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영화
평점 :
상영종료


0. 축구팬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이겠지만, 요즘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정말 이 영화만은 꼭 보고 싶었다. 정확하게는, "꼭 봐줘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사회도 상당히 많이 했던 모양인데 시사회 신청에도 신경을 안 쓴건 꼭 돈을 내고 봐줘야겠다,싶은 영화였으니까. 말하자면 이 영화는 내게 홍명보 자선경기라던가, 수원의 연간회원권처럼 내가 내 돈을 기꺼이 보태주고 싶은 영화였던 거다.  

1. 재미있었냐고 한다면, 뭔가 새로운 내용에 어머어머, 하면서 재밌었던 부분은 내 입장에선 없다-_-;; 영화에 나오는 내용 중에서 모르는 내용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작년 인천의 돌풍도 잘 기억하고 있지만 난 심지어 "파란-공포의 외룡구단"이라는 영화와 같은 컨텐츠의 책까지 사서 몇 달 전에 다 읽어치운 참이었다. 게다가 어지간한 기사도 다 읽었으니 그야말로 스포일러 만땅인 상태로 가서 다 아는 내용을 영상으로 확인만 한 것.  

2. 그런데도 나는 중간중간 목이 메었고, 눈물이 솟았고, 가슴이 찡했다. 인천의 팬도 아닌데, 물론 리그팀들 중에 호감이 있는 팀이긴 하지만 내게는 인천과 그라운드에서 종종 맞붙는 훨씬 더 소중한 내 팀이 따로 있는데도 그랬다. 그랬으니 아마 인천의 팬이었다면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울었겠지. 아니, 이렇게 확고한 내 팀이 생기기 전의 그냥 리그팬인 상태였더라도 훨씬 더 영화 속의 인천에 감정이입했을거다. 물론 그랬다면 또 영화 속의 인천에 내 팀을 대입하면서 들었던 감정은 또 느끼지 못했을 것 같지만. 

3. 대부분 실패한 적이 있는, 바닥까지 떨어져 본 적이 있는 감독과 선수들, 창단 첫해, 늘 지기만 했던 인천이 2005년 시즌에 장외룡 감독이 세운 목표를 그대로 이루면서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하고, 결국 마지막에 울산에 무릎꿇긴 하지만 준우승 트로피를 쥐기까지..영화는 그 과정을 차분하게 따라간다. 몇 줄의 스토리만으로도 꽤나 드라마틱한 이 이야기를 가감없이 그려낸다. 

카메라가 따라가는 그라운드, 연습장, 숙소, 라커룸....축구팬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했지만 쉽게 보지 못한 풍경이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꽤 즐거웠다. 

4. 물론 아쉬운 점은 있다. 일단, 개인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조금은 외피만을 흩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아쉬움이다. 주인공급이라 할 수 있는 장외룡 감독이나 임중용 주장의 경우에도 조금 더 개인적으로 깊게 접근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느낌이 남는다.  


책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시간적 순서에 따른 차분한 진행이 아니라 편집에서 시간이 앞뒤가 섞이면서 생겼던 산만함은 조금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화면으로 보아도 마찬가지다. 인위적인 감동은 포기하고 철저한 다큐멘터리를 지향했다면, 배치 역시 철저히 시간 상의 순서에 따르는 것이 옳다. 

빠듯한 예산으로 찍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찍지 못한 탓인가, 하는 짐작은 가지만, 이스탄불 공항에서 전지훈련 장소로 가는 저가 비행기의 과한 연착으로 널부러져 있는 선수들을 보여주고 이어지는 나레이션상으론 전지훈련 장소 같은 다음 훈련 장면이 뜬금없이 다시 인천 문학구장으로 돌아오는 식의 편집은 실수인지 아니면 보는 사람이 모르고 넘어가주길 바란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물론 일반관객이라면 모를 확률이 더 높지만,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 중에는 나같은 리그팬의 비중이 상당히 높을 것 같으니 말이다.  

금전적인 문제와 다른 사정으로 개봉이 늦춰진 것은 알지만, 사실 이 영화는 올 초 쯤에 개봉되어야 했을 영화다. 그런데 오히려 올 한해 더 추가 작업을 하면서 시간상의 문제는 더 두드러졌다. 영화가 시작될 때 나오는 수원과 인천의 경기는 작년이 아니라 올해 3월의 경기다. 올해 수원으로 이적해 그 장면에서는 수원의 유니폼을 입고 죽어라 악역으로 뛰어다니는 이정수는 영화 뒷부분으로 가면 다시 인천의 유니폼을 입고 뛰고 있다-_-;;;;; 편집과정에서 '축구' 다큐멘터리라는 부분을 살리기 위해서 경기 장면을 더 추가하기로 한 건가 싶기도 하지만, 가뜩이나 저예산 영화에, 듣기로는 그 장면을 찍느라 예산의 많은 부분이 소모되었다는 시간상의 혼동만 추가하는 저런 식의 인트로가 과연 필요했을까. 

(혹시라도 '축구' 영화에는 국가대표선수가 나와야 한다는 누군가의 생각으로 상대팀의 김남일 송종국 이운재를 화면에 비춤으로써 일단 기선제압을 할 의도였다면....그야말로 안습이고;;;; 뭐 나야 사랑하는 우리 선수들 봐서 좋긴 했지만 영화 전체의 구성으로 보면 영....)  

5. 그렇게 아쉬움은 남지만, 이 영화의 미덕은 그렇게 서툴되 기본적으로 정직하다는 것이다. 감동을 짜내기 위해서 억지로 장치를 만들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열심히 인천이라는 팀을 따라다녔다는 것, 그라운드를 뛰는 선수들이, 그 뒤에 서있는 감독과 스탭과 구단 직원들이, 땀흘리고, 뛰고, 때로는 상대와 때로는 자신과 싸우고, 이기고, 때로는 지고, 기뻐하고, 눈물 흘리는 그 모든 과정을 다 담으려고 노력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축구팬으로서 이 영화가 많이 고맙다. 많이 박수쳐주고 싶다.  

6. 연휴 직전 금요일 오후 8시 50분, 확대개봉을 했다고 하는데 종로의 필름포럼에서 나와 같이 이 영화를 본 사람은 모두 11명이었다. 그 중에 남자는 단 한 명, 누가 여자들이 축구를 싫어한다고 했는지가 새삼 궁금해졌다. 그리고 아마도 리그팬일 확률이 높을, 함께 본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은 어느 팀을 응원하세요?라고 물어보고도 싶었다. 

극장을 나서는데, 관객 중 유일한 남자였던 이가 동행한 여자에게 하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런데 영화를 보니까 더 마음이 아프다. 저기 나온 애들, 올해 대부분 다른 팀으로 이적할 거 같아서. 우리가 돈이 없으니까." 

...인천팬이었나보다. 새삼 짠해졌다.  

7. 리그의 모든 팀이 인천처럼 눈물겹거나 힘든 것은 아니지만, 또 그렇지 않기 때문에 각 팀만이 떠안아야 하는 어려움도 분명 있기 마련이다. 내 팀은 인천처럼 연습장을 찾아 떠돌거나 돈 때문에 팀의 핵심선수를 팔아야 하는 일은 겪지 않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의 인천처럼 준우승 컵을 들고 환하게 웃지는 못한다. 한 번의 승리로 칭찬받고 흐뭇해 하지도 못한다. 사치스럽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늘, 당연히 이기기를, 1위를 차지하기를 모든 이가 기대하는 그것도 선수들에게, 감독에게, 그 팀을 지지하는 나같은 이들에게는 또 분명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내가 이번 시즌에 뼈저리게 느낀 것이 바로 그런 점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차이가 있다 해도, 그라운드에 들어서면 모두가 같아진다는 것, 연봉이 얼마건, 가슴에 태극기를 달아보았건 아니건, 오직 공과 그라운드와 상대와 나만으로 승부할 수 있다는 것이 또 축구의 매력인 것이다. 그리고 그 매력을 십분 보여준 것이 영화 속의 인천이었고.  

축구를 사랑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영화 속 인천이 내 팀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인천과 그라운드에서 맞붙는 다른 팀을 응원하고 있다면 영화 속의 인천의 자리에 자연스럽게 그 팀을 대입하면서..'비상'은 그렇게 볼 수 있는 영화다. 영화 마지막의, "이 영화를 K리그의 모든 선수와 관계자와 팬들에게 바친다"는 바로 그 자막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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