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조동호 평전
이현희 지음 / 솔과학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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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희 교수는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많지 않은 학자 중 한 분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사>를 비롯해서 굵직한 저서들을 공간한 바 있다. 역사에서는 관점이 중요한데, 이 교수는 중용의 관점으로 객관적 역사 서술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있는 특장을 그의 저서들에서 유지해 왔다. 보수와 진보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상황에서도 양쪽의 장점을 취하면서 서술의 필을 휘두르는 그의 펜이 그래서 힘이 있어 보인다.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으면서도 빛을 발하지 못하는 한 활동가를 발굴 그를 역사의 수레에 동승시킨 것이 십 여년 전의 일로 기억한다. 이 교수가 발굴해서 이 사회에 소개한 사람이 유정 조동호 선생이다. 유정의 사회주의 운동 이력이 발굴에 장애가 되었겠으나 이 교수는 일제시대 사회주의는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다며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래서 더 가치롭게 유정을 조명하고 있다. 

발로 뛰어 자료를 찾고 사람을 만나 구술을 받는 등 온갖 노력 끝에 10 여년 전 출판된 책이 <조동호 항일투쟁사>였다. 조동호 선생에 대해 학적으로 더 보탤 것이 없을 정도의 내용을 갖춘 연구물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충실한 역사 연구물은 가끔 대중이 접근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는 게 사실이다. 문체가 그렇고 글의 형식이 또한 그러하며 무엇보다도 한자가 많이 섞여 대중 특히 젊은이들이 가까이 하기가 힘든 게 사실이었다.

국가와 민족에 기여한 위인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어야 그 가치가 제 값을 하게 된다. 유정 조동호 선생은 이런 점에서 아쉬움이 있었다. 유정의 활동에 비해 그를 아는 국민이 많지 않았다. 이번에 이현희 교수가 이점을 극복하고자 순 한글로 <조동호 평전>을  출간한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로 생각된다. 이 책에는 <조동호 항일투쟁사>에 수록하지 못한 새로운 사실들도 포함되어 있어 학문적 가치에서도 뒤지지 않는다. 특히 독립운동가 조동호가 기독교인으로서 어려울 때 신앙에 어떻게 의지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는가를 밝힌 부분은 아주 새롭고도 흥미로운 영역이다.

이 책을 출간하고 바로 전국의 대학과 고등학교 도서관에 적지 않은 양의 도서를 기증하였다고 하니 학자로서 쓰는 작업뿐만 아니라 연구 결과를 대중화하는 점에서도 실천적 모범을 보였다고 생각한다.

자기와 직접 관련이 없는 것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현대인들의 초상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땅에 발 붙이고 사는 이상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어떻게 유지 발전되어 왔는지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들을 아는 일은 나와 직접 관련 있는 일일 것이다.

유정 조동호 선생도 일제시대 국내외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의 일념으로 활동한 분이다. 특히 독립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이데올로기도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융통성 있는 운동가였다. 따라서 유정도 오늘날 우리 나라를 있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한 독립운동가 중 한 분이다. 이런 분을 쉬운 문체와 글로 소개한 이 책은 역사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뜻 있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나의 마음도 그래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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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2007-09-16 0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사인 제가 충북 옥천에서 목회할 때, 그곳 출신 독립운동가 유정 조동호 선생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9월 11일 유정의 53주기 추모제전이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있었는데, 이런 인연으로 인하여 제가 그 행사 기도 순서를 맡았었습니다. 뒤이어 <조동호 평전> 출판 기념 포럼이 있었는데, 이 글은 거기 참석하고 느낀 소감문입니다. 참고해서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분단과 민족 - 사회와사상 10
송건호 / 지식산업사 / 198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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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권의 책을 준비해서 이번 추석에 고향길에 올랐다. 추석 연휴 동안 독서삼매에 빠지고 싶어서이다. 얼마 전 지은이가 직접 보내준 <분단 조국과 함께 태어나>(이 윤 지음)도 연휴 기간 볼 책들에 당연히 포함되었다. 이 책의 지은이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분이다. 신문에 쓴 서로의 글들을 통해 알게 된 사이이다.

내가 받는 책 선물에는 하나의 의무가 수반된다. 책을 정독하는 것이다. 뒤에 선물한 사람과 만날 기회가 있을 때, 그 책을 매개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이다. 지은이가 직접 보내온 책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책을 통해 한 사람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윤 선생은 옥천 출신으로 평교사 35년의 생활을 마감하면서 기념으로 이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책의 부제도 “-교사인 것이 부끄럽다”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부끄러움 투성이의 우리 교육계이지만 부끄럽지 않은 교사로 일관해온 그의 발자취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한 사람이 평생 지조를 바꾸지 않고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이데올로기의 편향과 진리의 전도 현상이 극심했던 나라에서는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자유와 진리와 양심 수호라는 초지를 교단에서 끝까지 지켜온 그의 노력이 이 책에 오롯이 녹아 있어 감동을 준다.

내 주위에도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후배들이 많이 있다. 서슬 퍼렇던 군사독재 정권 하의 노동 현장에서, 철조망으로 가로막혀 있는 통일의 장벽에서, 그리고 빈민운동과 농촌운동, 학생운동의 소용돌이 현장에서 몸 던져 헌신한 지기들이 있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지금도 개인의 출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지향하며 우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 반대쪽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마음이 편치 않다. 마치 사회운동을 했던 경험이 정치판에 뛰어드는 징검다리라도 되는 듯이 생각하는 사람들, 이념의 양극단을 들락날락하며 각 영역에서 홍위병 역할을 하는 사람들, 진보적 학자인 척하다가 아무 변증도 없이 골보수의 붓대를 휘둘러대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의식과 인생관의 변화에는 많은 고민과 시간이 따르기 마련이다. 진보적인 사람이 보수화될 수 있고, 보수적 시각으로 살아온 사람이 나이 들어 진보적 삶의 철학을 가질 수도 있다. 또 환경의 변화가 그렇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의식의 최전선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던 사람들의 의식 전화에는 함께 했던 사람들의 암묵적 동의를 필요로 한다. 그런 자기 점검과 주위의 동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한 때 진보운동에 종사한 것을 큰 무기로 삼아 어느 날 갑자기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고자 하는 보수우익집단의 대변자연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사람들이 날뛰고 있는 가치 혼돈의 시대에 <분단 조국과 함께 태어나>의 저자 이 윤 선생의 삶이 그래서 우리에게 소중하게 다가온다. 분단 조국과 함께 태어나(2부) 시대의 아픔과 함께 하며(3부) 토로한 그의 고백(1부)에서 숨기지 않고 진실을 좇은 삶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격변하는 역사의 현장들에서 올곧게 행동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과거의 알량한 진보운동 경험을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헌신짝처럼 벗어 던져버리는 인사들에게 그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많은 부분에서 민주화가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OECD 가입국으로서 선진국의 문턱에 진입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국토는 분단되어 있고, 빈부 격차는 더욱 틈새가 벌어지고 있다. 한·미 FTA의 불평등 협정의 추진과 북핵을 중심으로 한 국제 역학관계가 한 치 앞 국가장래를 예측할 수 없도록 만든다. 거기에다 일제잔재 청산이라는 과거사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때 이념의 양 극단을 활보하며 이름을 덧칠해 대는 인사들의 처신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들의 행동이 흔히 말하는 이상에서 현실로의 전화가 아닌 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 행위가 아닌 개인의 이름만 추악하게 드러내는 경거망동의 훼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윤 선생은 그의 책에서 이 점을 시원하게 지적해주고 있다. 뜻있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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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2007-07-17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윤 선생이 지은 <분단 조국과 함께 태어나>(교육문화공간 향 출판)는 알라딘 서점을 아무리 뒤져봐도 찾지 못해, 나의 서재에 마이리뷰로 글을 올리기 위해 민족과 분단을 입력하니 송건호 선생의 <민족과 분단>이란 책이 떴습니다. 이 제목으로 글을 올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황순원 외 지음, 전병준 외 그림 / 동쪽나라(=한민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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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입니다. 괜히 날씨에 영향을 받아 기분까지 우중충한 시간의 연속입니다. 이럴 때 마음의 양식이 되는 책 한 권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무익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집 서재에 꽂혀있는 책 한 권이 생각 없이 손에 잡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동쪽나라, 1999)가 그 책입니다. 노오란 표지의 제목에 금빛까지 입힌 것이 인상적인 책입니다. 이 책에는 모두 9편의 동서양 단편 소설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습니다.

책의 제목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했는데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의 모음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감동을 주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지나온 시간들을 그리워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을 바쁘게 살다보면 어릴 때의 추억이 한 순간 마음을 순화시켜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우리의 아릿한 과거를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알퐁스 도데의 ‘별’에서 또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위더의 ‘플란더즈의 개’에서 순수와 순수가 만나 부딪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나이를 잊고 나를 소설 속의 주인공으로 등치시키니 읽는 재미가 더욱 배가되었습니다.

사실 여기에 실린 소설 몇 편은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것들입니다. ‘별’이 그렇고 ‘소나기’가 그러하며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며 나다니엘 호오돈의 ‘큰 바위 얼굴’도 교과서에서 읽었던 경험이 아련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와 닿는 감동은 그 때와 지금이 크게 다른 것은 웬 까닭일까요? 그것은 아마 순수한 감정의 비슷한 또래 입장과 돌이킬 수 없는 이끼 낀 삶의 연륜에서 오는 차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훌륭한 문학 작품은 시대와 지역을 뛰어 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자주 고전을 말하는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에 실린 단편들도 그러한 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 어른들은 지난날의 순수함을 반추해 봄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생각게 되고, 아이들의 세계를 좀 더 다가가서 이해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또 아이들-특히 초등학교 아이들에게는 잠시 인터넷 문화를 벗어나 소설 속의 무대인 대자연 속에서 자신들의 동심을 추슬러보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나아가 중고등학교에 가면 배우게 될 문학작품을 앞서 접하는 효과도 가져올 수 있어서 좋을 것입니다.

긴 장마철, 잠시 시간을 내서 학부모나 자녀들이 함께 읽고, 서로의 감동을 각자의 입장에서 나눠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지면을 빌려 ‘내가 읽은 책’으로 추천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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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세실 > 제제는 어떤 친구같아?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 논술 실력을 키워 주는 초등명작 14
바스콘 셀로스 지음, 김은선 옮김, 이선주 그림 / 깊은책속옹달샘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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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결혼하기 전 사람들이 '지금까지 읽은 책중에서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은' 하고 물어보면 주저하지 않고 이 책을 꼽았던 적이 있다. 이 책에서는 제제의 말썽꾸러기 같은 모습에 화를 내고, 구박을 하며, 악마가 들어있다는 말도 서슴치 않고 했지만 난 그나이 또래의 당연한 행동이라고 생각을 하며 제제의 순수함과, 포르투카 아저씨와의 아름다운 사랑과 죽음에 대해 , 밍기뉴와의 교감속에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제제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결혼을 하면서는 이책을 까맣게 잊어버렸고, 제제와 똑같은 나의 분신이 생겨나면서  나도 책속의 엄마, 아빠, 누나처럼 제제때문에 속상해 하고, 아주 가끔은 '엄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말도  해 버렸다.  아침에 얼른 세수 하고 나오라고 목욕탕으로 들여 보내면, 시간이 늦었음에도 둘이 장난치느라 시끄러운 소리에 내 신경은 곤두서서 소리를 지르고, 그러면 작은아이는 '엄마 바보'하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을 다시 읽고나니 그동안 내가 참을성 없는 똑같은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미안해진다.

착한 세실리아 선생님을 위해서 꽃집에서 몰래 꽃을 가져다가 선생님 꽃병에 꽂아드린 일, 아빠를 위해 구두닦이를 해서 담배 한갑을 사다 드린 제제, 친구들과 박쥐놀이를 하고, 빨랫줄을 끊어버린 제제...술에 취한 아저씨가 가르쳐준 '나는 발가벗은 여자가 좋아' 하는 노래를 부르다 아빠에게 많이 맞은 제제. 포르투카 아저씨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으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제제. 인간의 마음속엔 늘 선과 악이 존재하겠지. 하긴 제제는 자기가 한 일이 나쁜 짓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호기심에 했으리라.  이 책 한권에는 항상 모든 일에는 기쁨과 슬픔이 공존한다는 인생의 진리를 다시한번 깨닫게 해준다.

보림아 이 책 재미있었어? 네. 제제가 참 귀여워요. 저도 밍기뉴같은 말하는 나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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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박지향, 김일영, 이영훈 외 지음 / 책세상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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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주간 <교수신문>이 각 분야 전문 학자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광복 이후 학문적으로 가장 높은 영향력을 발휘한 저서는 어떤 책이라고 보는가?’가 질문 요지였다. 이 설문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하 <해전사>)이 6등을 차지했다.

  

1979년 말 1권이 발간된 후 1989년 6권으로 완간되기까지 10여년의 시공은 우리의 현대사에서 가장 큰 격동기에 해당한다. 유신 독재정권이 종말을 고했으며 뒤이어 들어선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이 사상과 양심 그리고 학문의 자유를 극도로 제약하던 시기였다. 이 때 <해전사> 6권이 순차적으로 발간된 것이다. 글을 쓴 사람들이나 출판사 모두에게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최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이라는 책으로 세상이 다소 시끄럽다. 현대사 연구에 물꼬를 틀었다고 평가되고 학문적 성과물로도 인정받고 있는 <해전사>를 비판하고 나섰다고 해서 세간에 집중 조명을 받은 탓인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내용이 너무 진부하다는 것이었다. 기존 보수 우파적 역사인식을 그대로 따온 데다 대부분 특별히 진전된 내용도 없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 아니라 재탕으로까지 여겨질 정도였다. 몇 가지 문제점만 지적하려고 한다.

  

먼저 필자들의 비전문성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해방전후사는 분명 역사이고 우리와 가까이 닿아있는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어야 하는데 참가 필자 중 한국 현대사를 연구한 사람이 극소수라는 사실이다. 이 책을 책임지고 엮었다는 편집위원들 중에도 우리의 해방전후사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것은 비전문가가 전문가에게 시비를 거는 것 같은 현상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전체 필자들 중 편집위원을 비롯한 몇 명이 책의 성격을 자의적으로 규정하고 선전하는 것도 문제이다. <재인식>은 기존에 발표되었던 논문들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해전사>를 일정한 틀에 근거해서 비판하는 것이 못된다. 어떤 논문은 오히려 <해전사>의 연구를 뒷받침해주는 것도 있다. 그런데 보수 우파적 역사관을 갖고 있는 편집위원 몇 사람이 자신들의 공격적인 글 속에 다른 논문들을 종속시켜 전체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각론으로 들어가면 더 세분화되겠지만, <재인식>은 크게 세 가지 논점에서 <해전사>를 비판하고 있다. <해전사>에 담긴 역사인식이 ‘민족지상주의’와 ‘민중혁명 필연론’, ‘좌파적 편향’에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다.  아전인수식 주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민족지상주의라는 것은 우리 민족만을 위해서 다른 민족을 희생시키고 이용하는 것일 텐데, <해전사>에 실린 글들은 외세에 휘둘리기만 해온 우리 민족이 다른 강대국과 동등하게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혁명 필연론에 대해서도 그들은 선입관을 갖고 있다. 체제를 비판하는 것을 무조건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기초한 민중혁명론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그들의 시야가 몹시 협소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국민이 잘못된 정권을 비판하고 바로 잡는 것은 민중혁명이 아니고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장기 독재 정권에 시달리던 국민이 기본적 인권과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추구해 나가는 것은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사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아닌가.

  

학문 연구는 진리를 찾아가는 지난한 노력의 과정이다. 우에 장점만 있을 수 없고, 좌에 단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좌우의 장점을 찾아 조화롭게 또 균형 있게 굴러가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 그런데 <재인식>은 <해전사>를 좌파적 편향의 역사 서술의 책으로 미리 상정해 놓고 군사독재 시절에나 위력을 발휘했을 반공 이데올로기 중심의 우편향적 시각으로 시비를 걸고 있다. 역사 연구에서의 ‘균형 잡기’와 ‘업그레이드(Upgrade)’라는 외피를 씌우고 말이다.

  

<재인식>에서 보여주고 있는 몇 개의 잘못된 인식을 지적하고 이 글을 마칠까 한다. 한국전쟁의 원인을 미소냉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스탈린의 세계 전략 결과로 <재인식>은 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동아시아에 대한 이해가 일천했던 7,80년대 구미 학계 일각에서는 주장했던 설이다. <해전사>는 이와는 달리 6.25전쟁이 내부의 권력투쟁과 항일 무장투쟁경험의 연장선 위에서 김일성이 선택했던 전쟁노선의 산물로 보고 있다. 전쟁의 원인을 김일성이 이니셔티브를 쥔 전쟁으로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고 있는 이 주장은 국내외 학계로부터 폭넓게 인정을 받고 있다.

  

일본군 성 피해 여성에 대한 인식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일본인 학자의 논문 형식을 빌리긴 했으나 종군 위안부 피해 책임을 조선 사회의 모순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위험한 시각이다. 그들을 고통과 희생으로 내몬 것은 조선 사회의 양성적 불평등, 가정 폭력 그리고 가부장적 문화도 주요 원인이며 조선인 업주에 의한 동원도 있었다고 본다. 이것은 일제가 자행한 구조적 횡포를 조선 내의 문제로 돌려서 개별화 파편화해 희석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자칫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아직 과거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일본 지도자들에게 면죄부를 안겨 줄 우려도 없지 않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도 대단히 왜곡되어 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전례를 많이 남긴 인물이다. 현대사 연구자들은 대체로 그를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한 부정적 인물로 자리매김해 왔다. 하지만 <재인식>은 이승만을 약소국 대한민국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한미방위조약 등을 최대한 활용한 마키아벨리스트이고, 미국으로부터 최대한의 달러를 얻어내 그것으로 경제자립화를 이루려 했다고 주장한다. 극단적으로  우경화된 시각의 한 편린에 다름 아니다.

  

조선어학회 활동에 대해서도 기왕의 입장과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조선어학회가 일제에 저항한 대표적 민족문화단체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재인식>은 이 단체를 조선총독부 정책에 협조했기 때문에 식민지 권력과 대립적인 관계로 설정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있다. 오히려 총독부의 전면적인 행정력은 조선어문통일을 정당화하는 실제적 권위의 근거가 되어 조선어학회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실증적인 논구가 더 수반되어야 하겠지만, 우리말을 매개로 간접적 항일을 한 문화운동 단체인 조선어학회를 직접적 항일운동(무장투쟁) 단체와 같은 선상에서 운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친일파의 문제도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한다. 예를 들어 친일파의 대명사격인 춘원 이광수를 ‘친일 민족주의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행위만 보지 말고 친일한 동기까지 고려하면 이렇게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언어의 유희에 다름 아니다. 즉 형용모순이다. 기본적으로 민족주의는 식민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일제를 용인하는 민족주의’, ‘친일적 민족주의’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재인식>의 필자들은 랑케식의 역사 독법에 근거해서 주장을 펴고 있다. 랑케의 역사관은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개인적인 견해나 해석이 가미되어서는 안 되며,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혀야 한다는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말한다. 실지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유물과 문헌(문자)인데 이것은 주로 지배 계층을 설명해 주는 좋은 소재들이다. 여기에 근거해서 역사를 있는 그대로 서술한다면 지배계층만의 역사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랑케의 역사 독법은 매력을 잃었다. 모든 사람의 역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현상이든 주어진 조건에 따라 보는 시각도 다를 수 있다.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하면서 토론하는 것은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서로 주장이 다를 때 정확한 논거를 찾아 치열하게 토론하는 모습은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재인식>은 <해전사>와 대립 구도를 만들어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 언짢다. 탈냉전의 흐름이 세계사의 주류로 자리 잡은 지도 한참 지났고, 남북 관계도 교류와 협력을 통한 상생 발전의 흐름이 대세가 되었다. 또 대통령을 북한 김정일 정권의 앞잡이라고 일간지에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내도 잡아가지 않을 만큼 민주주의도 성장했다. 이러할 때 <재인식>의 출판은 냉전시대의 잣대를  들고 나와 시대를 역류시켜 보겠다는 발버둥처럼 생각되어 보는 사람을 무척 안쓰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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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gu 2021-06-23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게 안쓰겠습니다. 우선 해뱡전후사의 인식을 쓴 백기완씨는 그럼 역사연구의 전문가입니까? 제대로 학교공부도 안한분인데.. 위의 글은 ˝해뱡전후사의 인식˝에 대해서도 똑같이 비판하는 방식으로 되돌려 드릴 수 있는 글에 불과합니다. 님의 글은 ˝내로남불˝이란거죠.

voyant 2024-01-2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약이 지나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