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
김연 지음 / 한겨레출판 / 199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생각해보면 책 속에 나오는 그들은 나와 다른 세대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기껏해야 나보다 열살 안팎으로 나이가 많을 것이고, 내 가까이에 없었을 뿐 우리 학번, 그 아래 학번 중에서도 분명히 운동권에 속하는 이들은 상당수 있을 것이므로. 그럼에도 "운동권 후일담"은 왜 이리 먼 얘기로 느껴지는지. 물론 나 자신이 한번도 그 속에 속해본 적이 없고, 모두들 거리로 나섰던 80년대 후반과는 달리 내가 학교를 다녔던 90년대 전반기만 되어도 마음만 먹으면 큰 어려움이나 갈등 없이 운동권과는 먼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겠지만.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를 분노하게 했던 것은 한때 끓어오르는 열정으로 자신을 내던졌던 그들이 변절하거나 때묻거나 도태되는 모습은 아니었다. 나는 "20대에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심장(heart)가 없고 30대에도 공산주의자인 사람은 두뇌(brain)가 없다"는 경구를 신봉하고 있는 사람이므로(하긴 그렇게 따지면 나는 심장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는 내내 나를 화나게 했던 것은 책 속의 남자들이었다. 작가가 의도한 바도 그것이었겠지만, 세상 전부를 구하고자 하는 소위 운동권 남자들이 막상 자신과 함께 사는 여자와 자신의 아이에게는 얼마나 가혹한지, 세상의 질서를 뒤바꾸겠다는 그들이 유교적 가부장적 질서만은 얼마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지, 하는 것. 

5년쯤 전 같았으면 책 속의 남자들을 뭉뚱그려 미워했겠지만(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었던 것도 어느 정도는 한국 남자들에 대한 기대치가 컸기 때문이었다 싶긴 하다. 이런 남자들 말고 좋은 남자들이 많을거야. 라는.), 지금 느낌으로는 차라리 철호에 대해서는 반감이 덜하다. 사랑이라는 순수한 동기로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 아이를 낳고 싶어하는 수민을 용인하지 않았다는 것이 철호의 잘못이라면 잘못인데, 두 가지 다 결혼 전에 수민이 알고 있었던 것인 만큼 합의한 내용에 대해서 철호를 나무랄 수는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철호같은 남자가 바람직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는 적어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일종의 순수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나를 그야말로 열받게 한 건 인실의 남편 영수였다. 당연한 듯이 아이를 낳고도, 아이를 부양하기 위해 필요한 행동은 전혀 하지 않고 아내가 육아와 돈벌기로 쩔쩔매는 걸 태연하게 바라보는 남자라니..결국 두 딸을 돌봐주는 건 인실의 친정이었는데도 오직 시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영수의 어머니가 인실을 대하는 당당하고 뻔뻔한 태도는 황당할 정도였고, 제일 기막혔던 건 두 아이가 딸이라는 이유로 인실에게 아들이 있어야 하니 아이를 더 낳으라고 강요하는 두 모자. 그 영수라는 인물이 노동자라는 전력을 명함삼아 정치권 주변을 맴돌면서 권력을 희구하는 인물이라는 묘사는 기막히게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결말에서 주인공은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는 홀로서기로, 여자들끼리의 자매애로 현실의 삭막함을 이겨내고자 한다. 가장 현실적인 결말인지도 모르겠고, 나라고 해도 그런 길을 택할 것 같기는 하다. 그렇지만 마음이 썩 흐뭇해지지는 않는 것은 왜인지. 그래도 결국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세상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인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