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의 이혼
사토 겐이치 지음, 이정환 옮김 / 열림원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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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왕비의 이혼>을 다 읽고 나서, 앙드레 모로아의 <프랑스사>를 펼쳤다. '...(샤를 8세는) 이미 루이 11세의 딸인 키가 작고 가무잡잡하게 생긴 잔 드 프랑스와 결혼하고 있었다. 교황 알렉산드르 6세의 아들 체사레 보르지아가 굉장한 금전과 토지를 증여받고 결혼 무효 절차를 주선했다. 이 결혼은 루이 11세가 강요한 것이었으므로 무효로 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개설서에는 무미건조하게 몇 줄 언급되었을 뿐이지만, 사토 겐이치의 소설을 읽다보면 잔 드 프랑스와 샤를 8세는 까마득한 중세 이전의 이름 몇 자가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생생한 인물로 다가온다. 내가 역사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다. 물론 그 캐릭터가 역사상의 진실에 얼마나 부합되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인물의 캐릭터를 가지고 진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꽤나 무익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저런 실존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소설의 설정은 무게를 갖지만, 소설적 재미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작가의 뜻대로 움직여주어야 할, 역사적 사실에 크게 얽매이지 않을 인물이 필요하다. 작가가 내세운 인물은 바로 뜻밖에 이혼재판을 맡게 된 변호사 '프랑수아 베트라스'.젊은 시절 잔 드 프랑스의 아버지인 루이 11세에 의해 학자로서의 미래를 잃고 연인과 헤어지게 되었던 그가 이혼재판에서 궁지에 몰리던 원수의 딸을 변호하게 되면서 소설은 본격적으로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독자 입장에서 잔 드 프랑스의 이혼 기록이 문서로 얼마나 보존되어 있는지, 따라서 재판의 세부사항이 얼마나 역사와 일치하는 것인지, 실제로 그 변호를 맡은 변호사의 이름이 프랑수아 베트라스였는지까지는 확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사토 겐이치라는 작가가 이런 설정을 기반으로 상당히 짜임새있고 생생한 드라마를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물론 프랑수아의 과거라던가 프랑수아와 잔 왕비와의 관계는 확실히 픽션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사'소설'인 것이니 그런 부분이 유감스럽지는 않다.

중세 파리 대학의 분위기, 캐논(Canon)법의 내용을 비롯한 법정의 모습, 당시의 국제관계와 사회상 등이 생기있게 묘사되어 있어서 어찌 보면 딱딱한 역사서를 읽는 것 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역사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이유다. 물론 그 기저에 깔려있는 것이 시대를 가로지르는 영원한 테마인 사랑과 결혼,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기 때문에 더 친근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생각했던(그리고 실망했던?) 것 중 하나는 한국에서 서양사를 다룬 연구서는 나올 수 있어도 서양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은 나오기 힘들 것 같다는 거였는데, 일본에서는 태연스럽게 이런 소설이 나오고 나오키상을 수상할 정도로 성공을 거둔 것을 보면 그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물론 이미 이전에 시오노 나나미라는 작가가 있었으니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이런 식의 책들이 많이 쓰여지는 것에 대해 일본인들의 유럽 선호가 과한 탓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일본의 유럽 연구가 상당한 저변을 가지고 있다고 부러워해야 할지. 그래도 책을 덮는 솔직한 심정은 부럽다, 쪽에 더 가까웠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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