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선셋 - Before Sunse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0. 영화를 보고 나서 수첩을 뒤졌다. 내가 '비포 선라이즈'를 봤던 날짜를 찾고 싶어서. 96년 4월 4일. 영화 속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8년 반이란 시간이 흘렀다.

1. 고백하자면, 내게 이 영화가 슬픈 가장 큰 이유는 영화 속의 두 주인공에게 여실히 나타나는 세월의 흐름 때문이었다. 늙어도 너무 늙었다. 그들 얼굴의 세월을 보면, 다음 수순으로 당연히 생각나는 건 그 세월 동안 나도 저만큼 늙은 거 아냐?라는 자각. 아, 끔찍해.

(두 배우가 나보다는 몇 살 더 먹었다던가, 확실히 나이들어 마르면 더 늙어보인다던가 하는 걸로 위안하고 싶은데, 어째 그게 더 처량맞게 느껴진다-_-;;)

2. 이 영화는 주인공들 얼굴의 세월 만큼이나, 너무 솔직하다. 20대와 30대의 차이를 저렇게 여실히 보여줘 버리다니. 용기있고 모험적이고 꿈많던 20대의 그들은 이제 삶에 지치고 따분해하고 불행해하는 30대로 바뀌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저걸 저렇게 노골적으로 보여줄 필요는 없잖아..라고 분개. 그러니 내가 영화 중간의 유람선 장면에서 잠시 졸아버린 건, 전날 새벽 다섯시까지 못 잔 탓도 있겠지만 30대의 그들 입에서 나오는 얘기가 너무 식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주변에서 자주 듣는 얘기를 영화관에서까지 듣고 싶진 않다구.

영화 속 80분이 그대로 현실의 80분이 되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확실히 다소는 지루하다. 그들이 돌아다니는 파리는 여전히 매력적이었지만.

3. 비엔나에서 그들이 나누었던 사랑은 누구나 다 부러워할 꿈같은 로맨스였지만, 그런 "Once in a Lifetime" 식의 경험이 남은 삶에 꼭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 조차 이 영화는 가감없이 드러낸다. 제시와 셀린느, 둘 다 과거를 잊지 못했고, 그래서 현실의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현재 그들의 상황을 보면, 차라리 그들이 반년 후 비엔나에서 다시 만났다면 어떤 식으로 마무리가 되었든 현실을 살아가기엔 더 나았을거다..라는 생각도 드니까.(사람 일 알 수 없는 거니 로맨틱에만 기대지 말고 연락처를 교환했어야 했다는 교훈을 30대가 된 그들도 실감하고 있는 듯도 하지만;;;)

물론 쉽게 말할 수 없는 문제이긴 하다. 그들이 나눈 대화만으로 현재 그들이 불행하다고 단정지어버리기도 어렵고, 특히 불행한 결혼생활에 대한 제시의 고백이 옛 연인을 만난 유부남의 상투적인 멘트가 아닌지 하는 의심도 지울 수 없긴 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거 자체가 내가 20대가 아니라 30대라는 걸 증명해 주는 거지만.

4. 9년전의 줄리 델피가 그렇게 꿈같이 아름답지 않았다는 걸 회상 장면을 보고야 깨달았다는 것이 신기했다. 에단 호크의 변한 모습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은터라(도대체 왜 그리도 망가진 건지..같이 본 후배 말 대로 우마서먼이랑 사는 게 힘들었나-_-), 줄리 델피의 나이든 모습은 상대적으로는 오히려 나아보이긴 했는데. 아, "죽은 시인의 사회" 시절의 에단 호크를 생각하면 세월은 정말이지 무상하다. 근데, 에단 호크가 데이빗 베컴이랑 많이 닮아보이는 건 내 눈에만 그런 걸까.

5. 단순히 외모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좀 더 어렸다면 30대의 그들이 내 눈에 아름답게 보였을까가 궁금하다. 동질감만 강하게 느껴졌을 뿐 그들에게 감탄해줄 수 없었다는 것이 슬펐다. 그들이 걸어다녔던 파리처럼, 나이들어도 여전히 쿨한 매력이 풍기는 모습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영화 자체는 나쁘지 않았고, 꼭 봐야 할 영화였지만 여러 모로 이 영화는 내게 서글프게 남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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