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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의심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2월
평점 :
"피고인 김유선, 들어오세요."
잠시 후, 옆문이 열리며 교도관들의 사이에 끼어 푸른 수의를 입은 김유선이 들어왔다. 법대를 향해 인사를 꾸벅하고는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변호사 옆자리에 앉았다.
딱 여기까지 읽고 일단 읽던 걸음을 멈췄다.상상을 해본다. 법정 안. 재판관 세명이 법대 위에 앉아있고 반대편으로는 검사가 법복을 입고 있다. 이쪽으로는 변호사가 있다. 그리고 방청객들. 그 속에 수의를 입은 한 여자. 이 여자는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에게 내려지는 선고는 어떤 것일까. 딱 38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 오만가지 생각이 다 머릿속을 떠돈다. 실제로 비슷한 일이 현실 속에서 있었기에 더욱 궁금해지는 마음을 부여잡고 다시 책장을 넘긴다.
판사이면서도 추리소설을 썼던 도진기 작가가 오랜만에 돌아왔다. 이제는 공직을 떠나 변호사로 돌아온 작가다. 그가 판사직에 있으면서 썼던 추리소설을 생각한다면 이 책은 약간 그 행보를 달리한다. 뒷표지와 작가후기에서도 미리 말해두고 있듯이 이 책은 법정소설이다.
사람이 죽은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검사와 변호사가 팽팽히 맞서고 그 가운데 판사가 중재를 하고 변론을 듣고 이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 추리소설을 기대했지만 새로운 분야의 소설로 말미암아 더욱 흥미가 동하게 된다.
제목이기도 한 '합리적 의심'은 법정용어로 의심스러운 상황인 경우에는 전적으로 피고인의 이익을 따른다는 원칙에 근거해서 피고인이 범인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 즉 합리적인 의심이 존재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판사는 유죄를 선고할수가 없다는 것이다. 잘못된 판결로 인해서 무죄인 피고인이 고통을 받을까 우려해서 만들어 놓은 원칙인 셈인데 이번 경우에는 오히려 그것이 발목을 잡는다. 이 판사는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될까.
여기 술에 취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다. 그들은 손에 또 술을 들었다. 투숙한 두명. 시간이 지난후 카운터에 전화가 온다. 남자가 숨을 쉬지 않는다며 신고를 해달라는 것이다. 부리나케 올라가보니 남자가 숨을 쉬지 않고 있다. 업고 뛰는 중에 구급대를 만나서 옮겼지만 결국 그 남자는 며칠이 지난 후 숨을 거두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여자가 의심을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겠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아무도 그 부분은 지적하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가 술에 취했고 젤리를 먹으려다가 목에 걸렸고 자신이 빼내려고 했다고 주장을 한다. 남자는 그대로 화장되어 버렸고 그 누구도 부검을 의뢰하지 않았다. 그 이후 보험금이 그여자에게 지불되었고 그제서야 그 여자의 범행이 물위로 드러났다.
분명히 의심이 가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어떠한 증거도 남아있지 않았다. 증거가 있었다 한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버려 시간이 흘러 증명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은 일부 증인들의 말로만 대치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판사는 무엇을 근거로 그녀에게 유죄라는 판결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는 이런 사건은 누가봐도 판결을 내리기가 어렵고 심적으로 무거운 짐이 된다. 여론에 따라서 판결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혼자서 균형을 잡고 결론을 내려야 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삼인의 판사 그중 다수결로 내려지는 판결. 저 여자는 어떤 판결을 받게 될까.
드라마 한편과 책 한권이 떠오른다. 판사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와 공지영 작가의 [해리]다. 김유선이라는 캐릭터를 보면서 계속 묘하게 연상되는 해리다. 드라마는 판사를 주인공으로 했기에 자연스레 연상이 된다.
전직이 판사였던 작가는 그 누구보다도 법정신들을 차분히 그리고 자세히 그려내고 있다. 논리정연하게 말을 하고 논거를 주장하는 검사와 변호사들. 그리고 모든 것을 누구보다도 객관적으로 생각해야만 하는 판사들. 법정드라마의 적격인 작가가 그려냈기에 더욱 사실적으로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