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장면 소설, 향
김엄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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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단순히 기억이 아니고.

기억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기억은 모든 것이다.

모든,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R은 생각했다. (75p)


작가정신에서 내고 있는 소설, 향 시리즈. '소설의 본향, 소설의 영향, 소설의 방향'이 그 슬로건이다. 슬로건의 의미들도 좋지만 내가 이 시리즈를 접할 때면 항상 그 책, 본래 가지고 있는 특유의 향이 나는 듯하다. 김이설 작가의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을 읽을 때도 그랬다. 그 책에서는 은은한 나무향 그리고 흑연향이 났다. 그냥 간단히 말하면 연필 냄새다. 사각사각거리는 효과음과 함께 느껴지는 나무향.


발목이 시리고, 누워 있는 바닥이 얼음처럼 차갑다고 느낀다. (20p)


이번 책은 그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의 정거장과 필사의 밤이 따스하고 정겨운 느낌이었다면 이 책은 낯설고 생경하고 차갑고 날카롭게 벼린 얼음의 칼날처럼 느껴진다. 그 냄새를 알까. 저수지가 꽁꽁 얼어붙었는데 느껴지는 얼음의 비릿함. 그런 향과 함께 꽝꽝 얼어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그런 느낌이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책을 들고 있는 손이 시렵다.


나는 쉬고 싶을 때 행갈이를 한다.

이건 내 글쓰기에 대한 비밀 아닌 비밀이지만. (153p)


유난히 행갈이가 많은 책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야기가 죽죽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문장을 쓰고 행이 바뀌귀어서 새로운 행이 시작되고 다음 줄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더 읽기 편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너무 많은 행갈이를 해 놓은 책을 읽다보면 더 피로해짐을 느낀다. 읽는다는 작업도 리듬을 타는 것인데 죽죽 읽어줘야 매끄럽게 나가는 그 줄이 자꾸 끊겨버린다고 생각해보라. 누구라도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이유가 궁금했다. 겨울장면이 끝난 후 실려있는 에세이에서 그 이유를 알았다. 쉬고 싶을 때 행갈이를 한다는 작가. 작가는 이 책을 쓸 때 많이 쉬고 싶음을 느꼈을까. 아마도 겨울의 차가움에 눌려서 그런 쉼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R은 뻑뻑한 혀를 입천장에 비벼 녹인다.

쓰고 진득한 맛이 난다. (144p)

이 글의 주인공은 단 한명이다. R이라 지칭되는 한 남자다. 아내가 있으니 남자라 보아도 되겠지. 그는 기억을 잃은 것일까. 어디서 자신이 다쳤는지 기억을 하지 못한다. 아니다. 기억을 잃었다면 아내가 아내인 줄도 몰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는 아내를 기억한다. 집도 기억하기에 아내를 만났던 것이겠지. 기억을 잃은 듯이 보이나 잃은 것 같지 않은 모호함. 그 모호함이 처음부터 끝까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사람들이 호수 둘레에 서서 하는 마지막 결심.

그건 결심이 아니다.

어떤 마음도 아니다.

다 지나간 후, 이미 끝난 것이다.

끝난 것을 끝내려는 것이다.

소리가 남고, 가라앉는 것은 물 뿐이다. (131p)


책장을 덮는다. 차가왔던 손이 여전히 시리다. 다섯편씩 묶인 이야기는 #30에서 끝이 난다. 겨울은 끝이 났을까. 겨울장면은 이제 바뀌었을까. 얼음이 얼고 눈이 쌓이고 칼바람이 불던 겨울장면의 그것들은 이제 없다. 오늘따라 햇살이 화창하고 따스하게 내리쬔다. 겨울장면이 끝났나보다. 다음 겨울장면을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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