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봄 - 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8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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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얼굴을 가리고 자신의 부정한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할 때 사람이 쓰는 가면이다. (86p)

 

시인 이상화는 그랬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고 말이다. 긴긴 어둠의 차갑고 날 서린 겨울이 끝이 난 그들에게 이제 세상의 봄은 올 것이고 그들의 마음에도 봄은 찾아올 것이다. 차갑고 우울해서 잔뜩 웅크린 몸과 마음을 녹여주고 보듬어 줄 그런 봄 말이다. 우리에게도 봄은 오겠지. 긴긴 칩거의 시간이 끝난 후에 말이다.

 

하나의 사건을 파헤쳐 내려가다 보면 알지 못했던 그 오래 전의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다. 누군가는 보고도 못 본 척 했던, 누군가는 알지 못해서 못 본 척했던, 누군가는 당하고도 못본 척 했어야만 했던 그 사건들이 자꾸자꾸 드러난다. 마치 덩굴식물을 수확하듯이 하나를 캐면 그 옆에 또 다른 감자가 그리고 그 옆에 또다른 감자가 자꾸 연결되어 있듯이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원뿌리를 찾아야 한다. 모든 사건을 유발하게 된 동기가 되는 단 하나의 사건. 그 사건을 찾는다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여기 나오는 모두가 그 사건을 찾으려 이동한다.

 

6대 번주이자 지금은 신변상의 이유로 물러난 시게오키는 왜 그리 자신을 숨기고 다른 인격으로 변화하게 되었는지, 그의 옆에 있던 전 수석요인은 왜 그런 인생을 살았어야만 했는지, 그 당시에 사라졌던 아이들은 어디서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 모든 것이 하나씩 차례로 풀려나가기 시작한다. 아주 얇은 실이 한번 꼬여 버리면 절대 풀리지 않는다. 가위로 자르지 않는 이상은 점점 더 엉키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아주 두꺼운 실은 한몇 꼬여도 풀기가 아주 쉽다. 가위가 필요없이 손으로 몇번 매듭만 잘 찾아서 풀어주면 그 다음부터는 술술술 잘 풀려나간다.

 

이 이야기는 그런 두꺼운 실과 같다. 처음부터 아주 단단하게 꼬여서 묶여 있던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중정도의 난이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한번 풀리기 시작한 이야기는 정신없이 풀려버린다. 오히려 반대편에서 실을 감는 사람이 그 속도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그 끝을 붙들고 찬찬히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어느틈엔가 휙 풀려버린 이야기의 끝을 잡고 잠시 멍한 상태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386p)

 

우리 모두는 단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정말 화가 났을 때는 내가 아닌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사랑을 할 때는 나도 알지 못하는 내 모습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단, 그 모든 것은 '나'라는 인격의 통제하에 놓여있다. 그런 인간의 상태를 이해한다면 이 이야기속의 인물에게도 충분히 공감하며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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