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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소녀의 거짓말 - 구드 학교 살인 사건
J.T. 엘리슨 지음, 민지현 옮김 / 위북 / 2020년 8월
평점 :
평화를 찾고 싶다. 망각에 묻혀 조용히 살고 싶다. 그러나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301p)
어린 시절 좋아했던 작품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아마 [소공녀]라고 대답할 것이다. 계몽사에서 나왔던 소년소녀전집에서 가장 좋아했던 작품이었으니까 여러번 읽어서 그 책만 낡았으니까. 왜 좋아하냐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소공녀가 가여웠다고 안타까웠다고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부자였던 그녀가 다락방에 살게 된 그 곳이 명문 여자 기숙학교라는 배경이 더 한몫했을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는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그런 배경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런던이라는 낯선 나라도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또래의 여자아이들만 모인, 부모님도 없이 자신들끼리만 사는 그런 기숙학교라니 낯선 분위기이면서도 그들끼리만 알고 있는 그런 공감대가 생겨나고 비밀스러운 느낌을 주는 공간이지 않은가. 그러면서 나도 그런 곳에서 학교를 다녀보았으면 좋겠다는 하는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다.
여기 미국에 그런 기숙학교가 있다. 아무나 들어갈 수도 없는 곳. 내가 원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나를 선택해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곳이다. 구드학교. 여기 영국에서 온 한 소녀가 들어온다. 신입생도 아닌 2학년에 입학한 그녀는 여자 기숙학교라는 것도 낯설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이 살아온 동네가 아니고 익숙한 나라가 아니다보니 더욱 생경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래도 여기서 버텨야 한다.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다. 그것도 자신이 그 모습을 보았다. 하나뿐인 동생은 오래전에 죽었다. 그러니 그녀가 돌아갈 모국이라는 곳은 없는 셈이다. 그녀가 대학에 들어가고 공부를 한 후 유산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가고 그래야만 살 수 있는 길이 생기는 것이다.
그 또래의 여자아이들이라면 그렇듯이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또래집단이 있다. 선생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한다. 기숙학교라 룸메이트도 중요한데 상급생과의 관계도 신경을 써야한다. 이곳에 들어온 그녀, 애쉬는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까.
그녀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벌어지는 사건들은 당연히 그녀에게로 초점을 모으는 계기가 된다. 작가는 그런 심리를 적극 활용하여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는 힘을 약화시켰다. 그러니 오직 한 곳 그녀만 바라보고 힘껏 달려갈뿐이다. 그 모든 것이 흔들리는 것은 한 순간이다. 달리기를 잘하던 선수가 한 순간 발이 꼬여 찰나의 순간에 넘어지듯이 잘 달려가던 이야기는 어느 순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바로 딱 그 시점에 무너지기 시작한다.
내가 세운 가설이 모두 무너지는 그 시간이다. 거기서부터 다리는 꼬인다. 이야기도 꼬인다. 이건가 싶으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치밀하게 짜여진 결과다. 작가는 그 모든 것을 미리 배치해두었다. 그것을 일찍 알아낸다면 분명 당신은 다리가 꼬이지 않고 꿋꿋하게 골인지점으로 뛰어갈 수 있을 것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이다. 과연 가능할까.
애쉬. 분명 그녀의 이름이다. 본문에서 누군가는 애슐리의 줄임말이 아니냐고도 묻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자신의 이름은 애쉬라고 이야기한다. ash. 영어단어로 애쉬라고 읽는다. '재'라는 뜻이다. 그녀의 이름은 분명 이 스펠링이 아닐 것이다. 그럴지라도 나는 왜 자꾸만 그녀가 모든 것이 다 타버리고 흩날리는 보잘 것 없는 존재인 '재'처럼 느껴지는가. 그녀는 소공녀 세라일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