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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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신의 삶을 읽기/쓰기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장폴 사르트르의 <말>과 비견된다. 다만, 후자가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부여와 자기의식 속에서 진지한 어조를 띠고 있다면, 오에 겐자부로는 그 어떠한 자부와 진지함과는 거리를 두는 편안한 얼굴로 우리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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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의 말 (경쾌한 에디션)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수전 손택 & 조너선 콧 지음, 김선형 옮김 / 마음산책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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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이 지닌 가치를 논하는 데 있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수전 손택이라는 인물이 대담의 형식을 취해 자신에 대한 생각을 표명했다는 것이다. 살아 생전 그는 미디어와 다른 이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자신의 모습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데 신경을 쏟았던 사람으로, 그 어떠한 매개와 설명, 보충, 삭제 등 없이 인터뷰 전체가 오롯이 드러난다는 사실은 우리를 그러한 통제를 벗어난 그와 마주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를 통해 글만으로 접근가능한 수전 손택이라는 사람의 리얼한 모습을 어느 정도는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지식인 셀러브리티에 대한 흔한 가십성 관심과 관음증적 호기심을 넘어선다. 절제되고 정리된, 그래서 미처 가 닿지 못했던 수전 손택이라는 사람이 어느샌가 대화 사이로 출현하고 마는 것이다. 인터뷰어인 조너선 콧은 수전 손택이 가진, 인간이라면 불가피하게 가질 수밖에 없는 편견 등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질문을 던지고, 손택 역시 그렇게 자신에 대한 신화가 한꺼풀씩 벗겨지는 대답을 함으로써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그에게로 데려간다. 이는 온전하게 통제될 수 없는 '말'를 매개로 벌어지는 하나의 우발적인 사건이며, 이는 명확하게 진실의 미학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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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 외 옮김 / 레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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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특유의 문체를 간직한 훌륭한 번역을 통해, 우리는 1960~70년대 프랑스의 한 소녀가 어떻게 중산층의 한 가정에서 아내, 엄마로서의 역할을 체화해 나가게 되는지 알게 된다. 작가의 표현처럼, 가족 내 성 역할의 전통에 붙들린 '얼어붙은 여자'가 되고 만 것이다.


한 여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과정에서 가족들(시댁 식구들, 남편)은 전통적인 성 역할 규범을 체화하고 이를 자신들의 일상적인 관계를 통해 재생산하는 행위자로 출현한다. 즉, 규범은 이데올로기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늘 관계를 통해서 상호 영향 하에서 하나의 상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규범'과 '상식'이 하나의 뿌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저항은 그것이 사소한 형태일지라도 쉽게 진행되지 못한다. 우리는 상식을 벗어난 자, 예의가 없는 자 앞에서는 최소한의 관용조차 허용되지 않는 사회의 실체를 일상적으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상식이고 무엇이 억압인지에 대한 각자의 판단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일상의 공간은 사실상 지극히 정치적인 공간인 것이다.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 연대기에서 '과도기'에 해당하는 이 소설은 그녀의 마지막 '소설'에 해당하면서도, "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의 어딘가"에 해당하는 글쓰기의 단초를 보여준다. 제목이 Une femme gelée가 아닌 La femme gelée이며,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얼어붙은 여자'의 구체적인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이러한 사실을 확증한다. 그녀는 구체적인 경험, 과정, 사물 등을 통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듯하지만, 결혼 생활을 하는 거의 모든 여자가 겪을 수밖에 없는 경험의 보편성 속에 그러한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걸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960~70년대 프랑스 사회와 현재 한국 사회의 시공간적 차이는 결혼 생활에 내재한 가정 내 성 역할 규범과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가부장제 사회라고 하는 현실 앞에서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아니 에르노는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쓴 새로운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함께 살아가는 이 모험에서, 우리는 평등하게 출발하지 않고, 서로의 사랑 속에서도 사회가 전통적으로 남성에게 부여한 특권들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특권들을 문제 삼고 후대에 넘겨주지 않는 일이야말로 우리, 소녀들, 여성들의 임무다."


오랜만에 아니 에르노의 문체를 고스란히 간직한 번역서를 읽고 나니, 같은 출판사의 출간 예정작들도 살펴보게 되는데, 아니 에르노의 최근 작이라 할 수 있는 <소녀의 기억>이 리스트에 있다. 아마도 이 만족감을 번역될 책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벌써부터 나는 소리 죽여 나 자신에게 이상한 연재소설을 들려주면서, 실제의 나를 지워버리고 우아함과 연약함으로 가득 찬 다른 소녀로 대체한다. - P73

질서와 평화. 낙원. 10년 후, 나는 반짝거리는 조용한 부엌에서, 딸기와 밀가루가 있는, 그 이미지 속으로 들어갔고,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죽어간다. - P85

순응주의와 수동성에 있어서, 대학에서 양성평등은 완벽했다. 그러나 나는 여성을 위한 공부와 남성을 위한 공부가 따로 있음을 알게 된다. - P151

나는 혼자 사는 여자가 아니라, 아직 결혼하지 않은 불확실한 존재다. 사람들은 처녀와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른다. 반면에 결혼한 여자에게는 남편, 아이들, 아파트, 세탁기 등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 P163

나는 나를 걱정하는 듯한 이런 기만적인 방식을 증오한다. 시어머니의 끝없는 친절, 마치 모래 함정 같은 친절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 달달하고 달콤하게, 유치하면서도 거짓되게, 비슷한 방식의 대답을 강요한다. - P188

어린 시절과 이전의 몇 년간의 리듬, 공부할 때의 충만하고 긴장된 순간들, 그리고 머리와 몸이 갑자기 둥둥 떠나니다 풀어지고, 휴식이 이어지는, 그런 리듬은 나에게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사라지지 않았다. - P213

당신은 왜 그렇게 불평을 해, 미혼모들과 이혼한 여자들은 저녁에 자기희생을 선물할 남자조차 없잖아. 그러나 여러 번, 공원에서, 유모차를 밀면서, 나는 나의 아이아 아닌, ‘그의 아이‘를 산책시킨다는 이상한 느낌을, 남편이자 아빠인,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그를 안심시키는, 위생적이고 조화로운 시스템 속에서 움직이는 말 잘 듣는 하나의 부품이라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 P222

두렵고, 허둥지둥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여성의 인내심, 그들은 그것을 애정이라 부른다. 나는 둘째 아이를 잘 키우고, 세 개 학급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장을 보고 식사를 만들고 고장 난 지퍼를 바꾸 달고, 아이들의 신발을 사는 경지에 이르렀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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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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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조용한 서재의 침묵이 아닌 여러 명의 아이들이 울어대는 거실 한복판에서 쓰여진 것 같은, 고단한 삶의 순간순간을 힘들지만 누구보다 위트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자가 알려주는 어떤 우아함. 삶에 대한 성숙한 태도가 진정 무엇인지를 미문(美文)이 아닌 어떤 태도로서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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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삶 쏜살 문고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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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내겐 문학이란 그저 단어 선택이 정확하고 문장 구성이 유려한 아름다운 문장으로 대변됐다. 미문(美文). 그 질서가 만들어내는 모종의 문화적 풍경 속에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무의식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대 소설의 기본 요소로 여겨지는 특성들이 '현실 그 자체'가 아닌 '현실적인 것'을 문학이란 영역에서 일정한 규범과 속성들로 구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앙티 로망'(사르트르가 나탈리 사로트의 『미지의 여인』의 서문을 써주면서 붙인 명칭)이나 '누보 로망', '새로운 사실주의' 등에 눈을 뜨게 된다.(물론, 우리는 누보 로망이라는 단어가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작가들과 문학비평가들을 통해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표현으로 확정된 역사를 알고 있다.)


프랑스에서 누보 로망이란 새로운 흐름을 연구하고 글을 쓰는 문학 비평가들과 연구자들은 예의 그렇듯 그러한 범주로 묶을 수 있는 작가군을 일별하고 그러한 범주화의 토대 위에서 그들의 비평과 연구가 갖는 맥락화를 정확히 하려 했다. 물론, 이러한 명명은 늘 그렇듯 저항을 낳는데, 명명의 권위 밖에 존재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작가들 중 사뮈엘 베케트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뒤라스의 이 책을 기존의 범주인 에세이로 구분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서 출발해야 한다. 글은 친절하지도 논리적이지도 체계적이지도 않지만,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순도 높은 진실의 지대로 우리를 훌쩍 데려간다. 속절없이 대면한 적 없는 진실의 세계에 일순간 당도하는 것이다.


뒤라스의 글에선 고독과 광기의 냄새가 풍긴다. 그것은 또한 술과 사랑이란 이름으로 물질화되기도 한다. 바로 그 힘으로 그녀는 그 누구도 쓰지 않았을(사실은 발설하지 않았을에 가까운) 현실 그 자체, 진실 그 자체를 써내려 간다. 그런 글을 접하면 누군가의 내밀한 일기장을 훔쳐본 것만 같아 이상하게 뒤를 돌아보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읽는 이가 준비할 새도 없이 삶의 본질을 향해 돌진하고 기존의 생각을 압도하고,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새겨넣는 듯한 광기 어린 투쟁적인 글들을 보고 있노라면 카프카의 「변신」, 사르트르의 『구토』, 카뮈의 『이방인』의 독서가 그렇듯, 이 세계가 한순간 낯설어지고 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새삼스러워지는 것이다. 세계를 낯설게 하기.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내용이 무엇이며, 어떻게 구성됐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밤늦게 온 마지막 손님」, 작가의 글쓰기에서 술이 갖는 의미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술」, 『죽음의 병』의 해설에 해당하는 「남자」, 비참한 삶이 구원되지 못하는 기이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성찰인 「단수하러 온 남자」, 그녀가 갖고 있는 파리에 대한 생각 및 관계를 가장 밀도 높게 서술하고 있는 「파리」, 일곱 문장으로 구성된 사랑의 단상인 「편지」. 이런 글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특히, 「단수하러 온 남자」는 우리가 카프카, 사르트르, 카뮈, 베케트 등의 글에서 접했던 부조리한 현실의 배면에 존재하는 기이한 정조와 특유의 멜랑콜리를 담고 있는, 사회학적 폭로를 연상케 하는 문학적 고발에 해당하는 수작으로 여겨진다.


끝으로, 번역자 윤진의 이름을 기억하고자 한다. 역주는 책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정확성을 갖추면서도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바로 그런 방식처럼 번역 또한 이뤄졌다. 뒤라스의 문체인지 번역자의 문체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는 글들. 역자를 따라 갖게 되는 독서 목록으로 생겨나는 길의 여정도 흥미로울 것만 같다.

개별적인 부분에 지체하지 말고, 말의 고속도로를, 말의 일반적인 도로를 달리고 싶었다. 불가능한 일이다. 의미를 벗어나기, 아무 데도 가지 않기, 아는 혹은 모르는 한 지점에서 출발하지 않고 그저 말하기만 하기, 그러다 무턱대고 수많은 다른 말들 틈에 이르기. 그럴 수 없다. 알면서 동시에 모를 수는 없다. 아는 이 책이 바로 그런 고속 도로이기를, 동시에 어디든 갈 수 있는 길이기를 바랐지만, 이 책은 어디든 다 가고자 하지만 한 번에 단 한 곳밖에 가지 못하는, 누구나 그렇고 어느 책이나 그렇듯이 다시 왔다가 다시 떠나야 하는 그런 책이 될 것이다. 그게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그런 책은 써질 수 없다. - P17

언제나 혹은 거의 언제나, 모든 유년기에, 그 유년기에 이어진 모든 삶에, 어머니란 광기의 표상이다. - P63

나는 글을 쓰기 때문에 좋은 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그랬다. 남자들은 글 쓰는 여자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낯선 땅이다. - P84

모든 것이 글쓰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까지 나는, 반대로, 글쓰기는 열려 있다고, 모든 것을 뚫고 간다고, 설사 문이 닫혀 있어도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글쓰기가 더 나아가지 못하는 문이 있다는, 우리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떤 닫힌 문 앞에서는 글쓰기가 멈춰 서고 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는 잠재적으로 바르트 방식의 글쓰기가 들어 있다. 나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고, 그것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때로, 문학상을 받은 소설들이 그렇듯이, 소설에는 정당성이 부여된다. 다시 말하면, 나는 아직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 P100

오래전부터, 옛날부터, 수천 년 전부터 침묵은 여자들의 몫이었다. 따라서 문학도 여자들의 것이다. 문학 속에서 여자에 대해 말하든, 여자들이 문학을 하든, 아무튼 여자들의 것이다. - P116

사랑없이 사는 일은 불가능하다. 남은 것이 말뿐이라 해도, 사랑은 늘 살아간다. 최악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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