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박완서 작가 10주기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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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216 p)


은근하게 불을 지펴 기름기를 걷어내며 진하게 끓여낸 사골곰탕같은 맛. 숟가락을 들기보다는 그릇을 들어 한모금을 넘기면 그 뜨거움이 식도를 거쳐서 위장으로 내려가며 온몸을 따스하게 감싸주는 맛. 그것이 바로 박완서의 작품을 읽는 맛이다. 시골집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뜨끈하게 불을 지펴놓고 그 위에 이불을 덮고 따땃하게 누우면 세상 천지에 부러울 것 하나 없는 그런 맛. 그것이 바로 박완서의 작품을 읽는 맛인게다. 따뜻함. 그 느낌이 고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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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 10주기 베스트 에세이 결정판이라는 띠지. 이 책은 작가의 산문 660여 편 중에서 가장 글맛 나는 대표작 35편을 추렸다. 워낙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었었기에 [노란집]이나 [호미], [잃어버린 여행가방] 등에서 이미 읽었던 작품들도 있지만 진부하다라는 느낌보다는 왜 그런거 있지 않은가. 친구들끼리나 친척들끼리 이야기 하면서 내가 전에 이랬는데 말야 하면서 말했는데 그 이야기가 들어본 이야기였다는 거 그런 느낌인거다.


작가의 젊은 시절을 담은 이야기부터 노년의 삶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이야기가 나오므로 그 사회적 변천사나 개인적인 변화과정을 읽는 것도 즐거움 일이다. 기차를 돌아다니면서 100원에 빗이 다섯개에 칫솔을 세개나 껴주겠다는 사람(42p)이라니. 그러고보니 내가 어렸을 때 기차를 타면 돌아다니면서 간식차가 왔었는데 그걸 사먹는 재미도 있었는데. 엄마는 커피를 사드시고 나는 늘 전기구이 오징어를 사달라 졸랐었는데. 참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게 된다.

너무 가난하지도 너무 부자도 아니고 부모생존애 바람직한 예절을 가진 대학나오고 건강하고 인색하지 않은(55p). 좋은 사위를 바라는 엄마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작가는 딸을 시집 보낼 나이가 되자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가진다. 자신의 기준은 그냥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면 좋겠다는 것이지만 세상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다 안다. 그 평범함이 가장 어려운 조건이라는 것을 말이다. 엄마가 잘 뒀다는 말을 하면 절망적인 얼굴로 쳐다보는 아이들(112p). 젊은 시절의 엄마는 뭐든지 다 잘하는 만능이다. 그런 엄마가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어설퍼진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작가의 자녀들에게 매우 공감을 했다. 나 또한 똑같은 경우를 당하고 있으므로 말이다. 엄마가 잘 뒀어라고 하면 그것은 반드시 어딘가 꽁꽁 감춰두어서 찾기가 힘들다는 소리다. 제발 그냥 아무데나 두라고. 내가 항상 하는 말이다.


소설이 아닌 산문을 읽으면서 가장 재미난 건 보통 때 잘 쓰지 않은 일명 오타처럼 쓰인 우리말을 새로 알게 되는 것이다.

궁금한 것 천지인데 달아볼 방법이 없었고 (121p) /키가 우쩍 자랐을 (177p)

궁금한 것 천지인데 물어볼 방법이 없었고. 키가 부쩍 자랐을. 이렇게 고치고 싶었다. 읽으면서 이게 오타인가 생각했던 부분이다. 즉시 찾아본다. 오타가 아니었다. 달아보다라는 말에는 사람이 이모저모를 따져보거나 비교하여 재어보다라는 말이 있었고 우쩍이라는 단어는 갑자기 늘거나 줄어드는 모양이라는 뜻이 있었다. 즉 두 표현이 다 맞는 것이다. 우쩍. 새로운 단어를 기억해 본다. 산문이라는 장르가 자신의 신변잡기를 쓰는 것이기에 그냥 평소의 생각을 쓰면 된다고 하지만 단어 하나에까지 신경을  써야 될 정도로 섬세한 장르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려주는 단어라 할 수 있겠다.


뜨끈하게 불을 지핀 방안에서 뜨끈한 사골곰탕을 먹는 맛. 나는 작가의 진수를 제대로 맛 보았다. 포만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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