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휘날리며 - Taegukgi
영화
평점 :
상영종료


0. 지난 토요일에 조조로 봤습니다.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보지 않으면 대화에 끼기 힘들 정도의 반열에 오른 영화가 되었더군요. 솔직히 둘 다 썩 취향은 아니나 굳이 안볼 정도도 아니라서 가서 봤는데..전체적으로는 상당히 좋았습니다만 중간중간의 잔혹함은 역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돈 주고 왜 이런 고문을 당하고 있나..하고 잠시 잠시 고민하면서 봤다는;;

1. 사실 저도 "거대 담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정치 쪽은..이야기해봐야 해답도 없고, 설사 해답 비슷한 걸 찾는다 해도 그걸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무 적다는 걸 알기 때문에(예. 저 비겁합니다).

그래도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가 불러일으킨 우리 정치와 역사에 대한 관심은 반갑더군요. 80년대 학번들이 제가 감당하기 힘들게 정치적이었다면 90년대 중반 이후 학번 아이들은 또 감당 안되게 무관심한 거 같았는데, 이런 식으로라도 현실이 늘 지금같지 않았다는 걸, 과거가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는 걸 한번 환기할 수 있는 건 다행이다, 싶어서요(쓰고보니 참 역사전공자스런 발언;;;).

2. 감상은 한마디로 하자면 전쟁은 절대, 절대, 절대 안돼. 라는 것. 세상의 주전론자들 데려다가 가둬놓고 골백번 틀어주고 싶은 영화였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건 도대체 뭣 때문에 전쟁을 하는 건지 원래도 이해 못했지만(그 전 예고편에서는 "트로이"를 보여주더군요. 나같으면 헬레네 따위 백명이라도 파리스에게 줘버리겠어요-_-;;;), 영화를 보고 나니 더더욱. 더 얘기하면 뤼시스트라타적 담론으로 갈 거 같아서 이정도로;;;;.

3. 전쟁은 안돼, 라는 것과는 별개로 전쟁터에서의 인간성, 이라는 문제도 생각하게 만든 건 진석(원빈)의 행동양식. 물론 그는 전장에서도 인간애를 잃지 않는 착한 인물이지만, 전쟁터에서 진석처럼 구는 건 어찌 보면 어리광이 아닐까요. 물론 그런 인간성을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게 전쟁이라는 것이 문제지만요.

그에 비해 진태(장동건)는 인간성을 버렸고, 처음에는 동생을 제대시키기 위해 시작한 행동이었다 해도 갈수록 전쟁의 화약 냄새 자체에 점차 미쳐갑니다. 그렇지만 전쟁터에서 필요한 건 역시 진태 같은 타입의 군인이겠지요. 전쟁은 없어야 하는 것이지만, 시작한 이상은 또 이겨야만 하는 것이니까요.

나중에 깃발부대 부대장이 된 진태를 보고 분위기에 안 어울리게 좀 웃었습니다. 그래, 넌 어느 군대건 군대에선 무조건 출세할 타입이었어..하구요.

4.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종로통, 구두닦이 형 진태, 우등생 동생 진석, 형이 동생 손에 쥐어주는 만년필, 자기는 이빨에 바람 들까봐 안먹는다며 동생에게만 사주는 아이스케키, 뛰어가서 전차를 잡아타는 두 형제의 웃음소리...눈부셨습니다. 곧 깨어질 평화란 원래 그렇게도 아름다운 것인지.

영어 제목이 "Brotherhood"가 될지도 모른다던데, 단순한 형제애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공부 잘 하는 동생에게 가족의 미래를 걸고, 자기는 편지 한 장 제대로 쓸 정도의 교육도 받지 못해도, 구두닦기로 하루 해가 저물어도, 동생 공부하는 뒷모습만 보면 흐뭇한 그 한국적인 정서가 외국인들에게도 얼마나 공감대를 불러 일으킬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태극기"중의 전쟁 묘사는 미국에서건 유럽에서건 먹혀들어갈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 부분은 개발 도상국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나라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안 될수도..

(사실 극중 진태는 그야말로 과하게 동생에게 올인, 입니다. 어머니도 약혼녀도 동생 뒷전이더군요. 두 꽃미남을 등장시켜서 일부러 그런 코드를 넣은 건지, 아니면 그저 절절하게 묘사하다보니 그리 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영화, 일본에서 히트하면 아마 팬픽 무지하게 쏟아져나오고 코미케에 태극기 부스 꽤나 늘어설 거 같습니다-_-;;;)

5. 이래저래 제일 불쌍한 건 영신(이은주). 전장에서 싸우는 남자들은 그나마 대의명분이라도 있지만, 명분없는 학살의 대상이 되는 여자와 아이들은 더 가엾습니다(..게다가 대부분의 전쟁에서 여자들은 철저하게 객체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죠. 이 얘기 하다 보니 2번에서 꾹 눌러 참았던 얘기가 또 나오려고 하는;;;). 그야말로 삿된 입으로 죽음 직전에도 영신을 철저하게 모욕하던 남자들에 대한 혐오가 너무 크고, 마지막까지 결백을 말하던 영신의 모습이 너무 마음 아팠습니다.

(그리고, 설사 영신이 정말 그랬다 해도 그녀를 단죄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적병을 미친 듯 사살하던 진태를 나무라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에게는 그것이 생존의 방식이었을 테니까요. 그것도 혼자만의 생존이 아닌 늙은 시어머니와 어린 동생 셋..모두 다섯 사람의 목숨이 달린 문제였는걸요.)

6. 장동건은 이제 거리낌 없이 연기파 배우라고 부를 수 있겠더군요. 나름대로 10년팬인지라, 기뻤습니다. 10년팬이라지만 한 거라곤 아무도 안보는 장동건 주연의 영화들(예컨대 "패자부활전"이라던가;;)을 영화관 가서 봐 주는게 다였는데, 그 영화를 보러 간다고 했을 때의 주변사람들 반응(...)을 생각하니 장동건이 그동안 얼마나 별로인 영화에 출연했었는지 알 것도 같네요-_-;;;

미남이라는 건 물론 굉장히 좋은 겁니다만, 장동건도 안정환도 연기 실력보다, 축구 실력보다 인물이 더 앞선다는 평가를 받아왔던 사람들인지라, 그래서 그 인물을 스스로 부담스러워 했던 사람들인지라 그들이 자기 분야에서 실력으로 최고에 오른 모습은 흐뭇하군요.

7. 중간에 좀 괴로운 장면들이 있고, 너무 어린 애들에게 보여주기엔 과하다는 생각은 들지만(초등학교 저학년들도 엄마랑 많이 왔더라구요) 결론은 극장에서 한번 봐 줘야 할 영화다 싶습니다. 토요일 조조에 중년 남자분들이 단체로 우르르 오신 걸 보니 그야말로 한국영화의 힘, 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저도 기대해보고 싶어질 정돕니다.

8. '태극기 휘날리며' 때문에 6.25에 대해 새삼 관심이 생기신 분이라면 박완서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제가 읽은 6.25 문학의 최고 절창입니다. 박완서씨 자신의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에 전쟁터의 묘사는 없지만, 6.25라는 전쟁을 당시의 일반인들이 어떻게 겪어내었는지가 그야말로 생생합니다. 모 책소개 프로 때문에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더 알려졌지만, 이 책도 전국민에게 읽히고 싶은 책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