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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내가 죽은 집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9년 7월
평점 :
당신은 어린 시절의 일을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나요? 중고등학생 시절? 초등학생 시절? 유치원? 아주
갓난 아이였을 때? 개인차는 존재하는 법이지만 아주 어린 시절에는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잘 기억 하지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죠.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기억이라는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져가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보통 사진을 통해서 우리는 그때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거나 윗 세대 사람들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통해서 기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기억이 너무나도 뚜렷이 남아있는 경우도 있죠.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한 획을
그었다던가 크게 다친 경우라면 그 일은 시간이 지나도 오랫동안 남아있을수도 있습니다. 그 반대로 오히려 그 상황이나 사건이 너무 끔찍했기에
기억되기 보다는 지워져 버릴수도 있습니다. 트라우마에 의한 부분적 기억상실인 경우죠. 자신이 그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살아가기가 힘들기 때문에
뇌에서 자정작용을 일으켜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여기 그러한 한 여자가 있습니다. 결혼을 했고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사진이 없습니다. 물론 어린 시절의 기억도 없습니다. 무언가 기억이 날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일상생활에 문제를 초래했다면
병원에라도 가봤을텐데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아왔습니다. 이제까지는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겨주신 지도 한장과 열쇠하나. 그녀는 그 열쇠가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는
모릅니다. 단지 지도를 보았을 때 그곳으로 가면 이 열쇠가 맞는 곳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동창회에서 만난 예전에 사귀었던 그에게 같이 가기를 청합니다. 일년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였다면 그
열쇠도 그전에 받았을텐데 그녀는 왜 그동안은 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왜 구태여 그를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남편이 있다면
그에게 말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녀는 아마도 어린 시절의 자신을 아는 그 누군가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어떤
편견 없이 바라봐 줄 사람을 말이죠. 그곳에 가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만 해봅니다.
그는 거절해버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이제 와서 자신에게 부탁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없었을테니 말이죠. 그에게는 그녀에 관한 마음이 아주
조금은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와 그녀는 그곳에 갑니다. 맞지 않는 열쇠. 열쇠가 맞는 곳을 찾아서 겨우 들어가 본 집. 그 집은
그녀의 옛 기억 속에서 남아있을까요? 그녀는 이 곳에서 자신이 잊고 있었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을까요?
기존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과는 조금 성격이 다른 형식의 글입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살인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니 살인은 존재하나 표면적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벌어지는 일은 없다는 것이지요. 연쇄적으로 누군가 마구 죽어가지도 않습니다.
범인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지요. 사건이 진행되면서 범인이 밝혀지기는 합니다만. 등장인물이 많지도 않습니다. 그와 그녀. 단 둘뿐입니다.
그들이 보고 있는 일기 속에서 한 가족이 등장을 하긴 합니다만 그마저도 그렇게 많은 인원은 아니니 절대 헷갈릴 일은 없는 법입니다.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범인을 잡는 것도 아니면 무슨 재미가 있어라고 말하시는 분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어지네요. 당신이 알지 못했던 재미가 이 속에 아주 잔뜩 숨겨져 있으니 말입니다. 참고로 비채에서 나온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은 비슷한 느낌의 표지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소장하는 재미를 주는 시리즈일수도
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