.일 삼자대면을 어떤 모습을 띄고 있을까.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사령군 모리. 그는 잡혀온 중국인 요리사에게 단 1분의 시간을 주며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요리를 만들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죽은 목숨인것. 그는 무슨 수로 단 1분안에 사람의 혀를 만족시킬만한 요리를 만들어 낼까. 15분내로 요리를 만들어서 냉장고 주인을 즐겁게 해주는 요리 프로그램이 있다. 그시간도 짧다고 하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금새 흘러가는 1분동안 첸은 어떤 요리를 만들어낼까.

모리와 첸 사이에 낀인 조선여자 길순. 그녀는 첸의 집에서 살았지만 나중에는 모리의 여자가 된다. 그녀가 맡은 임무란 어떤 것일까. 진정으로 그녀가 원하는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독립운동을 하는 오빠의 허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그가 시키는 대로 하는 길순은 모리와 첸 사이에서 또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첸이 만들어 내는 음식들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음식들이 많다. 주위에서 접해보지 못했던 그런 음식들이기에 더욱 궁금해지게 된다.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먹어왔던 음식들이라면 그 맛을 짐작할 수가 있다. 하지만 여기는 그런 음식들보다도 더욱 궁금증을 자아내는 음식들이 존재한다. 첸이 만든 음식. 그리고 그 음식에 만족했던 모리. 아니 그는 만족한 것일까 아니면 진정으로 만족하는 척만 했던 것일까.

첸이 가까스로 살아남은 후 그가 요구했던 것은 단 하나. 도마였다. 그의 아버지가 썼던 도마. 그의 집에 있었던 도마. 그는 그 도마를 원했다. 요리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칼인줄 알았더니 도마 또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요리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더욱 공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 칼과 도마. 그리고 재료들로 첸은 또 어떤 음식을 만들어 낼까.

 

그가 만들었던 문어죽이 먹고싶다. 감기 걸려 목이 아프고 머리가 징하게 울리는 지금 그가 만든 진한 문어죽 한그릇이라면 잃어버린 입맛까지도 살려줄 수 있지 않을까.

밥알 사이로 드문드문 붉은빛이 도는 문어 조각들과 부추로 보이는 야채, 당근 조각 등이 뒤섞여 있었어. 물과 재료들이 적당히 혼합된 가운데 그릇 중앙에 살짝 뿌려놓은 김 가루까지, 시각적으로는 완벽한 문어죽이었어.(1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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