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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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때까지 알고 있던 시인 정호승의 모습은 지극히 단편적인 모습이었다. 그의 시집을 들고 읽었어도 제목이 주는 그 느낌에 의지해서 전체적으로 비슷한 느낌만 받아왔고 다른 시들과 같이 편집된 작품에서는 오로지 그 시의 느낌만 몰입했다. 이 시선집은 다르다. 그야말로 총천연색의 모습을 보여준다. 서정적인 면을 보여주는가 싶으면 사회적인 단면을 거침없이 드러내서 보여주면서 잔잔한가 하면 날카롭다. 야누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시라는 것이 이렇게 다양했던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양한 느낌으로 보인다. 프리즘에 투영된 색색의 무지개를 보는 느낌이다. 분명 아무것도 색이 보이지 않는 가시광선을 비췄는데 찬란하게 나오는 색들처럼 그저 단순하게 하얀색의 표지가 책장을 넘기는 순간 다채로운 색으로 다가온다.

 

순아 오늘도 에미는 네가 보고 싶어

아픈 몸을 이끌고 역에 나갔다

와닿는 열차의 어느 칸에서고 네가

금방이라도 웃으면서 내릴 것 같아

차마 발길을 못 돌리고 에미는 또 울었다

(중략)

썰렁한 네 자취방 윗목에는

아직도 빈 라면 봉지가 나뒹구는데

순아 하늘에는 겨울에 무슨 꽃이 피더냐

이 겨울 하늘에도 눈물꽃이 피더냐

 

53쪽의 <마지막 편지>는 사람의 마음을 울컥거린다. 단 두쪽의  짧은 싯구 속에는 소설보다도 더 장황한 이야기가 숨어있다. 엄마는 순이를 데리러 가지만 순이는 오지 않는다. 아니 올수가 없다. 순이는 가스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엄마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엄마는 아이를 그리워하면서 또다시 역으로 나간다.

 

아이가 떠난 그 방안에는 아껴서 살겠다고 먹었던 라면봉지만이 뒹군다. 울컥하는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그렇게 떠났으면 잘 살아야지. 왜 가스는 마시고 그랬냐. 뭐 순이라고 자기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냐마는 기필코 기어서라도 나오지 못하고 연기에 허무하게 스러져버려 연기가 되어버린 그 영혼이 아깝다. 엄마의 절절한 심정이 너무나도 잘 드러나 있다.

 

이튿날 아침. 혀가 다 닳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엄마의 마음은 201쪽의 <혀>라는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단지 주인공이 사람에서 개로 바뀌었을 뿐이다. 새끼가 죽은 것을 모르고 계속 핥아주던 혀. 그 혀가 닳아버린 정도로 핥아준 어미의 사랑이 단박에 드러나는 구절이다. 작가의 부모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도 제외할 수 없다. 257쪽 <못>이라는 작품에서는 아버지를 구부러진 못에 비유한다. 못도 처음에는 반듯했고 꼿꼿했고 날카로왔다. 수없이 박히면서 구부러졌고 시인은 그런 구부러진 못에 아버지를 비유하고 있다. '구부러진 못이다 아버지도'라는 구절을 보면서 누구라도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라게 되지 않을까. 

 

당신 떠난 지 언제인데

아직 신발 정리를 못했구나

 

나는 오늘도 그대를 잊은 적 없다

 봄이 가도 그대를 잊은 적 없고

별이 져도 그대를 잊은 적 없다

 

부모의 사랑이 느껴지는 시들이 있는가 하면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도 많이 보인다. 322쪽 <신발정리>와 365쪽의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라는 작품에서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남은 사람들은 망자의 유품들을 정리한다. 신발이나 옷들을 태우고 버리고 정리를 한다. 누군가를 잃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경험이 있을 것이다. 시구 속에서는 아직도 신발 정리는 하지 못했다는 표현으로 그리움을 드러낸다.

 

나는 동생이 떠난 후 그 아이의 신발을 오래도록 신었다. 신발이 자기를 부르는 것 같다면서 이 신발을 꼭 사야한다고 주장했던 그 신발이었다. 그 신발을 나는 누군가에게 주거나 태워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구장창 신었다. 태백산에도 그 신발을 신고 올랐다. 산을 내려 오니 신발 바닥이 닳아서 나달나달해졌었다. 그제서야 그 신발을 버렸다. 시인도 그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누군가를 그리워 하는 마음은 시간이 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도 계속 생각난다. 그것이 부모일수도 형제일수도 사랑하는 사람일수도 있겠지만.

 

시의 다채로움은 종교적인 면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예수와 주님에 관한 기독교적 사상을 그리는가 하면 불교적인 색채들이 가득한 작품도 있다. 그냥 본다면 시인의 종교는 무엇일까 궁금해지는 그런 대목이다. 무엇이면 어떠한가. 시인에게는 모든 것이 다 시로 표현되는 하나의 소재일 텐데 말이다. 그런 고정관념에서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던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명한 구절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시의 제목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리운 부석사>이다. 부석사뿐 아니라 낙산사가 제목에 들어간 시도 있다. 301쪽의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라는 시에서는 독특한 비유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비틀비틀 푸른 수평선 위로 걸어가던 나를 슬그머니 담배꽁초처럼 버리고 온 뒤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을 담배에 비유하다니 시인은 담배를 피우기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인가 아니면 떨어진 꽁초들을 보고 한 생각인가 궁금해진다. 같은 소재를 보더라도 이런 식으로 표현할 사람 뉘 있겠는가.

 

하늘과 별과 바람과 땅의 사랑과 자유를 노래하고

말할 때와 침묵할 때와

그 침묵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그런가 하면 정호승 시인이 흠모하는 시인이 윤동주라는 것을 아주 잘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들도 보인다. 115쪽의 <작은 기도>가 바로 그렇다. 구절을 읽다보면 어디선가 이런 느낌을 주는 시를 읽은 적이 있는데 하는 묘한 데자뷔를 느끼게 된다. 바로 윤동주의 시다. 이런 식으로 그의 시의 느낌을 가져다 표현하다니 얼마만큼 애정해야 이렇게 표현이 되는 것인가 하고 다시 한번 이 구절을 가만가만 되뇌게 된다.  윤동주의 시를 찾아서 비교해보게 된다.

 

최루탄을 쏘자 낙엽들은 흩어졌다(중략)

최루탄을 쏘자

산새들은 또다시 피를 흘렸다

 

아무도 모른다

장례식장 미화원 손씨 아주머니가

아침마다 꽃을 주워 먹고 산다는 것을

 

97쪽의 <산새와 낙엽>과  218쪽의 <장례식장 미화원 손씨 아주머니의 아침>이라는 이 두 시에서는 사회적인 면이 드러남을 보게 된다. 최루탄이라는 단어에서 나는 80년대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그때를 떠올린다.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그때, 나는 멋도 모르고 최루탄이 매워서 눈물콧물을 흘리고 다녔지만 그들은 목숨을 걸었다. 이땅의 자유를 위해서. 시인은 그들을 작은 산새를 표현한다. 낙엽으로 표현한다. 서정적이나 사회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더없이 날카롭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런가 하면 환경미화원의 모습을 그린 작품도 돋보인다. 손씨 아주머니가 꽃을 먹고 산다니. 장례식장의 조화를 보고 이런 작품을 생각한 것일까. 시인이 이 작품을 무엇을 보고 쓴 것인지가 참으로 궁금해지는 그런 시점이다.  260쪽 <군고구마 굽는 청년>에서 시인은 청년이 기다림을 굽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기다림 그것은 곧 희망을 말하는것이 아닐까. 우리나라의 미래를 차지할 청년들이 기다림 후에 보여줄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 아닐까. 시인은 이렇게 자신의 시들을 통해서 사회성을 드러내고 있다.

 

서정성과 아름다움 사회성과 감동 그리고 날카로움이 벼려있는가 하면 종교적인 색채가 주는 느낌까지 모두를 어우르고 있는 정호승 시선집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을 담고 있지만 이 책은 내가 사랑하는 책이 된다. 아니 그냥 책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시선집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그리고 내가 사랑할, 영원히 내 마음속에 사랑으로 남아있을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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