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포터 - Miss Pott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0. 나는 다소 시대물 홀릭에 유럽홀릭, 특히 영국홀릭이라 빅토리아조의 영국, 게다가 레이크 디스트릭트가 배경으로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스토리가 엉망으로 칙칙하지만 않다면 어느 영화건 시간과 돈을 기꺼이 투자해줄 생각이 있다. 근데 스토리마저 베아트릭스 포터의 이야기라니!! 게다가 르네 즐위거와 이완 맥그리거라는 완소까지는 아니라 해도 나쁘지 않은 조합. 이건 어떻게든 보러가야겠다 하고 별렀던 영화였다.  

그리고 보는 내내 정말로 즐거웠다. 중간의 슬픈 장면에도 불구하고 내내 미소를 띄고 봤고, 나와 취향 비슷한 동행도 마찬가지.

1. 베아트릭스 포터에 대해서는 매우 좋아하는 영국문학기행문('김인성의 영국문학기행')에서 그녀의 대략적인 인생 스토리와 레이크 디스트릭트와 그녀가 어떤 관계인지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난 노만의 죽음이 별로 쇼크가 아니었는데 대부분의 관객에게는 그 부분이 매우 쇼크였던 모양(미리 본 친구 모양은 '반전'이라고까지 절규를;;;). 근데 스토리를 알고 간다고 영화 재미가 떨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어차피 전기물이라는 건 아무리 드라마적 재미를 위해서라도 실제 일어났던 사실에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는 거고, 이 영화의 재미는 큰 스토리라인이 아니라 그 스토리가 어떻게 아기자기하게 풀려나가는지, 그리고 어떤 배경에서 어떤 그림으로 나타나는지니까. 

2. 영화 전체로 볼 때 내게 더 인상적이었던 건, 베아트릭스와 노만의 사랑 얘기보다도 스스로 그리고 쓴 그림과 글을 통해 "자기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 베아트릭스 포터라는 한 여자의 자아실현 욕구 쪽이었다. 오늘날로선 당연하고 별 거 아니지만 가정 밖의 여성을 상상할 수 없었던 엄격한 빅토리아 시대에, 그것도 자기 스스로 빵을 벌어야 하는 계급 출신이 아니라(하긴 그 시대엔 그런 계급이면 일단 교육의 혜택을 받기 어려워서 자아실현이 불가능했을거다;;) 여자는 레이스와 보석으로 아름답게 차리고 돈많고 집안좋은 남편을 만나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 믿는 귀족 바로 아래 상류계층이었던 집안에서 저런 욕구를 가졌던 그녀가 부모 및 주변과 얼마나 부딪혀야 했을지는 굳이 영화를 통하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사실은 꽤나 싱크로가 되어서 더 와닿았을지도-_-). 

그렇기 때문에 작가로서 그녀의 성공이 어찌나 내 일처럼 흐뭇하고 기쁘던지. 자신의 재능으로 돈을 벌어서 온전히 자기 힘으로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언제건 누구건 자랑스러워할만한 일이지만, 그 시대의 여자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내가 그린 그림,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그걸로 돈이 벌린다는 건 내가 낸 가게에서 물건이 불티나게 팔린다, 는 것보단 역시 좀 특별하지 않은가. 

3. 그렇게 보면 노만과의 로맨스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원하는 그 소위 좋은 집안의 신랑감들을 모두 거부했던 베아트릭스가 노만과 사랑에 빠졌던 것은, 노만이 다른 사람들처럼 부유한 포터 집안의 좋은 신붓감 베아트릭스로 그녀를 보았던 것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그녀의 재능을 인정하고 그녀를 한 인간으로 동등하게 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노만이 그녀와 토끼 피터 래빗, 오리 제미마 퍼들 덕 같은 그녀가 만들어낸 세계를 존중해주는, 그녀를 이해해주는 사람이라는 점은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데 큰 이유였을 것이다. 베아트릭스가 장사꾼을 사위로 삼을 수 없다는(아니 물론 책도 상품이긴 하지만, 출판업자를 장사꾼이라고 하니까 좀 그렇긴 하더라;;)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하겠다고 주장할 정도로. 

그렇지만 사실 이 로맨스도 참으로 빅토리아적이긴 하다. 로맨스 장면 1,2,3이라고 하면 찻집에서 노만이 앞으로도 계속 만나고 싶다고 하는 장면과, 크리스마스 파티에서의 청혼 장면, 기차역에서의 이별 장면 정도인데..사실 찻집에서의 장면은 "앞으로도 우리 같이 계속 책을 만듭시다"였으니 연인이라기보단 작가와 출판업자 사이의 관계에 더 가까웠고, 청혼 장면은 "When you taught me how to dance"가 흐르면서(짧게 나오지만 이완 맥그리거의 노래솜씨 여전히 근사하다ㅠ.ㅠ) 함께 춤추는 장면도 나오고, 무지 낭만적이긴 하지만 여전히 서로를 "미스 포터" "미스터 원"이라고 부르면서 청혼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너무 빅토리아식 로맨스의 극치...(아니 난 그게 전혀 싫지 않았지만 요즘 기준으로 보면..이라는 거다^^). 

요새 기준으로 로맨스스러웠던 장면은 부모의 반대로 여름을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보내기 위해 떠나는 베아트릭스를 노먼이 배웅나온 기차역에서의 그 이별씬이었는데, 이 영화의 유일한 러브씬..이기도 하다. 그래봐야 아주 초건전 키스씬이지만^^. 반지를 건네주면서 서로를 겨우 노먼, 베아트릭스라 부르게 된 연인들의 빗속에서의 첫 키스씬은 이어질 비극을 예감하는 입장에서는 더 아련해보였다(여기서 갑자기 '당신은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만을 남기고'라는 싯귀가 생각나더라는;;). 

아, 그리고 서로 런던과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떨어져 있으면서 주고받는 그 러브레터. 목소리로만 나오지만 서로에게 써보내는 그 글귀들이 어찌나 은은하면서도 달콤하고 로맨틱하던지. 오늘날 우리 대부분이 평생 그런 식의 러브레터를 주고받지 못한다는 게 정말 슬픈 일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4. 영화상으로는 노먼이 생뚱맞을 정도로(;;) 갑자기 죽은 후의 전개에서 제일 마음아팠던 것은, 부모의 반대로 노만의 가족에게도 그 약혼을 알리지 못했던지라 베아트릭스가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한다는 부분과, 그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그녀가 택한 방식이 미친 듯 그림을 그려대는 것이었다는 장면..왠지 베아트릭스의 심정이 아플만큼 이해가 되어서 굉장히 짠했다. 

5. 그렇지만 베아트릭스가 꿋꿋하게 슬픔을 이겨내는 장면 역시 좋았다. 인세로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힐탑 농장을 사고, 그 주변 어렸을 적 뛰놀던 자연이 개발로 점점 망가지는 것을 참지 못해서 인세로 벌어들이는 돈을 모두 주변 농장을 사서 그대로 유지하는데 투자하는 모습은 저거야말로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쁘게 번 돈도 아니고, 어린이들의 꿈을 키워주는 동화책을 팔아서 번 인세(실제로는 인세도 인세지만 그녀의 토끼와 다람쥐들이 소위 '캐릭터 상품'이 되면서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집에도 피터래빗 냄비꽂이, 피터래빗 지우개가 있는 걸 보면 납득이 가는 얘기..)로 자연보존을 위해 땅을 사서 그걸 결국은 공공재단에 기부하다니!!(그녀가 사들인 땅이 500만평에 달했고 그 모두가 그녀 사후에는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부되었다). 이건 정말 이상적이라도 너무 과할 정도로 이상적이다. 그리고 그녀가 그런 활동을 함께 했던 지역 변호사와 40대 후반에 결혼했고, 80에 가깝게 장수했다는 것 역시 흐뭇한 후일담이다. 

6. 영화에서 정말 좋았던 연출은 베아트릭스가 그린 동물삽화들이 순간순간 종이 위에서 살아서 움직이면서 베아트릭스와 교감하는 장면. 영화 전체에 딱 적절하게 동화같은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좀 아쉬웠던 건 한국어 자막. 큰 오역은 없었던 것 같지만 글자수가 한정된 탓인지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다 담아내지 못하고 중간중간 잘라먹는 경향이 있다고 느꼈고.  

7. 개발이 대세이던 시절, 보존의 가치를 안 베아트릭스 포터는 오늘날 레이크 디스트릭트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 지역이 관광지로 각광받으면서 생긴 부가가치는 제쳐놓더라도,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 아름다운 자연이 그대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고마워할만 하다(내가 다 고마우니 영국인들은 몇 배로;;;). 

어떤 삶이 조화롭고 가치있는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굳이 이런 전기성에 기대지 않아도 '미스포터'는 그 자체로도 꽤 매력있는 소품이다. 물론 취향에 따라 평가가 꽤나 좌우되겠지만, 나는 정말로 좋았으니까. 이런 영화, 좀 많이 나와주면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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