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시 - 한시 학자 6인이 선정한 내 마음에 닿는 한시
장유승 외 지음 / 샘터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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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시. 그냥 아무 생각없이 읽다 보면 하루에 하나의 시를 읽으라는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틀린 표현은 아니다. 단지 그 시가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詩가 아니라 漢詩일뿐이다. 한시도 시의 범위에 들어가니 당연히 하루에 하나의 시라는 개념 설명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사실 시라는 장르는 생각보다 굉장히 마니아적인 장르다.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에세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 놓은 글이 많아서 편안히 읽히고 공감도 많이 할 수 있으며 소설 같은 경우는 몇 장르를 제외하면 그런대로 쉽게 재미나게 읽히는 장르다.
 
하지만 시라는 장르는 장르의 특성상 축약도 많고 은유적인 표현도 많다. 그러므로 인해서 이해하기 어렵거나 해석이 필요한 경우가 많아진다. 한때는 시를 소설처럼 풀어서 길게 쓴 시도 유행을 했었는데 요즘의 시의 트렌드는 정확히 어떤지는 모르겠다. 전에 영시를 읽어본 적도 있긴 한데 한국말로 된 시도 어려우니 영어로 쓴 시도 당연히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골랐던 시들이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시들이어서 오히려 읽히는대로 그대로 이해할 수 있어서 더 쉽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한시는 어떨까. 일단은 기본적으로 한자로 쓰여있다. 그럼 중국시인가 할텐데 여기서 우리 역사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가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한자를 썼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더군다나 예전 조상들중 양반들은 한자어를 익히고 쓰는 것이 자신들의 특권인양 여기기도 했었다. 한자어가 워낙 많고 까다로우니 아무나 배울 수 없었고 배우기도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예시이기도 하다. 양반이 아닌 사람들은 한자어를 쓸줄 몰랐으니 말은 하되 읽거나 쓸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 당시 사람들이 했던 말도 궁금하긴 한다.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은 글씨를 쓰는 시스템이지 말하는 시스템은 아니었는데 그렇다면 그 당시 사람들이 말하던 것도 한자어가 아닌 한국말이기는 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유추해 보면 말은 한글, 글자는 한자 이렇게 나누어져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여기에 적힌 한시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면서 학자가 많은 편이다. 추사 김정희나 다산 정약용, 퇴계 이 황같이 우리가 이름만 대면 쉽게 알수 있는 사람들이 지은 시도 있고 장유, 이달 처럼 이름을 불러줘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만한 사람들의 시도 있다.
 
지은이나 추천한 사람별로 시를 묶은 것이 아니라 하루라는 시간을 기준으로 해서 각 시간에 맞는 시들을 편집해 두고 있어서 다양한 시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잇다. 시, 더군다나 한시가 거기서 거기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수도 잇겠지만 읽다보면 어떤 한자어를 썼는지 또는 어떤 배열로 해서 본문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지가 작가마다 다 다르다. 원래 한시는 네구절 또는 여덟구절이지만 본문에서는 편의상 두구절이나 네구절만 골라 뽑고 있다. 길지 않다. 짧은 호흡으로 한 문장씩 끊어 읽기 좋다. 한자어를 몰라도 좋다. 한글로 다시 풀어 놓은 글을 읽노라면 무슨 뜻인지 알수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모르는 한자어가 많아서 소리내어 읽을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해석이 있었어도 시라는 것은 읽는 맛도 있는 법인데 한자어 밑에 소리나는대로 음을 적어 두었다면 훨씬 더 좋지 않았을까. 어려운 한자어도 있고 잘쓰지 않는 한자어들도 있어서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모르고 그냥 위에 설명되어 있는 뜻만 파악하고 지나간 시들이 많아서 아쉬웠다. 하나하나 찾기도 만만치 않은 일이라 찾기도 어렵다.
 
한 편의 한시를 두고 추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어두는 구성이다. 개인적으로는 '내 새끼들을 위하여' 라는 제목이 붙은 한시가 뭉클했다. 한자어로도 이런 마음을 표현할수가 있구나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냥 한자어 하나하나를 두었을뿐 인데 이런 문장으로 이루러지다니. 한자어도 나름 조사가 있고 동사가 있고 명사가 있을테지만 그냥 단어 하나씩으로만 알아온 나에게는 신기한 일로만 여겨졌다. 아마도 중국어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좀더 익숙하게 여겨졌을지도 모르겠다.
 
네개의 구절로 이루어진 구절을 해석하면 이렇게 된다.
 
농가의 젊은 아낙 먹을 것 떨어지니
빗속에 보리 베어 풀섶 사이 돌아오네
생나무 습기 먹어 연기조차 일지 않고 들어서자
아이들은 옷길 끌며 우는구나.
 
어려웠던 당시의 상황의 절절함을 나타내준다. 박동욱박사는 이 시를 설명하며 식당에 들어온 엄마와 아이들이 자장면을 한그릇만 시키는 장면으로 예를 들어주고 있다. 갑자기 [우동한그릇]이라는 책이 떠오르는 시점이다. 어느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엄마는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서 먹여 살리기 위해서 애쓰고 있었구나라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새삼 다시 한번 뭉클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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