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도
행크 헤네그라프 지음, 마영례 옮김 / 두란노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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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년전 ‘야베스의 기도’라는 작은 책이 엄청나게 붐을 일으켰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 생각했던 것은 성경의 수많은 기도의 사람들의 기도가 아닌 “왜 야베스인가?” 생각했었던 적이 있었다. 몇 번이 그 본문을 읽었지만 그 본문에서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이었다. 아브라함의 소돔성을 향한 중보의 기도나 모세의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분노 사이에서 하는 중보, 이스라엘의 타락 앞에서 무력하게 지도자의 자리에서 물러나며 하는 사무엘의 기도, 다윗과 솔로몬의 기도, 죽음 앞에서 하나님께 구하는 히스기야의 기도, 수많은 선지자들의 기도 등 성경에서 주목할만한 이들이 한 기도의 보고인데도 그 작은 두절짜리 개별적인 삶의 기록은 전혀 없는 족보 사이에 끼어있는 한 인물의 기도가 주는 의미가 뭐였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 ‘야베스의 기도’를 읽으면서 저자의 상상력이 정말 많이 발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해석의 작위성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그렇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꼭 그렇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너무 검증이 부족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책이 기도가 간구의 형태이고. 그 간구에 의한 하나님의 응답임을 가르쳐 주는 부분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몇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적용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기도에 대한 갈망함을 일으켜주는 책이라는 것에 대해서 수긍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이 ‘야베스의 기도’를 번역했던 역자(마영례)가 ‘야베스의 기도’와 상이한 관점에서 ‘야베스의 기도’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비교하며 쓴 ‘예수님의 기도’라는 책을 번역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 역자에게서 번역된 다른 책을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이 책, ‘예수님의 기도’는 그러한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책을 시작한다. 즉 ‘야베스의 기도’에서 부족했던 부분에 대해서 지적하며 시작한다는 것이다. ‘야베스의 기도’가 초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일반 베스트셀러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던 것에 말하며, 이것이 현대인의 기도에 대한 영적인 필요를 반증하는 것이라면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책은 ‘야베스의 기도’의 기도에서 빠져 있던 부분인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곧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측면으로 기도에 대해서 설명해 나가고 있다. 야베스의 기도가 갖고 있는 독창적인 발상과 저자의 상상력을 동원한 해석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이 인물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의 모델이나 기본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예수님께 기도에 대해서 물어보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하며 글을 시작한다.


저자는 베드로의 기도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예수님에게서 예수님의 기도 즉 우리가 거의 매주 주문처럼 외고 있는 ‘주기도’를 배우는 것의 중요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신약의 사도들의 기도와 그들의 사역의 모습과 사역의 결과를 봤을 때, 그들이 배운 이 기도의 의미와 능력이 얼마나 정확하고 큰가에 대해서 증거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기도하는 방법이나 결과보다는 기도하는 자세 즉 왜 ? 무엇을 위해 ? 누구에게 ? 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내용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하나하나 설명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 작은 ‘주기도문’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자 했을 내용들에 대해서 각론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기도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전체 글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그의 가장 기본적인 명제는 기도가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내 뜻대로 움직이는데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의 우리의 열망들이 모두 성취된다면 생겨날 엄청난 재앙들에 대해 생각하라고 한다. 부족한 인간의 이성과 논리 그리고 욕심이 가득한 인간의 기도가 모두 성취된다면 생겨날 수많은 위기에 대해서 생각하라는 것이다.


진정한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과 교제’라는 것이다. 바른 목적이 바른 행동의 근거가 되는 것과 같이 기도 역시 기도의 목적에 대한 바른 목적에서 시작되는 것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도에 대한 결론으로 ‘기도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지속적을 유지해 나갈 수 있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기도가 선하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기도처럼 나의 원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기도) 이루어진 후, 응답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면 자녀 된 우리로서는 그 자체가 축복된 삶이라는 말하며 책의 결론을 맺고 있다.


이 책은 기도에 대한 개론서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에서 계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야베스의 기도가 ‘간구와 응답’이라는 부분의 기도의 ‘각론’을 설명하고 적용하는 책이라면 이 ‘예수님의 기도’는 기도 전체의 목적과 원칙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야베스의 기도’에 각 장마다 포함되어 있는 윌킨스 목사 자신의 여러 가지 기도응답과 삶의 경험들과 같은 실천의 영역에 대해서 이 책 ‘예수님의 기도’는 거의 없다고 할만큼 부족하다. 개론서답게 그러한 개인적인 경험의 부분을 과감하게 삭제한 것 같은데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 말하는 기도의 목적을 가지고 기도한 결과에 대한 눈에 보이는 결과들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논의들에 대해 사변적이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이 책의 아쉬운 부분은 필요 이상으로 ‘야베스의 기도’를 의식해서 책의 논점을 흐리는 듯한 부분이 있다는 것과 삶의 적용을 위한 방법론적 차원에서 접근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의 기본과 원칙을 알려주는 책으로 또한 ‘주기도문’에 대해 깊이 이해하기 원하는 이들에게 기도에 대한 ‘기도입문서’로서 꼭 한번쯤을 읽혀졌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이 책이 결국‘기도하는 사람’을 만드는데 쓰여졌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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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하나님의 친구
헨리블랙가비 지음 / 요단출판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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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중요한 것은 아브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브람과 동행하셨는가였다. 다시 말하지만, 그 관계는 목자 되신 그분과 양들의 관계와 같다. 양들은 그들이 목자에게 어떻게 순종했는가가 아니라 목자의 성실하심의 결과로 빚어진다. 양들이 목자를 따르기로 결정해야겠지만, 양들은 ‘푸른 초장에 누이고’ 안전과 쉼과 평안을 주는 것은 목자이다. 양들을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며 생명수를 공급할 사람은 목자이다. ” (p95)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 ! 그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나의 친구 아브라함”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그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우정을 보며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의 믿음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깊은 감동을 받고는 한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신실함을 물론이거니와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단과 그 믿음으로 걸었던 길은, 몇 가지 아브라함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믿음의 발자취로 기억되며 우리고 하여금 감동을 자아내고는 한다.

  만약 저자가 그러한 내용을 기록하는 책으로 이 책을 썼다면 이 책은 수많은 이 부분을 설교하는 다른 책들과 그리 다르지 않는 책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책의 중요한 차이는 그러한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친구’라는 특별한 관계가 의미하는 것이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관계의 모델로 제시되었다는 것에 있다. 즉 우리도 아브라함과 동일한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택정하심과 아브라함의 순종과 믿음의 동행, 어려움 가운데 순종하기, 실패 가운데 일어서는 그 모습들 그리고 마지막 약속의 성취를 보게 하는 그 특별해 보이는 과정이, 바로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우정의 모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긍극적으로 우리의 삶 역시 아브라함과 같은 ‘하나님의 친구’로서 살아갈 수 있으며, 그것의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설득력 있게 말하고 있다.


  이 책은 5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미 영원 전에 선택하셔서 준비하고 계셨으며 하나님의 때에 우정이라는 관계를 시작하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2부에서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극적인 만남과 첫 번째 언약의 관계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을 보이고 있다. 1부와 2부를 통해서 이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방법과 우리가 하나님과 만났던 순간이 얼마나 유사한지 저자는 그의 삶의 경험과 역사 속의 신앙인을 통해서 보이고 있는데, 읽는 독자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삶 가운데 있었던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첫 만남을 상기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3부와 4부에서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길을 걷기 시작하게 된 아브라함에게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동행’이 주는 어려움과 그것의 유익을 그려 보이고 있고, 그 과정 안에서 아브라함의 실패와 그 실패의 자리에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성경의 순서대로 진행되는 이 아브라함의 동행의 삶의 여정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점점 더 강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숙되어져 가는 과정도 함께 볼 수 있게 된다. 저자는 이 3부와 4부를 통해서 ‘성숙의 과정’을 보여주며 동일한 도전을 우리에게 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성숙처럼 우리도 성숙의 과정 가운데 서 있는가 ? 그렇다면 그 성과들을 보이고 있는가 ? 저자가 최초 이 글을 준비할 때, 이 글의 대상이 목회자였다고 밝혔던 서두를 생각하며 이 계속되는 도전 속에서 ‘사역을 통해서 성숙되어져 가는 내가 있는가?’를 묻는 저자의 질문 앞에 서는 것 같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동행을 통해서 계속 성숙해 갔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면 성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너는 이전보다 더 성숙 했는가 ?”

  5부에서는 모든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모든 언약의 성취를 보게 되며 아브라함의 완성된 친구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으로 통해서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4)말씀을 주해함으로 이 책 전체의 내용을 요약해서 질문하고 있다. 그리고 위의 질문을 통해서 ‘책을 읽고 있는 독자’가 진정 ‘하나님의 친구’인가의 문제를 묻고 있다.


  이 책은 창세기에 나와 있는 아브라함의 생애에 대해 시간적 순서에 따라, 누군가에게 이야기 하듯 쓰여진 이야기 글이다.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에 대해서 하나하나 이야기해 주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듯 쉽게 읽혀지고 적용되어진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가운데 발견하게 되는 아브라함의 삶이 결코 아브라함만의 삶이 아닌 모든 하나님을 믿고 있는 자, 특히 나의 삶 가운데 드러나야 하는 당연한 삶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이 이야기는 더 이상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아브라함의 위대한 결정들이 바로 내가 해야 하는 결정의 모델이며, 아브라함의 실패가 내가 할 수 있는 실패의 표본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책의 제목인 하나님께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말하는 그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서도 ‘친구’로 부르시기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듣게 된다.


  ‘친구’,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서로의 필요를 알고, 이야기하며, 요구하기도 하고, 요청하기도 하고, 서로 놀기도 하는 특별한 모습이 친구의 그것이며, 그러한 친밀함이 나에게도 요구되어짐을 보면서 놀라고 감격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주 특별한 친구가 되어주시겠다고 글을 읽는 동안 계속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분과 함께 인생의 여정을 걸으며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역시 내가 그분과 함께 걸으며 만들어낼 아름다운 그림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친구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지금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의 특별한 친구와 함께 하는 삶이 평범할 수 없으며, 수많은 특별한 이야기로 가득 찰 것들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내가 걸음을 떼기 시작한 이 순간이 그러한 에피소드의 시작이 될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 ! 내 사랑하는 친구, 나의 인생길을 혼자 걷게 하시지 않을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내가 혼자 걷지 않음으로 내가 당신의 손을 붙들고 있는 동안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을 확신합니다. 내가 순간 당신의 손을 놓고 나의 좋은 길로 발을 움직일지라도 나를 포기하지 마시고 나의 놓은 손을 더 강하게 붙들어 당신의 길을 끝까지 걷도록 도와주십시오. 내가 마지막 걸을 때는 곳이 당신과 함께 살수 있는 당신의 집이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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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누리는 예배 믿음의 글들 197
송인규 지음 / 홍성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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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하나의 종교가 그 신봉자들 사이에서 얼마나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두 가지 기준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의식(儀式) 중심의 활동에 관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일상생활에서 자기 종교의 가치관을 얼마나 살아 내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만일 이 두 가지가 골고루 갖추어져 있다면, 그 종교는 참으로 소임(所任)을 다하고 있다고 인정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 P213


  교회를 28년 동안 다녔다.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계속해서 다녔고 매주 3번 이상 공식적인 예배를 드렸다. 어느정도 철이 들만하다고 하는 때부터 해도 십수년동안 교회의 공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예배의 의식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심지어 주일이 왜 안식일이 아니고 주일인가에 대해서조차도 알려주는 이가 없었다. 그러한 의문을 가진적은 있었으나 단편적인 지식들이었고, 체계적인 설명이나 책을 통해 본적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여전히 모든 예배 순서는 지켜졌고, 무의미한 반복으로 그 순서들을 지켜나갔다. 그 형식을 통해 진정으로 만나야할 하나님은 만나지 않고도 ‘예배를 드렸다’는 만족감으로 집으로 돌아서는 경우가 많아졌다. 예배와 예전이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을 당연히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근 또다른 경향은, 열린 예배의 활성화이다. 대단히 파격적인 예배의 모습이 강조되는 것 같다. 기존의 많은 형식들을 과감하게 탈피해서 찬양과 말씀, 기도로 어느 정도 기존의 틀을 지키는 열린 예배도 있지만, 말씀이 빠진 찬양과 기도로만 된 예배와 같은 파격적인 예배도 있었다. 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예배방법에는 갈수록 말씀에 대한 비중은 줄어들고, 율동이나 특별 프로그램에 대한 강조가 많아졌다. 아이들에게 국제 감각을 키워주겠다고 하는 취지에서 영어로 진행하는 예배가 있고, 그래서 미리 시험을 봐서 참석자격을 부여받아야 하다는 것을 들은적도 있다.

  형식과 그 형식이 담고 있는 정신, 그 둘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으나 실상 예배의 정신과 관련된 각 형식의 중요한 의미들에 대해서 고민하지 알지 못한채 ‘수요자 중심’이라는 구호아래 예배 형식의 타파가 과연 옳을까 ?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책의 예배의 정신, 그리고 그 정신을 담아내기 위해서 수 백년 혹은 수 천년을 통해 형성된 예배의 형식(예전)의 의미를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에게 이 책은 참다운 예배정신과 참 정신을 닮고 있는 형식을 통해 진정한 ‘예배의 회복’에 이 책의 내용과 논의는 중요한 도움이 되어주었다.


  이 책의 구조는 크게 세부분이다.

  첫째는 예배의 정신이 무엇인가 ? 라는 질문과 답변이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모든 이가 예배의 형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때, 신령과 진정이라는 예배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정신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 신령과 진정과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의미가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진정한 앎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의 중심과 내면, 우리의 심령으로 예배함을 의미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예배의 정신과 예배의 순서 즉 예전의 연관성에 대해서 ‘1)도구적 형식 2)질서와 일치, 통일성 3)신앙적 전통 4)거룩한 공회로서의 기본합의’라는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두 번째로서 말하고 있는 것은 위에서 말한 예배의 정신의 구현을 위한 각 예전의 내용들에 대한 심화였다. 저자는 ‘1)말씀 2)기도 3)찬송 4)신앙고백 5)헌금 6)성례 7)축도’의 순으로 대부분의 주일 예배시 진행 순서와 비중을 고려해서 각 예전의 형식과 그 형식과 예배의 정신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각 예전들이 형성된 배경과 그것이 예배의 정신인 신령과 진정과 어떤 의미에서 연관을 맺고 있는지 설명되고 있고, 쉽게 빠질 수 있는 오류들과 잘못된 적용들, 현재 한국 교회에서 잘못 주장되어진 내용들에 대해서도 성경적인 답변을 시도하고 있다. 각 예전의 내용에 대해서 같은 식의 접근법이 아닌 가장 간결하고 실제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도록 다른 설명법을 택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말씀과 기도 찬송과 같은 경우에는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을 준거로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나 신앙고백과 헌금, 성례와  같은 부분에서는 기독교 전통과 역사라는 측면의 부가적인 준거를 사용해서 이해를 더하고 있다.


  세 번째 구조는 독자로서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못 다한 말과 같은 10번째 주제였던 ‘생활 예배’인데, 저자는 이 책의 목적상 공식적인 예배와 그 예배의 예전의 내용을 아는 것이었기에 강조될 수 없었던 생활로서의 예배의 부분이었다. 삶의 전 영역에 미치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해서 말하며 삶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 앞에서 삶을 살아내는 것 자체가 예배라고 말하고 있다. 책의 분량 상 열 챕터 중 한 챕터이나 그 내용상으로 앞의 아홉 가지 내용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진정으로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이에게서 나타나야 할 모습이 이 ‘생활예배’라는 것에서 저자의 결론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저자인 송인규 목사님은 기독교 지성 중에서 최고의 지성으로 꼽힌다. 그가 쓴 몇 권에 책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지적인 은사를 가장 쉬운 말로 가르치는데 사용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저자는 예배의 각 순서와 그 의미에 대해서 일상어로 설명하고 있다. 많이 아는 교수의 강의안에 어려운 말이 없듯, 이 책 역시 어려운 신학적인 학설이나 논리로 내용을 풀어낸 것이 아니라 일상을 살고 있는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그들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성경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각 예전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역사적인 배경과 시대적인 필요라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예전(禮奠)’의 의미들을 설명해 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이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논리의 과정을 따르다보면 어느 사이에 그 행간 행간에서 참다운 예배에 대한 갈망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각 ‘예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예배의 정신과 괴리된 부분에 대한 지적이나 현재 대부분은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예전’을 대하는 태도의 비성경적인 부분인, 기복적 축복관이나 어긋난 목회자 중심의 신앙관, 예배의 주체로서의 의식 부족과 신앙과 삶의 분리되어 있는 현재의 한국의 그리스도인의 모습 등에 대해 실제적인 비판과 대안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책의 서두에서 “예배 갱신을 위한 안내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책을 읽는 가운데 참 예배에 대한 갈망함이 생기고 그것을 위해서 이 책의 지적인 부분들을 사용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예배갱신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배의 정신과 예배의 형식에 대해서 어떤 연관이 있는지 지적으로 알고 싶은 이들과 참다운 예배를 위해 고민하고 그것에 대해서 다른 이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야 하는 위치에 있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예배에 대한 지적인 앎과 예배의 회복을 위한 열정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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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peter 2004-09-18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저도 참 잘 읽었답니다. 저희 학교 교수님이세요. 무척 깐깐하시고, 학점도 짠~ 편이시죠. 그러나 책은 참 매끄럽게 잘 쓰세요. 저도 알지 못하던 예배에 대해서 많이 알게된 좋은 책이었죠. 반가워요~ 좋은 나눔 있길^^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
김남준 지음 / 두란노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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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사로서 가끔 성인예배의 설교자로서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고는 한다. 그 말씀이 끝난 후에 내려와 나가시는 성도님들에게 인사를 하려고 문밖에 서게 될 때, 항상 동일한 유혹을 받는다. 오늘 나의 설교에 대한 성도의 반응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성도들 중에 말씀에 은혜 받았다고 하며 손을 꼭 잡아주시고 가시는 분들이 있을 때에는 마음에 뿌듯함이 생겼고, 특별한 반응이 없을 때는 마음이 어려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나 역시 나의 설교에서 내용과 전하는 방법적인 부분에서 실수가 없었는지, 잘한 설교인지를 스스로 판단하며 설교에 대한 채점을 매기기도 했다.


설교에 대한 많은 책을 읽었고, 특히 강해설교의 당위성과 그 능력에 대한 책들을 읽었다. 내 안에 내가 접할 수 있었던 가장 설교를 잘하시는 몇 분의 설교를 연구하고 그분들의 설교의 깊이 가운데서 나의 설교의 방법들을 찾으려 한 적도 있다. 로이드 존스의 11권으로 된 ‘로마서 강해’를 읽으며 존 스토트의 글들을 읽으며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는 것들의 중요함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도전을 받기도 했다. 교만하게도 나의 설교는 내 동기들보다 나았다고 자신하게 되었다.


더 많은 설교에 대한 방법을 읽히기 위해 손에 든 책이 이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라는 책이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되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원하는 책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내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설교자로서 설교를 준비하고 설교를 잘하기 전에 ‘진정한 설교자로서 인격과 신앙과 삶을 갖추고 있는냐 ?’라는 질문이었고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쓰여지기 전 그 역사를 만들어낸 신앙적인 위인들의 삶과 영성이 쓰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교자의 변화는 설교의 변화를 보장하지만, 설교를 고쳐 보려는 노력은 설교자 자신의 변화를 보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설교의 틀이나 내용을 다소 새 것으로 바꾸고 새로운 방법을 사용해 보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 자신이 변하는 것입니다. 변화된 설교자는 변화된 시각으로 성경을 보게 되고, 그렇게 변화된 시각으로 성경을 보게 될 때, 변화된 설교 내용이 나옵니다. 그 변화된 설교 내용이 변화된 설교자의 심령을 통하여 선포될 때, 변화된 설교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 (p18)


저자는 책을 통해서 계속해서 설교자가 먼저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계속적으로 저자는 소리를 높이는데 설교자의 변화가 설교의 변화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특별하고 친밀하며 영광스러운 경험을 가진 구약과 신약의 선지자들을 차례로 예를 들면서 그들 안에 있었던 하나님과의 특별한 경험들을 보여준다. 설교자에 필요한 것이 근래에 강조되는 수사학적 논리와 정교한 석의의 방법들이 아닌 하나님과의 특별한 경험과 그분의 임재 앞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발 강가에서 포로들의 무리 가운데 앉아서 하나님을 만난 에스겔의 분명한 소명의식과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님을 위해 ‘인기 없는 하나님의 멸망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마음과 추기경의 붉은 모자대신 자신의 순교의 필로 물든 모자를 쓰겠다고 말한 중세의 사역자인 사보나롤라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편에 선 대언자로서의 설교가의 모습이 어떠했으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보이고 있다. 총 7장으로 이뤄진 이 책에는 계속해서 설교자들이 나오고 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났고, 그래서 그들의 삶과 생각과 영혼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해 변화된 설교자들의 삶과 고백과 사역이 나오고 있다.


그 한 가지 한 가지 앞에서 책을 읽는 내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한 가지 사실 앞에 서게 된다. 설교가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전하는 이 말씀 앞에 내가 먼저 수긍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의 능력 앞에 내가 먼저 사로잡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말씀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가 내가 가지고 있는 어느 정도의 재능과 교육의 결과가 아니라 신적인 기원에 의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몇 년 전부터 한국교회의 설교의 변화에 대한 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러한 설교의 변화가 곧 교회와 성도의 변화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온전한 선포가 진정한 부흥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었다. 그러나 막상 설교자의 자리에 서서 설교하는 자가 되어 그 설교를 하게 되었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질문이 ‘능력’에 대한 것이었다. 나의 설교에 능력이 없다는 느낌이었다. 설교보다 설교자가 먼저 되어야 하는 원칙을 무시한 채, 말씀으로 변화되지 않은 설교자에게서 선포되는 메시지가 하나님의 목소리가 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이 책은 설교의 방법론에 대해 쓰인 책이 아니다. 하지만 설교를 하기 위해서 강단에 서려는 사람들, 전임사역을 감당하려고 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 관한 책이다.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려는 사람이 갖아야 할 마음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책을 읽는 가운데 숨이 막힐 것이다. 마음이 답답해지고, 눈물이 날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이 책을 읽는 것을 포기하지 말자. 끝까지 부담으로 이 책을 읽어내려 가자. 그리고 진정으로 변화를 기대하자. 하나님의 손에 들린 마른나무 지팡이가 되자.


추가하는 말로 이 책은 몇 번에 걸친 강의의 내용을 책으로 편집하기 위해서 다시금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의 문체는 구어체이나 이 책의 주석과 각 장의 관주를 통해서 저작물로서 깊이 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강해와 강의안을 그대로 편집한 책들이 갖는 책으로서의 논리적 부족과 깊이의 부족함에 대해 저자에 의해 주석과 관주를 통해서 그 깊이를 보완해 책으로서 가치가 더 높아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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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다싱을 만나다
사두 선다 싱 지음, 킴 코머 엮음, 전의우 옮김 / IVP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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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에 대한 동양적 믿음의 여정


“ 나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라고 하십시오. 그러나 나는 성자가 아닙니다. 그들이 잘못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친밀해지기를 갈망할 뿐입니다. 나는 그분과 교제를 나누면서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평안을 맛봅니다. 나는 내가 연약하고 죄악된 존재임을 알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조차 모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치료법도 알지 못하며, 내가 발견한 평안도 발견하지 못한 채 죽습니다.” (P40)


  선다싱이라는 생경한 인물에 대해 접하면서, 기독교계에 그토록 많은 영향력을 미친 인물에 대한 나의 관심이 얼마나 적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우찌무라 간조나 함석헌과 같은 동양인으로서 하나님에 대해 깊은 수준의 앎을 가졌던 이들에 대해 너무도 무관심하게 여겼음을 알게 되었다. 신앙이라는 것이 내 안에 생길 때부터 들어왔던 서구 사회에서 쓰여진 많은 책들의 영향과 그 서구사회에서 쓰여진 책들에 있는 분석적인 논리에 물들어 있는 나에게 있어, 동양적이라고 불리는 종합적 사고를 갑작스럽게 요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이러한 동양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한 신앙서적을 읽을 기회를 스스로 제한했던 것이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이 ‘선다싱을 만나다’라는 책을 구하게 되었고, 차근히 읽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선다싱에 대해, 어린시절 목사님의 하신 ‘눈 내리는 히말라야를 넘으며 쓰러진 한 사람을 업고 넘었기에 살았다는 예화’가 다였던 나에게 이 책은, 선다싱이라는 한 사람이 대다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래서 ‘신들의 나라’라고 불리는 인도 땅에서 하나님을 사람으로 자라가고 성장해 한사람의 성자가 되는 것을 보여주었다. 참으로 진지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고민하며, 온전한 그리스도를 발견해 가려는 구도자로서의 삶과 역시 발견한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았간 한 성자의 모습을 살펴볼 첫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책읽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책을 통해서 어떤 정보를 얻고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것에 익숙했던 나에게 있어 이 책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새로운 독서법이 필요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분석보다는 종합을, 설명보다는 묘사를, 해답보다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이 책을 읽으며 처음에 많은 혼란을 느꼈다. 하지만 그 혼란을 넘어서, 내가 가진 틀이 아닌 책이 말하고자 하는 틀을 가지고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할 때, 책은 말하기 시작했고, 책 속의 장면 속에서 선다싱의 모습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그렇게 진리를 이해했고, 그렇게 진리를 위해 삶을 온전히 드렸다’는 것에 대해서 보게 되었다. 그것은 동양인의 성정에서 이해된 기독교와 그리스도의 모습이었다. 1부를 통해서 ‘선다싱의 생애’에 대해 대략적인 사실들을 알게 되고, 2부를 통해 그가 선생으로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기독교안에 있는 질문들과 그에 따른 답변을 듣게 된다. 하나님의 존재, 죄와 악의 문제, 구원, 참된 기도와 명상, 섬김의 삶에 대한 내용들을 선문답과 같은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각각의 내용에 대해서 논리적 설명과는 다른차원의 해결책들을 삶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주변의 소제들과 묵상을 통한 대답들을 듣게 된다. 기독교적 문제의 해답이 동양적인 사색을 통해서 나올 수 있음에 대해서 처음 접했던 귀한 경험이었고, 그러한 선다싱의 이야기 안에서 기독교안에 있는 중요한 질문들이 해결되어져 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던 시간이었다.


  서구의 논리와 합리가 지배하던 시대에, 기독교마저도 합리적으로 풀어질 수 있다고 믿고 주장했던 서구인들 앞에 서서 동양의 깊은 영성을 가르쳤던 선다싱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서구인들에게 동양적 기독교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었던 기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양적인 사고 안에서 다른 종교 특히 힌두교 안에서 힌두교와 싸우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힌두교의 논리에 굴하거나 비굴해지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전했고, 서구인 안에서 서구인들의 논리와 정서에 대해 공격하거나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동양적인 사고와 정서를 일관하며 그가 이해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삶을 서구인들에게 전하고, 그 신앙을 삶으로 보여준 선다싱의 모습은 그가 왜 성자라 불리는지 수궁하게 만든다.


  최근 서구적 사고의 한계와 자연에 대한 파괴 등으로 인해 동양적 사고가 서구 사회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인양 소개되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티벳의 달라이 라마나, 탁닛한과 같은 경우도 그러하고, 몇 해 전부터 불기 시작한 북미 인디안과 남미 인디안, 부시맨과 같은 자연친화적 종족들이 하는 삶과 자연 속에 발견되어진 지혜에 대한 많은 글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책들이 서구적 사고에 물들어 있는 이들에게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가 많은 이들이 그러한 사고들에 매료된 것 같다. 동양적이고, 종합적이며 자연친화적인 사고들이 서구의 물질주의와 실용주의라는 잘못된 가치관에 대해서 도전하도록 하는 것은 긍정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은연중 그와 더불어 들어왔던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마저도 사상적으로 심각한 도전을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기독교가 전해지고, 가르쳐지는 과정에서 그러한 서구의 사조들과 너무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상황을 위기로 인식한다면, 그렇기에 지금 이 시대의 기독교가 요구하는 것은 ‘순전한 기독교’의 핵심가치들을 찾아 그 핵심가치를 ‘새로운 틀’로 풀어내는 것이다.


  서구나 동양의 어떤 특정한 사상의 흐름에 의지하고 있는 기독교가 아니라, 명확하게 그 둘을 통합할 수 있는 기독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지금까지 있었던 서구의 연구와 수고를 무시하자는 것도 아니며, 새롭게 등장하는 많은 동양적인 사고의 방법들을 힘으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통합할만한 역량을 갖고 있는 기독교의 포용력을 키우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들의 나라’인 인도에서 동양적인 묵상을 통해서 동양과 서양 양쪽에서 그 깊이와 넓이에 있어 널리 인정받고 있는 ‘선다싱’이라는 인물과 그의 신앙적 조언은, 가장 크게 참고하고, 받아들여야할 소중한 가르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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