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치릴로 테스카롤리 지음, 성염 옮김 / 성바오로출판사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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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8월 중순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를 방문한다. 본명이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인 그는 266대 교황으로 지금까지 아무도 쓰지 않았던 '프란치스코'를 교황명으로 정했다. 13세기의 성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에서 따왔음은 물론이다. 인터넷 뉴스에 의하면 지난 21일, 이탈리아의 한 도로에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천사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잠시만 멈춰달라'는 내용의 현수막이었다. 지나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차에서 내려 장애 여성 레베카 머리에 키스를 했다는 기사였다. 가족뿐 아니라 보는 이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선사했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 기사를 접한 뒤, 눈에 들어 온 것이 서재 한쪽에 꽂혀 있는 프란치스코 전기(傳記)이다. C. 테스카롤리가 쓰고 성염이 옮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성바오로 출판, 1999)가 그것이다. 지은이 테스카롤리는 이탈리아의 전기 작가이고, 옮긴이 성염은 가톨릭 사제로 전문 번역가 겸 저술가이다. 성바오로출판사도 가톨릭 전문 출판사이니까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가톨릭 서적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성 프란치스코는 종교를 초월해서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형제로 생각하는 성인(聖人) 중의 성인이다. 지금은 물질적 욕심과 육체적 욕구가 팽배한 시대이다. 자기 것을 모두 내려놓고 가난한 이들과 평생을 함께 한 프란치스코의 사랑이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고 할 것이다.

 

이 책은 무척 얇다. 모두 합해야 65쪽에 지나지 않는 책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에 대해 알찬 내용을 빠짐없이 담고 있다. 아마존에 올려 있는동일 제목의 영어 원서가 페이퍼북으로 13달러인 것으로 볼 때(책 쪽수 표시는 없었음), 요약해서 번역하지 않았나 싶다. 여담(餘談)이 되겠지만, 목회자로서 가끔 가톨릭 전문 출판사 책을 구입하게 되는데, 소박한 장정과 고졸미(古拙美)가 마음에 든다. 이 책도 예외가 아니다. 표지 왼쪽 상단에 프란치스코의 사진이 배치되어 있고, 제목으로 '모든 사람의 형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라고 되어 있다. 하단 중앙에 출판사 마크와 함께 '성바오로'라는 출판사 이름이 인쇄되어 있다.

 

이 얇은 책은 총 19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기문의 전형적 양식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한 장이 3쪽으로 되어 있는 것이 많고 짧은 것은 2쪽, 긴 것도 6쪽을 넘지 않으니 먼저 읽기에 부담이 없다. 또 초등학교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쉽게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읽는 시간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나도 책을 독파하는데 1시간이 채 안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아는 데 필요한 정보들을 다 담고 있어 유익하다. 작은 책자에서 꼭 필요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에서 아씨시는 도시 이름이다. 그리고 프란치스코가 사람 이름이 된다. 프란치스코의 세례명은 요한이었다. 그러니까 처음엔 이 이름으로 불렀다. 하지만 아버지 베드로 베르나르도네가 프랑스와의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번 관계로 아들 요한의 이름을 프란치스코로 바꾸었다. 프란치스코는 '프랑스인'이라는 뜻이다. 프란치스코의 아버지는 국제적(?)인 포목상이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호의호식하던 프란치스코의 첫 시련은 전쟁에 징발되면서 찾아왔다. 아씨시와 페루지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그는 포로가 되어 1 년여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심한 병을 앓았는데 병중에 이런 환시를 경험한다.

 

"프란치스코야, 주인을 섬기는 일과 종을 섬기는 일 중에 어느 편이 그대에게 이롭겠는가?" / "물론 주인을 섬기는 일입니다." / "아씨시로 돌아가거라. 그대가 무엇을 해야 할지 거기서 그대에게 알려 주겠다!"

 

그 뒤로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친구들과도 손을 끊고 가난한 이들과 나병 환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당대의 젊은이들을 부패시키는 돈과 출세욕, 탐욕과 쾌락, 그리고 허망한 공명심이 우상임을 깨달은 것도 이즈음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하면서 상속권까지 포기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했다.

 

"나의 아버지,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를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신발과 지팡이를 벗어 던지고 통옷에 허리띠를 맨 차림이었다. 무소유의 생활을 실천한 것이다. 그를 따르는 형제 3명으로 시작한 작은 형제회는 1221년 이른바 '돗자리총회' 5천 여 명으로 불어났다. 프란치스코는 죽을 때까지 2년 동안 자기 몸에 예수 수난의 상흔을 지니고 다녔고, 병상에서 쓴 '태양의 찬가'('피조물의 찬가'라고 부르기도 함)는 이탈리아 문학사에서도 손꼽히는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는 사랑의 기사이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 나병 환자에게 입을 맞추고 입고 있던 옷을 나눠주며, 길에서 아무나 붙잡고 '형제여,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를 묻곤 했다.

 

그는 1226년 10월 3일 저녁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나이 44세 때의 일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승에서 보낸 햇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형제들에게 가까이 간 사랑이 중요하다. 프란치스코는 당대 가난한 사람들만의 형제를 넘어 오늘날까지 빈자(貧者)들의 따뜻한 친구로 남아 있다. 개신교 역사학자 폴 사바티에는 "세기를 통틀어 가톨릭 교회가 낸 가장 위대한 성인"이라고 그를 평했고,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백년마다 한 번씩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다면 인류의 구원은 보장될 것"이라고 확언했다.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고 병자와 가난한 자의 친구로서 복음과 사랑을 전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더 그리워진다. 이 사회에 이기주의와 물질 숭배가 편만(遍滿)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2의 그리스도로까지 불리는 프란치스코, 그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면서 상생의 길을 찾아 볼 때이다. 얇지만 결코 작지 않은 책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시간을 내어 이 책을 읽는다면 빈 마음을 채우는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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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디인가?
R. A. 토레이 지음, 유정희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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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아이 이모 집에 다니러 와서 이것저것 실컷 책만 섭렵했다. 처음엔 조카 아이들이 같이 놀아주지 않는다고 불만의 마음을 품었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좀 미안하긴 하지만 그것만 해도 내 마음의 짐은 많이 들어 낸 것 같다.

 

<기독교사상> 4월호에 특집으로 실린 '깨어나라! 한국 기독청년이여-한국YMCA전국연맹 100년을 맞아'란 타이틀 아래 네 편의 논문과 함께 실려 있는 특별좌담을 잘 읽었다. 거기에 대충 훑어 본 것이지만 오프라 윈프리(Oprah Gail Winfrey) 전기도 마음에 와 닿았다.

 

그런데 정작 한 권을 온전히 독파한 책은 <왜 무디인가?>(생명의말씀사, 2005년 출판)이다. 무디의 친구 R. A. Torrey(토레이)가 쓰고 유정희가 옮긴 책이다. 원 제목은 <Why God Used D. L. Moody?>이다. 영어 책명을 직역하면 '하나님은 왜 무디를 사용하셨나?'인데,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왜 무디인가?>로 더 압축해 제목을 정한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무디'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구두 수선공으로 시작해 유명 설교자요 전도자가 된 그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무디를 닮고 싶어 속으로 다짐한 경험들도 다 갖고 있을 것이다. 그는 정말 우리 모두에게 전설적인 신앙인인 것이 분명했다.

 

표지 제목 옆에 붙인 설명으로 '"현대 대중 전도의 아버지" 무디의 7가지 비밀'이라 되어 있었다. 책 전체의 내용을 집약해 놓은 글귀였다. 80 쪽밖에 안 되는 얇은 책이지만 무디를 정확하게 알게 하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오랜 세월 무디와 함께 지낸 친구가 쓴 글이어서 정확도와 신뢰도도 그만큼 높을 것이었다.

 

'무디의 7가지 비밀'이라고 했으니 이 '7'이라는 숫자가 책 내용을 구성할 얼개가 된다. 처음의 머리말과 끝의 역자 후기를 빼고 총 7개의 챕터(chapter)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을 차례대로 나열하면, 1.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했다 2.열심히 기도했다. 3.성경을 깊이 있고 실제적으로 연구했다 4.겸손했다 5.을 사랑하지 않았다 6.영혼 구원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7.위로부터 오는 능력(성령)을 덧입었다 등이다.

 

각 챕터의 제목만으로도 눈치 챌 수 있겠지만 7개의 덕목은 천국 백성이면 누구나 구비하고 있어야 할 것들이다. 헌신과 기도, 성경 연구와 겸손, 돈을 사랑하지 않음, 영혼 구원과 성령. 이 중 한두 개도 갖추기 어려운데 무디는 7개를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디를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고 지은이 R. A. 토레이는 말하고 있다.

 

또 지은이는 무디가 갖고 있던 이 7가지 덕목을 입증하기 위해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가령 무디는 그의 존재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하였고(14쪽, 온전한 헌신), 무디의 설교는 누구나 듣고 싶을 만큼 뛰어 났지만 기도는 더 뛰어난 사람이었다(21쪽,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

 

그는 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은 아니지만 한 권의 책 성경에 정통한 학자였고(29쪽, 성경에 대한 깊은 연구), 또 지은이가 만나 본 사람 중에 가장 겸손한 사람이 무디라고 했다(40쪽, 겸손한 사람). 그는 돈을 모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음에도 결코 돈에 욕심을 내지 않았으며(48쪽, 을 가까이 하지 않음), 하루에 한 사람 이상 전도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을 정도로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54쪽,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

 

무엇보다 그의 눈은 이 세상이 아닌 하늘에 맞춰져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했다. 성령세례를 받고 집회를 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자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는 늘 강조하기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 세례라고 했다(75쪽,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덧입음).

 

위와 같은 7가지 비밀 병기를 무디에게 허락하시고 하나님은 그를 귀하게 쓰셨다. 무디성경학교를 거쳐나간 제자들이 한때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복음 전파를 책임졌으며, 무디 자신도 미국과 유럽 전역을 종회무진하며 말씀 선포 사역에 매진했다. 이런 무디를 작은 책자 <왜 무디인가?>는 잘 정리해 주고 있다. 이 책에서 하나님의 충실한 종 무디를 만나는 기쁨에 더해 독자들에게는 신선한 도전을 받는 기회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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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교인 좋은 크리스천 -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인기연재칼럼
강덕영 엮음 / 상상나무(선미디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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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가는군요. 고등학교 선배 한 분이 후배들을 초청해서 저녁 식사를 대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의 호스트는 영업사원으로 시작해서 거대 기업을 일군 분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심이 깊어 주님의 청지기 정신으로 바르게 성장시킨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유나이티드제약 강덕영 회장이 우리를 초청한 분입니다. 그는 또 한 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있으며 평신도 교육을 위해 갈렙바이블아카데미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미술 음악 연극 등을 돕고 활성화시키기 위해 유나이티드문화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분이라고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다방면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분입니다.

 

4월 22일 고등학교 동문 20 여 명이 강덕영 회장 자택에 모였습니다. 동부인(同夫人)한 사람들까지 헤아리면 30 여 명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면서 긴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강 회장님과 사모님의 정성과 후배 사랑이 돋보이는 자리였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여러 영역을 넘어 신앙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첫 만남이기는 하지만 한 신앙인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해서 사업을 발전시켜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이야기는 참석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작은 것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탁한 그의 믿음은 평범한 가운데 새벽 별처럼 빛났습니다.

 

세 시간 여의 방담 후 헤어질 때 받은 선물이 이 책입니다. <좋은 교인 좋은 크리스천>(강덕영 지음, 상상나무, 2013년 12월 출판). 강 회장은 이전에도 몇 권의 책을 출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을 통해 강덕영 장로를 처음 만난 것이 됩니다. 책의 사이즈도 포켓판이군요. 정확하게 말하면 4.6판으로 문고판보다는 조금 크지만 손 안에 편안하게 잡히는 것이기 때문에 휴대하며 읽기 좋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지금 막 읽었습니다. 신앙 에세이집이라 할 수 있는 책이라 가볍게 술술 읽어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여느 책에 뒤지지 않는 무게를 갖고 있었습니다.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수익을 올려야 합니다. 강 장로도 국내외 1천 여 명의 직원들을 책임지고 있는 큰 기업의 회장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나 또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 즉 세상을 바쁘게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서 좋은 글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바람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미안하지만 강덕영 회장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단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고 생각을 교정해야 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문필가의 반열에 벌써 올라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 바쁜 와중에도 여러 권의 책을 출간했더군요. 시간 나는 대로 읽어 볼 그의 책은 <1%의 가능성에 도전하라>, <사랑하지 않으면 떠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다>, <종교인과 신앙인> 등이 안표지 저자 소개란에 등재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이 책과 더불어 <종교인과 신앙인> 은 국민일보 미션라이프에 고정적으로 연재한 신앙 칼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큰 인기 속에 글을 연재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글은 이미 대중적인 검증을 마쳤고 따라서 그는 문필가가 되는 셈입니다. 처음 이 책을 받아들고 왜 같은 말을 반복하는 제목을 달았을까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좋은 교인 좋은 크리스천>. '교인'과 '크리스천'은 같은 뜻입니다. 영어 '크리스천(chriatian)'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기독)교인'이 되니까요. 저 나름대로 추측해 본다면, 유어(類語)를 반복함으로 뜻을 강조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글을 읽으니, '교인'과 '크리스천'을 구별하여 평범한 신앙인(교인)과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 신앙인(크리스천)으로 나누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강 장로는 '좋은 크리스천'의 위치에 서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에 해당합니다.

 

이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0편씩의 글을 담고 있는 각 부의 명칭은 차례대로 이렇습니다. 1부 '좋은 교인 좋은 크리스천', 2부 '성경 속에서 배우는 진리', 3부 '바른 신앙 바른 가치관', 4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예수 향기를 전하는 신앙인이 되자는 내용입니다. 그는 행함이 따르는 신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집에서도 천사, 교회에서도 천사가 될 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 들을 수 있다는 거예요. 신행불일치(信行不一致)의 교인들을 보고 교회 나가지 않고 집에서 혼자 예배를 드리는 '가나안 교인'('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가 됨)이 100 만 명을 넘고 있다고 그는 걱정합니다.

 

강 장로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그는 보수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하지만 융통성 없는 꽉 막힌 보수는 아닙니다. 분명한 신앙의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있지만 근본주의 신학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인정해 줄 줄 알고, 또 진보주의 신학의 장점을 이해하려는 아량도 가지고 있습니다. 현충일 기념식 다른 편에서 열리고 있는 빨치산 축제를 보고 그 사람들도 6.25 동란 때 지리산 자락에서 사랑하는 부모 형제를 잃은 사람들(65쪽)이라며 그 한을 풀고 가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진돗개 전도법이 꼭 아니더라도 믿는 자가 전도하면 하나님께서 열매 맺게 해 주신다는 믿음에서 신앙의 넉넉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강 장로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청지기 정신'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사람은 그것을 맡아서 관리하다가 하늘나라로 간다는 이 정신은 크리스천으로서 가져야 할 당연한 자세이기도 합니다(81쪽). 하지만 실제 이 청지기 정신으로 살아가는 교인들이 생각처럼 많지 않습니다. 청지기 정신은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할 때 꼭 필요한 것임을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신앙 교육을 위해서 평신도 신학 공부 프로그램(갈렙바이블아카데미)을 운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가 삶의 과정에서 절실하게 느낀 것이 성경 말씀의 중요성이며 하나님의 동행하심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없이 이 어려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참으로 용감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용감한 사람'은 '미련한 사람'의 반어법적 표현일 것입니다.

 

강덕영 장로는 '보수 꼴통'이라는 말이 듣기 좋다고 했지만, 그와의 만남을 통해서 또 그의 책을 통해서 느낀 바로는 '보수'이기는 하지만 '꼴통'까지는 아닙니다. 꼴통은 자기 고집이 강하고 다른 의견에 배타적이며 융통성이라곤 전혀 없는 성향의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는 적어도 그런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절기 행사 때 교회에서 상행위(商行爲, 기관 수익 사업으로 농수산물을 판매하는 등의)를 하고, 드럼과 전자 기타가 예배당 본당에 자리하는 것을 탐탁치않게 여기고(101쪽), 예배 때의 의복 예절에 신경을 쓰는 것(105쪽) 등은 너무 개방된 시대 조류에 편승하지 않고 성령 충만했던 초대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의 보수 신앙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정확히 뽑아보진 않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를 들라면 '기도'가 빠지지 않을 텐데, 이것도 그의 보수 신앙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무엇을 걱정하느냐고 얘기하니까요.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쉬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여린 사람이라도 전혀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아니, 불신자가 읽어도 이해에 무리가 없을 만큼 쉬운 문장들입니다. 탁월한 저술가는 남녀노소, 계급계층, 학식유무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생산해 냅니다. 그런 점에서 강덕영 장로는 뛰어난 저술가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책자는 바른 신앙에 대해 꼭 알아야 할 많은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모범 강 장로가 경험에서 습득한 내용들을 자신 있게 서술한 것들이어서 독자는 힘을 얻게 됩니다. 아무 때 어느 곳이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어서 더 친근감이 갑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

 

옥(玉)에 티 둘. 작은 거인의 풍모를 보이는 당당한 강 장로가 가끔 문장의 종결 어미에 그답지 않은 표현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가 앞으로 좋은 책을 많이 출판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에 하는 지적입니다. 가령 '~생각해 보았다', ' ~기도해 본다', '~된 것 같다' 등의 평서문 종결 어미가 자주 눈에 띕니다. 이런 어미는 자신감 결여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있습니다. '~생각했다', '기도한다', '~되었다' 등으로 확신하는 종결어미를 사용하면 더 좋을 것입니다. 물론 저자는 겸손의 의미로 이렇게 표현했겠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확신의 부족으로 받아들여질 소지도 없지 않습니다. 또 책의 체제에 대한 것인데, 머리말로 시작해서 에필로그로 끝맺고 있습니다. 머리말로 시작했으면 맺음말로 끝을 내야하고, 에필로그로 맺음 하고자 하면 프롤로그로 시작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런 지엽적인 것을 서평에서 지적한다는 것은 이 책이 완벽에 가깝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신자뿐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일독을 권하면서 글을 맺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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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유감 - 현직 부장판사가 말하는 법과 사람 그리고 정의
문유석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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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법의 굴레에 얽혀 있으면서도 법과는 무관한 듯 살아왔다. 아니 무관한 듯 살아왔다기보다 법을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겠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주위 평도 아마 이런 뜻으로 하는 말일 터이다. 하지만 아무 잘못한 일도 없으면서 '법'하면 본능적으로 움츠러드는 것은 왜인가. 죄의 이방지대에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법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목회를 하다 보니 여러 사람들과 관계하게 된다. 그 중 사회적 약자,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비교적 많은 편인데, 재판 중인 지인을 위해 탄원서를 작성할 일이 생겼다. 탄원서는 일정한 양식이 없이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을 담으면 된다지만 그래도 법에 대해 조그마한 지식이라도 갖고 써야 할 것 같아 여러 날을 망설였다. 탄원서에는 진정성뿐 아니라 책임성도 따라야 하고 또 사회의 일반적 가치 척도에 어긋나지 않은 것이야 하기 때문에 더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럴 즈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문유석 판사가 쓴 <판사유감>(21세기북스 출판)이라는 책이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진학하고 또 어렵다는 사법시험 통과해서 법관으로 있는 이가 무슨 유감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언뜻 스쳤지만 딱딱한 법관의 건조한 글에서 탄원서 작성에 필요한 내용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요즘은 글의 시대가 아니고 말의 시대이다. 말만 잘 하면 어디서든 한 몫 할 수 있다. 시대의 발달로 미디어 산업이 상승세를 타고 있는 것이 이런 흐름을 형성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 글쓰기는 그렇게 중요한 영역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말은 이내 사라지는 것이지만 글은 반영구적이다. 오래도록 남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글쓰기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판사유감>은 젊은 부장판사가 법원에 종사하면서 느낀 감상을 적은 글이다. 저자 소개에서 밝히고 있듯이 '판사유감'의 원 뜻은 재판을 하면서 느낀 소회를 적은 것인데, 또 달리 판사라는 직업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표현한 글이기도 하다. 후자의 의미라면 '遺憾(유감)'이란 한자 말이 더 적당할 것이다. 법관들의 세계는 우리 일반 시민들과는 다른 곳이어서 미처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 책에 정리한 글들은 이미 글쓴이가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려 큰 호응을 얻은 글들과 또 일부는 '법원회보' 등 이미 언론에 소개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검증된 글쟁이인 셈이다.

 

법관은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법률에 근거해 공정하게 판결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서 따뜻한 마음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 상 싶다. 그러나 나는 문유석 판사의 <판사유감>을 읽는 내내 입에는 웃음기, 마음엔 따뜻함을 누릴 수 있었다. 법관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공유 의식이라고 할까, 큰 범주에서의 동류의식이라고 할까,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친근한 법관'쯤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하얀 표지에 제목의 검정 글씨, 표지 상단 '현직 부장판사가 말하는 법과 사람 그리고 정의'라는 책 내용을 압축한 소개, 거기서 '법', '사람', '정의'라는 단어를 청색으로 포장하지 않았다면 천상 칙칙한 심상의 법원에서 고리타분한 법조문을 갖고 판결을 내리는 법관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세 단어의 파란 색상은 그런 어두운 법조 타운의 보수성에 반기를 들어보겠다는 몸짓으로 내게 비춰 관심을 갖게 했다.

 

프롤로그에서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200쪽 중반의 분량이다. 1부 '사람을 배우다' 그가 판결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감정을 군더더기 없이 써 내려간 글이다. 특히 서울중앙지법 파산부에 근무할 때 만난 빚쟁이들의 막다른 인생 사연을 판사의 눈을 통해 그대로 클로즈업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동병상련에서 갖는 읍소형 글이 아니고, 그렇다고 문학으로 승화시킨 서민의 애환도 아닌, 판사를 통해 객관적으로 조명되는 인생 실패자의 모습 속에서의 온정을 느낄 수 있는 내용이어서 훈훈함을 느낄 수 있었다.

 

2부 '판사, 세상을 배우다'는 법조 사회를 세상과 비교한 글들로 채워져 있다. '초임부장일기'라는 제목으로 법관 게시판에 연재했던 글들 같은데, 그의 생각과 삶이 소롯이 들어난다. 위계질서가 분명한 법조문화에 대해 돌직구가 아닌 애교섞인 이의 제기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동의를 받아낸다는 뜻이다. 고정된 조직문화는 제3자의 눈에 쉬 드러나는 법이다. 그러나 문유석은 자기 조직의 꽉 막힌 부분을 유머러스하게 잘 기록하고 있다.

주심과 배석 판사의 관계는 재판정 밖에까지 이어지는데, 그는 세 사람을 '묵언 수행' 또는 '삼각편대'라고 표현했고, 회식 자리에서 상급자에게 무릎 꿇고 술 따라 올리는 것을 '영정 사진'에 비유한 것도 재미 있었다. 사생활도 없이 야근하며 밤낮 재판에 매달리는 것의 부당함도 외칠 줄 아는 지극히 현실적인 그의 시야가 밉지 않은 것은 그의 이런 행동이 고정된 법조 문화의 변화를 바라는 마음의 결과 때문일 것이다. 법관은 사실을 밝혀내는 직업군에 속한 사람이다. 당연히 그들이 생산해 내는 글도도 사실적인 글들이다. 하지만 문유석 판사의 글은 그것 너머 있기 때문에 독자의 눈을 잡게 된다. 그를 열린 마인드를 가진 법관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지은이 문유석 판사는 본인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글쓰기 재주가 특출한 사람이었다. 내가 보기엔 그것은 타고난 재주가 아니라 후천적 노력의 산물인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동서양의 고전 등 많은 독서량을 확보하고 있었고 그것을 토대로 글쓰기를 즐긴 것 같으니까 말이다. 그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노동 등 각 방면에 해박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의 글에서 눈치챌 수 있었으며 특히 한 외고(外高) 특강에 가서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 중 첫 번째로 든 것이 인류의 문화유산인 고전을 읽는 것을 권하고 있는데, 이것은 본인이 경험하지 않고는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요즘 출판 추세가 책을 만들면서 추천을 받는 것이다. 자기 과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방면에 아니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명망가들을 추천인으로 내 세우기도 한다. 젊은 부장 판사가 출판하는 책이라면 그가 속해 있는 법원장 나아가 존경하는 원로 법관의 추천사를 받을 법도 한데, 그게 아니었다. 보수적 법조 사회와 어울리지 않게 그는 문화심리학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뮤지션 등 자기 분야의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명세를 크게 타고 있다고도 볼 수 없는 세 사람의 추천 글을 받아 실었다. 하지만 이들은 진정 글쓴이가 추구하는 정신 세계를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변화는 소수의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문유석 판사의 글을 읽으면서 큰 바위를 들겠다고 자기만큼의 무게가 나가는 지렛대를 준비하는 선구자를 보는 듯해 즐거웠다. 변화를 극히 싫어하는 법조 문화라고 알려져 있다. 조금만 드러나는 언행을 해도 '혼자 잘 났냐'는 사시(斜視)의 눈들이 매섭게 노려본다. 하지만 시류의 변화에 예외 영역은 없다. 법조계도 마찬가지이다. 문유석 판사를 비롯해 젊고 실력 있는 이들로 인해 육중한 바위에 서서히 균열이 가기를 바란다.

 

문유석의 글은 무엇보다도 판사의 손에서 보기 힘든 따뜻함이 배여 있다. 그 따뜻함은 자기를 드러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서민들과의 교류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이어서 더 의미가 있다. 법관은 판결로 모든 것을 말한다지만 나는 문 판사에게 판결문 이외의 글로 자신을 말하고 사람을 말하고 세상을 말하기를 권하고 싶다. 그는 분명 재판정을 따뜻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이 책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따뜻한 판사와 재판정은 법의 규제와 보호를 받고 있는 모든 국민이 바라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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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의 꿈
최문순 지음 / 고즈윈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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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때문에 요즘 강원도 춘천엘 자주 가게 된다. 춘천은 강원도의 도청 소재지이다. 이곳도 6.4지방 선거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거리의 높은 빌딩에 걸려 있는 출마자들의 현수막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기초 단체와 광역 자치 단체의 장, 의원에다 교육감이 되어 보겠다고 내미는 얼굴들은 그야말로 각양각색(各樣各色)이다. 진정 주민을 위한 좋은 후부의 선후를 분간하기 쉽지 않다. 내가 사는 지역도 그런데 하물며 남의 동네임에랴!

지금의 강원도 지사는 최문순이다. MBC 기자로 시작해 노조 위원장을 거쳐 사장까지 지내고 국회의원을 역임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나는 그가 이번 선거에 나와 연임에 도전하는가가 궁금했다. 춘천 시가지에 나부끼고 있는 그 많은 후보 현수막 중에 그의 얼굴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 궁금증은 더 했다. MBC 사장이었을 때에도, 국회의원일 때에도 가끔 만나는 그에게서 수수한 촌부(村夫)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는데, 그리고 서민으로 살아가는 나와의 근친성(近親性)으로 인해 위로받곤 했는데 그 많은 후보군에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은 분명 서운한 일이다.

그런데 그 궁금증이 의외의 곳에서 쉽게 풀렸다. 일을 보고 하룻밤 묵어가기 위해 처가에 들렸다. 장인어른의 서재에 들려 서적들을 일별하던 중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이즈도 크지 않고 그렇게 두터운 책이 아닌데도 내 눈에 잡힌 것이. 도리어 이 책은 그 반대편에 속하는 것이었다. 문고판보다 조금 큰 규격에다 쪽수도 200을 간신히 넘고 있었으니까.

책의 제목은 <감자의 꿈>(고즈윈). 그는 이 책에서 정치적인 언사는 조금도 밝히고 있지 않았다 그냥 서민 아닌 서민으로 살아오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진솔하게 털어놓고 있는 책이었다. '감자'는 강원도를 상징하는 농산물이다. 이것은 종종 강원도 사람들을 조금 비하하는 듯한 말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나는 이 '감자'라는 단어에서 꾸밈없는 진실과 천진난만함의 속성을 더 자주 떠올린다. 여기서 '감자의 꿈'은 최문순의 꿈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최문순에게서 정치인(도지사)이 아닌 동화 작가의 면모를 느꼈다. 높임말 문장부터가 그랬다. 또 처음부터 끝까지 묻어나는 자기 겸손과 꾸밈없는 순수성이 그랬다. 이런 것은 동화의 특징이 아닌가. 정치인들이 선거를 겨냥해서 찍어낸 책들에서 읽는 과대 포장성 글들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이 책은 모두 여섯 개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감자의 꿈, 감자의 희망, 감자의 사랑, 감자의 평화, 감자 마을 에피소드들, 내가 본 문순C 각 파트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렇다. 여기서 수식어 '감자의'를 뺀 꿈, 희망, 사랑, 평화 등은 최문순이 목표하며 살아왔고 또 앞으로 추구해 나갈 그의 가치들이다. 이어‘감자 마을 에피소드들'은 그 가치의 살아있는 예들이다. 이 책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Part6. '내가 본 문순C'이다. 사람을 치우치지 않고 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시각이 중요하다. 최문순을 직간접적으로 만나고 함께 생활한 사람들의 '최문순 관(觀)'을 담은 '내가 본 문순C'에서 공통된 한 어절을 집어낸다면 그것은 '인간 사랑'이 아닐까 싶다. 또 '인간 사랑'을 받들고 있는 단어들도 언급해야 할 텐데. 순수, 진리, 정의, 신뢰, 섬김 등이 보조 단어들이다.

나는 이젠 정치꾼이 아닌 진정한 정치인이 지역과 나라를 책임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니, 벌써 그렇게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안타까운 현실에 안타까워할 수만은 없다. 국민이 나서서 진정한 정치인을 만들고 세워나가야 한다. 최문순이 그런 정치인 중 앞 자리에 위치해 있지 않을까.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생각하는 최문순이니 말이다. '모든 감자는 귀하다'는 그의 책 첫 글의 일부에 그의 삶의 철학이 담겨 있는 것 같아 부기한다. 아울러 그의 승리를 멀리서 간절히 기도한다.

"감자 한 알 한 알이/모두 귀한 감자들입니다./누구도 버릴 수 없습니다./감자 한 알 한 알이/존중받고 존엄하게 여겨지는/감자밭/못생긴 감자도 찌그러진 감자도/굼벵이 먹은 감자도/귀퉁이에서 자란 감자도/덜 자란 감자도!/모두가 귀하게 여겨지는 감자밭!/그것이 감자의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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