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인 소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눈높이가 다르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눈에 보이는 그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307p)


이 책을 읽기 바로 전 [브레이크 다운]에서는 한 여자가 느끼는 죄책감을 근거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갔다. 자신이 폭우속에서 보았던 여자가 죽음을 당한 것이다. 자신이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자신을 자책하는 한 여자의 모습이 이 책을 읽는 내내 스쳐 지나간다. 


내가 죽이지는 않았지만 내가 사건에 연계가 되어있다면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죽은 것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내가 막을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들. 사와자키 탐정도 분명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 사건을 풀어갔을 것이다. 비록 브레이크 다운의 여자처럼 자기 자신의 생활을 하지 못할만큼 심하게는 아니었어도 말이다.


사건을 의뢰하는 한통의 전화. 사와자키는 여느날과 다름없이 자신의 낡은 블루버드를 몰고 그곳으로 향한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의뢰가 아닌 질문이다. 자신의 딸을 돌려달라는 남자의 울부짖음. 사와자키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무언가 싶을때쯤 어디선가 나타난 경찰들에 의해서 사와자키는 졸지에 연행되고 만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이 범인의 계획인가 하고 느낄 무렵 경찰은 그간의 사정을 말해준다. 작가의 딸이 유괴되었고 몸값을 준비하라는 전화를 받았으며 그 돈이 든 가방을 사와자키에게 맡기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무런 연관도 없던 사와자키는 이렇게 해서 이 유괴사건에 개입을 하게 된다. 


십대의 아직 어린 소녀는 누구에게 유괴가 된 것이며 유괴를 한 사람은 돈 6천만엔을 돌려주면 무사히 그 소녀를 풀어줄 생각인 것일까. 전형적인 유괴사건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끊임없는 사건들이 줄기를 엮어가며 이어진다. 사와자키는 어떻게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까.


현금 1억엔과 각성제를 들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와타나베는 여전히 사와자키의 곁을 맴돈다. 그가 왜 그런 짓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언급되지 않는다. 단지 하루아침에 자신의 가족을 모두 잃은 충격때문에 생을 버렸을 것이라는 추축만 나올 뿐이다. 알콜중독에 걸려서 술만 의지하는 그이지만 자신이 세운 이 사무실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일까. 


광고지에 짧은 글을 적어 사와자키에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린다. 그 종이비행기가 왜 이리도 슬퍼 보이는 것인가. 영화의 장면으로 본다면 분명 종이 비행기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팔랑거리며 날아가면서 장면을 줌으로 당겼을 지도 모르겠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미키마우스가 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131p)

초여름의 하루는 돈을 꾸기 위해 늘어놓는 서론처럼 길어,(387p)


연속으로 하라 료의 사와자키 시리즈를 읽고 있노라니 작가 특유의 담담하면서 세련된 문체들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작가들이 흉내낼수 없는 그런 표현들이다. 여름날이 길다는 표현을 돈을 꾸기위해 말하는 서론으로 비유하다니 참으로 신선한 비유법이 아닌가. 진부한 표현보다는 이렇게 새롭고 눈에 익지 않은 표현들을 보는 것은 책을 읽는 하나의 즐거움이다.


푸른빛의 표지에는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은 한 소녀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바이올린을 켜는 소녀. 천재라 불리웠던 그 소녀는 지금 이 가정에서 사라지고 없다. 한창 보호를 받아야 할 시점에 없어진 소녀. 그 소녀를 데려간 인물은 대체 누구인 것인가. 앞으로도 큰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만큼 그 소녀가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읽게 된다. 비록 '내가 죽인 소녀'라는 제목이 스포가 될지라도 말이다. 


하라 료의 사와자키 시리즈는 이제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로 2부를 시작했다. 사와자키 탐정의 또다른 하루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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