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치릴로 테스카롤리 지음, 성염 옮김 / 성바오로출판사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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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는 8월 중순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를 방문한다. 본명이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인 그는 266대 교황으로 지금까지 아무도 쓰지 않았던 '프란치스코'를 교황명으로 정했다. 13세기의 성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에서 따왔음은 물론이다. 인터넷 뉴스에 의하면 지난 21일, 이탈리아의 한 도로에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천사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잠시만 멈춰달라'는 내용의 현수막이었다. 지나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차에서 내려 장애 여성 레베카 머리에 키스를 했다는 기사였다. 가족뿐 아니라 보는 이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선사했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 기사를 접한 뒤, 눈에 들어 온 것이 서재 한쪽에 꽂혀 있는 프란치스코 전기(傳記)이다. C. 테스카롤리가 쓰고 성염이 옮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성바오로 출판, 1999)가 그것이다. 지은이 테스카롤리는 이탈리아의 전기 작가이고, 옮긴이 성염은 가톨릭 사제로 전문 번역가 겸 저술가이다. 성바오로출판사도 가톨릭 전문 출판사이니까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가톨릭 서적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성 프란치스코는 종교를 초월해서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형제로 생각하는 성인(聖人) 중의 성인이다. 지금은 물질적 욕심과 육체적 욕구가 팽배한 시대이다. 자기 것을 모두 내려놓고 가난한 이들과 평생을 함께 한 프란치스코의 사랑이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고 할 것이다.

 

이 책은 무척 얇다. 모두 합해야 65쪽에 지나지 않는 책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에 대해 알찬 내용을 빠짐없이 담고 있다. 아마존에 올려 있는동일 제목의 영어 원서가 페이퍼북으로 13달러인 것으로 볼 때(책 쪽수 표시는 없었음), 요약해서 번역하지 않았나 싶다. 여담(餘談)이 되겠지만, 목회자로서 가끔 가톨릭 전문 출판사 책을 구입하게 되는데, 소박한 장정과 고졸미(古拙美)가 마음에 든다. 이 책도 예외가 아니다. 표지 왼쪽 상단에 프란치스코의 사진이 배치되어 있고, 제목으로 '모든 사람의 형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라고 되어 있다. 하단 중앙에 출판사 마크와 함께 '성바오로'라는 출판사 이름이 인쇄되어 있다.

 

이 얇은 책은 총 19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기문의 전형적 양식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한 장이 3쪽으로 되어 있는 것이 많고 짧은 것은 2쪽, 긴 것도 6쪽을 넘지 않으니 먼저 읽기에 부담이 없다. 또 초등학교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쉽게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읽는 시간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나도 책을 독파하는데 1시간이 채 안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아는 데 필요한 정보들을 다 담고 있어 유익하다. 작은 책자에서 꼭 필요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에서 아씨시는 도시 이름이다. 그리고 프란치스코가 사람 이름이 된다. 프란치스코의 세례명은 요한이었다. 그러니까 처음엔 이 이름으로 불렀다. 하지만 아버지 베드로 베르나르도네가 프랑스와의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번 관계로 아들 요한의 이름을 프란치스코로 바꾸었다. 프란치스코는 '프랑스인'이라는 뜻이다. 프란치스코의 아버지는 국제적(?)인 포목상이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호의호식하던 프란치스코의 첫 시련은 전쟁에 징발되면서 찾아왔다. 아씨시와 페루지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그는 포로가 되어 1 년여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심한 병을 앓았는데 병중에 이런 환시를 경험한다.

 

"프란치스코야, 주인을 섬기는 일과 종을 섬기는 일 중에 어느 편이 그대에게 이롭겠는가?" / "물론 주인을 섬기는 일입니다." / "아씨시로 돌아가거라. 그대가 무엇을 해야 할지 거기서 그대에게 알려 주겠다!"

 

그 뒤로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친구들과도 손을 끊고 가난한 이들과 나병 환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당대의 젊은이들을 부패시키는 돈과 출세욕, 탐욕과 쾌락, 그리고 허망한 공명심이 우상임을 깨달은 것도 이즈음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하면서 상속권까지 포기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했다.

 

"나의 아버지,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를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신발과 지팡이를 벗어 던지고 통옷에 허리띠를 맨 차림이었다. 무소유의 생활을 실천한 것이다. 그를 따르는 형제 3명으로 시작한 작은 형제회는 1221년 이른바 '돗자리총회' 5천 여 명으로 불어났다. 프란치스코는 죽을 때까지 2년 동안 자기 몸에 예수 수난의 상흔을 지니고 다녔고, 병상에서 쓴 '태양의 찬가'('피조물의 찬가'라고 부르기도 함)는 이탈리아 문학사에서도 손꼽히는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는 사랑의 기사이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 나병 환자에게 입을 맞추고 입고 있던 옷을 나눠주며, 길에서 아무나 붙잡고 '형제여,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를 묻곤 했다.

 

그는 1226년 10월 3일 저녁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나이 44세 때의 일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승에서 보낸 햇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형제들에게 가까이 간 사랑이 중요하다. 프란치스코는 당대 가난한 사람들만의 형제를 넘어 오늘날까지 빈자(貧者)들의 따뜻한 친구로 남아 있다. 개신교 역사학자 폴 사바티에는 "세기를 통틀어 가톨릭 교회가 낸 가장 위대한 성인"이라고 그를 평했고,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백년마다 한 번씩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다면 인류의 구원은 보장될 것"이라고 확언했다.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고 병자와 가난한 자의 친구로서 복음과 사랑을 전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더 그리워진다. 이 사회에 이기주의와 물질 숭배가 편만(遍滿)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2의 그리스도로까지 불리는 프란치스코, 그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면서 상생의 길을 찾아 볼 때이다. 얇지만 결코 작지 않은 책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시간을 내어 이 책을 읽는다면 빈 마음을 채우는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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