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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그 특별한 은혜
조안 D. 치티스터 지음, 최규택 옮김 / 그루터기하우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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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씨름 뒤에 감춰진 이야기

  야곱은 철저한 사기꾼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는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 했다. 그는 그의 형인 에서의 발꿈치를 붙들었다. 야곱은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팥죽으로 에서를 속였고, 축복권을 빼앗기 위해 어머니와 합세해 그 아버지 이삭도 속였다. 그는 삼촌 라반에게 속았으나 결국 다시 물질을 위해 라반을 속임으로  사기꾼으로서 모든 것을 얻는다. 그런 ‘사기’의 대가인 야곱이 철저하게 변화된 사건이 있다면 바로 이 ‘야곱의 씨름’이라고 불려지는 얍복 나루의 씨름이었다. 저자는 이 씨름이 바로 고난이고 시련의 시간이며 고통의 시간이었으며 ‘진정한’ 변화의 시작이었다고 말하며 글을 시작하고 있다.

  시련, 고통, 고난 이것들의 공통점은 그것들을 원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그것들이 우리 인생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그 인생의 고통과 시련과 아픔의 시간 이 시련의 문제를 어떻게 넘어서느냐를 통해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야곱의 씨름은 보여줬다. 비단 야곱의 문제가 아니다. 그 이후 모든 인류가 경험하고 있고 이미 우리가 역사와 삶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실 가운데 하나다. 고통은 시련은 그 당사자들에게 무언가를 남긴다.

  여류작가이자 수녀인 저자의 따뜻한 어조의 이야기는 시련의 문제에 대해서 깊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 책은 현대의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가벼운 수준의 시련 방지책이나 고통의 시간을 즐겁게 지내는 법에 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미봉책을 소개하고 있지 않다. 저자는 시련이라는 문제, 고난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하나 해부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책을 시작한다. 그는 먼저 여러 시련의 종류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 시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선물이 무엇인가를 밝힌다. 가령 ‘고립’이라는 시련이 6장의 내용이라면 7장의 내용은 그 ‘고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독립’이라는 선물에 대해 쓰고 있다. 변화에는 전환을 어두움에는 믿음을 두려움에는 용기를 무력감에는 포기를 연약함에는 한계인식이라는 시련과 그 시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의 가치들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글을 통해서 시련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을 열어 보일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시련과 선물에 대한 이야기들을 특별한 논리나 새로운 무엇을 가지고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가끔 ‘아~’하는 탄성이 나오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전혀 알지 못하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실망일 것이다. 이 책의 이야기는 대부분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자주 암송하는 시련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이라는 성경 구절을 암송하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시련의 유익에 대해서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다.
  저자는 따스한 여성의 어투로, 수녀로서 많은 이들을 상담하며 생긴 지혜로, 성경 속에 등장한 야곱의 ‘얍복 나루 씨름’장면에서 얻은 통찰을 나누고 있다. 자신의 아주 개인적인 체험과 삶 속에서 얻은 그 시련에 대한 유익들과 성경 속 야곱의 모습을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시련이 당신에게 주는 유익에 대해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고 있다. 강한 논리나 특별한 감동이 들어 있는 예화보다 강한 따뜻하고 단호한 목소리를 듣게 된다. “시련은 느리지만 자아를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과정입니다.”(p219)

  성공과 승리 남보다 높은 곳에 서야만 한다는 패러다임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이 읽는 책들은 따로 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런 것을 강화할만한 책들을 읽어야 한다. 적어도 이 책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읽기에는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또 뭔가 특별한 것을 찾아 책을 읽는 분들에게도 권하고 싶지는 않다. 실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 시련 속에 고통 속에 아픔 속에 고민하고 있고 지금 아픈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권하고 싶다. 아픔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귀한 보물들이 있는 곳을 알려줄만한 책이기 때문이다. 또 시련과 고통과 아픔 속에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고통과 시련에 대한 수많은 떠돌아 다녔던 생각들을 정리하고, 더 유익한 방법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지혜들이 이 책에 차곡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남에게 상담을 통해서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자매님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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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 하나님께로 가는 거침없는 믿음의 길
브레넌 매닝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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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제 신뢰 없음을 도우소서 !

  나는 브레넌 매닝의 글을 좋아한다. 한권씩 번역되어 나올 때마다 그의 책에서 이 시대에 듣기 힘든 사랑의 메시지를 들었다. 존재보다 행동이나 성취에 대해 말하는 이 세대를 향해 저자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 했다.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이미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고 말해주는 저자의 글 속에서 많이 위로와 격려를 얻을 수 있었다. 내 안에 어느새 들어와 있던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들이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했었다. 저자의 다른 책 ‘아바의 자녀’를 읽으며 내 안에 참 자아와 거짓 자아의 싸움을 시작하게 되기도 했었고, ‘사자와 어린양’에서 사자처럼 강하고 양처럼 온유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감동 받아 울면서 그분의 사랑을 갈망하기도 했었다. 이 책은 그의 이전 책들의 연장선상에서 참 자아로 만난 ‘아바’앞에서 내가 보여야할 유일한 태도에 대해서 말해주는 책이었다. 사자처럼, 양처럼, 그리고 아바로서 내 전존재를 사랑하시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보일 수 있는 유일한 태도에 대해 말이다. 저자는 그 유일한 태도가 ‘거침없는 신뢰’라고 말하고 있다.

  먼저 책의 구조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저자는 12개의 장으로 그가 말하는 유일한 태도인 ‘거침없는 신뢰’의 주변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신뢰라는 것 감사라는 것이 무언가에서 시작해서, 그럼에도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와 그 영광 속에서 논리와 합리가 아닌 신비로서 이 땅을 살아간 이들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셨던 길에 대해(그분의 길과 우리의 길이 너무나도 흡사한 길이었고, 그분의 반응과 우리의 반응이 너무도 다른 반응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조각들을 한 장의 그림 위에 올려놓음으로 ‘거침없는 신뢰’라는 그림을 맞춰나가게 된다.
  각 장의 이야기들도 각 장의 소주제의 의미들을 충분히 풀어낼 수 있을 만큼 완성된 글이었다. 완벽한 논리가 있었고 적절한 예화와 설명들로 각 주제에 대해서 깊은 묵상을 할 수 있었다. 열두 번으로 나눠서 한 장씩 묵상했었지만 책의 각 장의 의미를 그 장안에서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장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마다 깊은 감동으로 각 장의 마지막 장을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큰 구조적 특징은 그 각각의 의미상 독립적으로 보였던 글들이 결국의 치밀하게 하나의 그림을 그려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그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하나 자기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음을 보게 되고,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던 그 곳,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유일한 태도, ‘가차없는 신뢰’ 아래서 하나씩 자리 매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각 악기들이 한순간에 울려 퍼지듯 마지막 12장 ‘가차없는 신뢰’에서 이 모든 장들은 하나의 글이 되어 강력한 설득력으로 ‘그분을 향해 나의 신뢰 밖에 드릴게 없음’을 역설한다. 흩어진 조각들이 어느새 그림이 되어있는 것처럼 어느 사이 그 각장의 내용들이 이 ‘가차없는 신뢰’를 가르키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결국 마지막 장에서 하나님을 향해 “저의 신뢰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부르짖는 저자와 함께 나 역시 그 고백으로 아바를 향해 부르짖고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또 하나 저자의 글의 전체적 특징-문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을 몇 가지 나누고 싶다. 그것은 기독교 저술가로서의 지적인 치밀함과 목회자적인 따스함, 그리고 삶 속에서 나온 공감의 나눔이다.
  먼저 저자의 글에서는 기독교 전문 저자로서의 지적인 치밀함이 느껴진다. 각 장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인용하는 수많은 경건한 신앙의 스승들의 인용구와 현대 신학자들의 저서에 대한 인용, 그리고 그것들을 세세하게 주로 표기함으로서 자신의 독창적인 무엇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난 많은 세대의 지혜였음으로 밝히는 저자의 모습에서 기독교 서적의 저술인으로서 정직하고 참신한 저술의 태도를 볼 수 있었다. 결코 쉽게 쓰여진 글들이 아니다. 
  두 번째 특징은 이런 전문 저술가에서 잘 찾을 수 없는 목회자적 따스함이 그의 글에 있다는 것이다. 그의 글에는 목회자의 따스함이 있다. 그는 던져진 대상, 불특정 대상을 향해 글을 쓰지 않는다. 그는 사랑하는 독자를 향해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의 목회자로서 글을 썼다. 그래서 그의 따스함과 개인적 관심들이 그의 글에 베여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이 책은 읽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성경이 요구하는 수준의 신뢰에 전혀 미치지 못한 나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자라면 그것을 밝히는 것으로 만족했을 것이지만 저자는 목회적 자상함으로 그 상한 마음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고, 공감하며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다독거려준다. 그는 날카로운 지성의 정직한 기독교 저술가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그의 독자를 사랑하고 사실로 인해 아파할 사람들의 아파하는 모습을 모른채 할 수 없는 ‘목회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책은 한없이 따뜻하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이 책의 특징은 저자의 다른 책에서도 그러했지만 철저히 자신의 심장을 거쳐서 나온 책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은연중에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소리를 안다. 또 이것이 상대방의 마음을 통과해서 나온 진리인지, 상대방의 머리를 통과해서 나온 사실인지에 대해서 느낄 수 있다. 저자는 가까운 곳에서 있었던 마음을 통과해 나온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그’가 있다. 역시 동일하게 그의 글을 읽는 이들 역시 그 글 안에서 자기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갇혀진 책이 아니라 열려진 책이다. 그래서 함께 공감하고 함께 감사하고 함께 춤을 출수 있었다. 저자와 함께 저자가 걸었던 길을 함께 걷게 해주는 책이다.

  저자가 처음 하나님께 합당한 인간의 유일한 반응이 ‘가차없는 신뢰’라고 할 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수많은 다른 명제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도 믿음도 찬송도 봉사도 다 나름대로의 차이를 갖고 있고 개인적인 경중은 있겠지만 동일한 무게의 명제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내 편에서의 유일한 대답은 ‘사랑’뿐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가운데 계속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분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부재한지를 보게 되었다. 사랑은 중요한 동기지만 그것이 그 언어로 끝났을 때, 무의미했었기 때문이다. 차츰 저자의 명제인 ‘가차없는 신뢰’에 대해 마음을 열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변적 환경과 상황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을 향해 불변의 신뢰를 보여드리며, 그분의 바람대로 사는 것,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결국에 좋은 것이라는 믿음을 하나님께 보내드리며 삶의 모든 것을 경정해 나가는 인생에 대해서 보게 되었다.
  결국 그 인생이 하나님께서 웃으실만한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마치 ‘금간 물동이’처럼 스스로 의미 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의미 있을 것임을 믿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실존을 가지고 그분이 맡기신 일들을 감당해 나가는 인생에 대해서 그려보게 되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는 신뢰,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신뢰, 겟세마네 고통의 기도의 끝에 맡겨지는 고난의 잔을 마시며 십자가에 달리셔 죽기까지도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바라보던 그리스도의 신뢰, 그 모든 성경의 -내가 생각하는 수준을 넘어선- 신뢰를 만났다. 그리고 그 신뢰가 내 안에 없음을 깨달았다.
  알량한 성경지식과 약간의 경건의 훈련과 얼마간의 경험으로 많은 이들 앞에서 영적인 권위를 세우지만 결국 내 안에 그 신뢰는 없었다. 여전히 하나님은 내 바람과 소원에 대해 어느 정도 응답해 주셔야 하는 분이었다. 다 채워주지는 않으시더라도 꼭 필요한 것은 채워주셔야 했다. 그러지 않으신다면 당신을 믿지 않겠노라고 사실상 떼쓰는 믿음이 바로 나였다. 그게 얼마나 얄팍한 믿음의 수준이었는지 보게 된 것이었다.

  수묵화로 된 책의 표지에는 폭풍이 몰아치는 절벽에서 한껏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그림이 있었다. 이 그림 어디에서 신뢰라는 제목이 나왔을까?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다시 그 표지 그림 앞에 있다.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위태한 그림이다. 하지만 이제 조금 이 책의 표지 그림이 왜 위태한 폭풍속의 나무인지 알듯하다.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위태한 나날들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을 하늘을 바람을 향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변함없는 신뢰의 몸짓을 보내는 나무의 손짓이 언뜻 보였기 때문이다.
  나의 삶 역시 이 폭풍속의 나무처럼, 저자처럼, 아니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신앙의 사람들과 오늘날 신앙생활하고 있는 모든 이들처럼 결코 장밋빛의 환상적인 세계가 펼쳐져 있지 않을 것이다. 많이 울고 많이 힘들어 하며 많이 아파하며 살 것이다. 때로는 정신을 잃을만한 고통도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조심스레 다시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반응하고 싶다.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신뢰하고 싶습니다. 내 신뢰 없음을 도우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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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가 일생을 통해 씨름 했던 것들
루이스 마르코스 지음, 최규택 옮김 / 그루터기하우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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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처럼 기독교의 칼날이 무디어 가고 있는 시대 또한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근대주의자들과 포스트모더니즘 옹호자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통해 모든 것을 포용하고 통합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를 향해서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그들의 이념이 너무나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에 그것을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맞서 싸울만한 적절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뒤로 물러서 있다. - 그는 근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가 무엇인지 꿰뚫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기독교적 대안을 제시해 주었다. ”(p11)


  수많은 서구의 기독교 사상가들과 저자들이 C.S. 루이스를 인용했다. 신앙서적을 읽기 시작했을 대학 2년 이후 많은 번역서를 읽으며 그들이 인용한 루이스의 글들을 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처음 만난 책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였다. 그 책을 읽으며 그 속에서 느껴지는 기독교적 지성을 읽었고 그 쉽게 쓰여진 양식 속에서 유혹에 대한 명쾌한 논리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후 그의 책을 찾아보게 되었다. 홍성사에서 C.S. 루이스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책들이 다시 번역되고 출판되어져 나올 때, 그의 책들을 하나하나 다시 사서 읽게 되었다. 고통의 문제나 천국과 지옥의 이혼, 헤아려본 슬픔 등을 통해서 참으로 많은 유익을 얻었다. 하지만 루이스를 접하는 나의 한계는 분명 명확했다. 그 자신에 대해서 몰랐던 나는 그가 한 이 수많은 다른 책에서 그를 유추해냈고, 그는 발견되어져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만난 그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예기치 못한 기쁨’을 읽으며 그의 삶의 많은 부분들을 알게 되었고, 그 삶 속에서 그의 저작들이 다시 읽혀졌다. 그러나 그의 글들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들을 남겨 놓고 있었다.


  이 책은 루이스의 책이 아니다. 루이스에 대한 책이다. 루이스를 평생 연구했고, 루이스에 대해서 또 그의 저작에 대해서 분석하고 연구하는 기독교인 영문학자의 글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이 책에서 루이스의 모든 영역에서의 싸움(투쟁)을 재현해 보이려고 노력했고 이 책의 독자로서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루이스가 현대사회에서 기독교를 향해서 공격해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 맞서 어떻게 싸웠는지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훨씬 더 깊어짐을 경험할 수 있었다.

  저자는 루이스를 ‘씨름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씨름자가 싸웠던 대상은 근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기독교 사상과 신앙에 대한 세상의 사상적인 공격 앞에서 기독교 정신을 수호하기 위한 투사로서 루이스가 어떻게 싸웠는지, 그의 지적인 방어의 내용들을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의 모든 저작들을 오가며 그가 그 변증을 얼마나 예술적이면서 대중적으로 실천해 왔는지, 그가 외 최고의 지성,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서 이름을 굳힐 수 있었는지를 보여줬다.


  이 책은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를 향해 공격하는 세력을 1)과학, 2)뉴에이지, 3)악과 고통, 4)예술, 5)천국과 지옥이었다고 규정하고, 이 적들을 향해서 사용한 논거들과 저작들을 통해서 변증하는 내용으로 큰 다섯 가지 주제를 세웠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 적들과의 싸움을 이해하기 전에 한 장을 들여서 루이스의 사상에 대한 선 이해를 위해 루이스의 일대기를 짧은 분량 제공해주고 있다. 그의 삶과 작품들이 적절하게 직조되면서 그의 삶과 저술을 통한 씨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각각의 영역에서 루이스가 어떻게 싸웠는지를 밝혀내기 위해서 루이스의 다양한 저술들에 나와 있는 논리들과 사고들을 사용한다. 루이스 전문가답게, 또 영문학자로서 루이스의 저작들을 연구한 사람답게 여러 저술 속에 있는 감춰진 의미들과 현대 사회의 적들과의 싸움을 성사시키고 있다. 나니아 이야기에서 나오는 각각의 환상과 그 환상속의 상징들의 의미에 대해서, 또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 나타는 루이스의 지옥과 천국 관을 통해서 내세에 대해서 전혀 다른 주장들을 하는 현대의 도전들에 대한 루이스의 답변들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씨름의 과정들을 문학자의 감성으로 물 흐르듯 펼쳐 보여줬다. 딱딱한 논문을 기대했다면 충분히 후회할만하다. 이 책은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루이스가 어떻게 각각의 현대사회의 기독교를 위협하는 지적인 도전과 싸웠는지, 그리고 그의 그러한 입장들이 다 옳은지에 대해서는 독자의 판단에 맡겨야 할 부분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루이스가 말하는 과학, 악과 고통,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세 부분에서는 깊은 공감과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었지만 뉴에이지와의 영역에서는 너무 개방적인 입장이 아닌가 하는 반론을 가졌었고, 예술 영역에서는 그 방면의 문외한인 나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내 안에 이전에 읽었던 루이스의 저작들의 숨겨진 의미와 명확한 논리 속에서도 인지해 내지 못했던 나의 짧은 수준의 독서에서 나오는 몰이해의 영역들을 수정할 수 있었다는 기쁨으로 행복했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이 책에서 나왔던 그 개념들을 가지고 서가에 있는 루이스의 저작들을 다시 읽고 싶게 만들었다. 이전에 스쳐지나갔던 개념들과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갔던 중요한 문장들 앞에 다시 멈춰서고 싶어졌다. 이 책과 그 루이스의 책을 함께 펼쳐놓고 다시금 금세기 최고의 기독교 사상가이자 변증가가 당시 최고의 힘을 가졌다고 불렸던 현대사회의 사상적 적들과의 싸움의 현장에 뛰어들고 싶었다.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고, 루이스의 저작들에 대한 참고서로 함께 두고 읽고 싶어지는 글이었다.


  루이스의 책이 아니라 ‘루이스에 대한 책’들 중에는 최고의 책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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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마르틴 루터 1
레그 그랜트 지음 / 홍성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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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말씀과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보아 제 잘못이 입증된다면 모르되, 저는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를 수용할 수 없습니다. 그 둘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할 의향도 없습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행동은 옳지도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p293)

 

  소설은 단숨에 읽어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책읽기 원칙 때문에 밤새워 읽어 버렸다. 간만에 읽는 소설 읽는 즐거움이 있었던 시간이었다. 종교개혁자이며 많은 경우 일반 역사책에서까지도 언급되어야 하는 중요한 인물인 루터를 책을 통해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소설이라는 형식을 사용해서 한껏 현실화된 루터를 만나는 것은 더욱 즐거운 일이었다.


  이 소설은 분명 역사소설로 분류되어야 한다. 종교서적이기 전에 역사적으로 16세기 사회상과 교회 상에 대해서 최대한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당시 농민 저항 운동이나 교황에 의한 면죄부와 신성로마제국으로 불렸던 독일의 사회상에 대해서 정확하게 그려 보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최대한 역사적 사실위에 허구적 인물과 실존인물을 적절하게 배치함으로 역사소설로서의 가치를 더해준다.

  이 책을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비견되는 소설이라고 추천하는 글을 읽으며 과연 그 정도의 흡입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며 읽었다. 100%는 아니지만 근래에 읽었던 책들 가운데 가장 흡입력이 뛰어난 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이 책은 정확한 역사적 기반 위에 세워졌을 뿐 아니라 한번 쥐면 놔주지 않는 흡입력 있는 소설이다.


  책의 구조는 ‘마르틴 루터’가 소설의 한 축을 이룬다. 실존의 인물이며 역사적으로 개신교의 아버지가 되면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를 주장하며 개혁을 이뤄가는 실존인물의 삶이 역동적으로 서술되며 기본적인 축을 이룬다. 그러나 이 소설은 엘리자베트와 요나단이라는 가상의 인물들의 사랑과 헤어짐과 만남이라는 또 다른 축이 존재한다. 이 실존과 가상의 두 축이 계속적으로 교차하며 종교개혁의 시대를 지나간다. 마치 영화를 한 장면들을 보는 듯 시간과 장소라는 것으로 각 챕터는 구분되어 있고, 각 장마다 작가는 치밀한 묘사로 상황들을 그려서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서 ‘마르틴 루터’라는 결코 평면적일 수 없는 인물과 만날 수 있었다. 종교 개혁자이기에 한때 거의 성인의 수준으로 내 머릿속에서 미화되어 있던 인물에 대한 외곡에서 벗어나 그를 한 ‘사람’으로 볼 수 있었다. 루터 안에 있던 고민과 고통, 그를 향해 계속적으로 질문하는 사단의 음성 앞에서의 일어섬, 그리고 그의 간절한 기도의 내용도 있었지만, 논쟁 앞에 지지 않으려 소리치는 화에 가득한 사람으로, 느지막에 만난 결혼 생활 속에서와 태어나기 시작한 아이들 안에서 한없이 즐거워하는 루터를 만났다. 성인보다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감동을 줬다.


  그에 반해 가상의 인물로 구성된 한 축에 대해서는 좀 이해할 수 없다. 이 소설에서 실존인물인 루터와 거의 비슷한 분량을 활여해서 그려진 인물들인데 그들의 삶은 너무도 일반적인 소설의 인물이다. 사랑과 그 사랑의 방해꾼과 그 사랑의 확인과 재결합, 너무도 빤한 이야기가 너무도 잔인한 장면들과 겹쳐있다. 너무 잔인한 장면들 속에서 루터가 만나지 못했던 농민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나 시대상에 대해서 보여줄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충격적으로 그려보일 필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약간 역겨움이 느껴졌다. 일부러 이런 역겨움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종교개혁의 시대’에 벌어진 이 ‘악’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종교개혁’이라는 ‘선’이 주는 인상보다 강하게 느껴지는건 나만의 생각이었음 좋겠다.


  간만에 밤을 세워가며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고, 평면적으로 그려왔던 루터라는 인물에 대해서 깊이 있게 고민하고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더불어 역사적으로 95개조 반박문이 나왔을 때, 독일의 사회상과 교회상에 대해서 새로운 정보들을 접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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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어서는 목회 유진 피터슨의 목회 멘토링 3
유진 피터슨 지음, 차성구 옮김 / 좋은씨앗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비록 지금의 문화가 내게 강력히 권하는 과학과 지식의 모양을 갖춘 다양한 무기들이 정말 대단한 것이긴 하지만, 외부에서 부과된 것을 가지고는 효율적인 사역에 임할 수 없다. 내 몸에 걸친 철갑옷은 당당한 인상을 풍기긴 하지만,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성경이라는 이름의 시내 곁에 무릎 꿇고,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사역을 위해 준비해두신 매끄러운 돌을 골랐다.” (p298)

  유진 피터슨의 책들에서는 따뜻함이 있다. 그리고 후배 목회자들을 향한 온건한 관심과 지지가 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목회자들을 향한 충고에는 성경 속 깊이에서 끓어낸 특별한 힘이 있다. 이 책에서도 그러한 저자의 깊이와 따뜻한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시대를 사는 목회자들에게 부여된 수많은 상황과 여건 속에서, 그 상황과 여건을 해결해 나갈 원칙과 방법들에 대한 수많은 방법들이 제기되었다. 어느 사이에 목회의 현장에서 마저 세상의 수많은 학문과 방법론이 더 세련되고 더 효과 있다라는 은밀한 동의가 있는것 같기도 하다. 저자는 이러한 세상에서 주어진 세련된 것들에서 목회의 기초를 찾는 다는 것에 대해서 부정하며 서론을 시작한다. 세련되기는 하지만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에 그것은 모래 위에 집과 같은 사역이 될 것임을 온화하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면서 저자는 이미 오랜 세월 검증되어 왔던 성경내의 다섯 개의 책에서 ‘참 목회의 기초석’을 제시한다.


  저자가 말하는 다섯 가지 책은 주목받는 책이 아니다. 그는 아가서, 룻기, 예레미야 애가, 전도서, 에스더서를 목회를 위한 다섯 가지 기초석이 되어주는 성경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내게는 의외였다. 청년기에 영향을 받았던 대부분의 신앙선배들은 ‘로마서’나 ‘에베소서’를 말했고, 어떤 이는 목회서신인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를 말했다. 구약에서도 ‘창세기’나 ‘느헤미야’와 같은 말씀 또는 ‘이사야’나 ‘예레미야’의 말씀들을 인용하며 나에게 목회자와 목회관을 가르쳐 줬었다. 적어도 내가 중요하다고 여겼던 성경에, 저자가 말하는 목회오경은 한권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었다. 그 난해해 보이고, 각각의 내용에 연관이 없어 보이며, 어떤 통일된 흐름 안에서 읽혀지기보다는 너무 당시 상황적으로 쓰여진 그 목회오경에 대해, 깊이 연구할 가치도 부여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읽는 가운데 그 5개의 경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매 절기마다 낭독되었으며, 그것이 그 이스라엘 공동체를 수 천년간 ‘신앙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서 있을 수 있도록 했다는 것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수천 년간 이어온, 그래서 그 시간이 검증해준 성경의 오경의 의미들을 찾아 현재 흔들리고, 어디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보이는 이 혼란스런 ‘목회현장’의 적용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목회오경의 기초’ 위에 바로서는 목회를 시작하고 싶어졌다.


  저자는 목회 사역의 다섯 기초가 기도, 이야기, 고통 분담, 거절, 공동체 건설 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각각의 기초들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유대 공동체가 매 절기에 낭독하며 확인했던 아가서, 룻기, 예레미야 애가, 전도서, 에스더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각각의 책이 그런 의미를 품게 되는 것에 대해서 그만이 가진 통찰과 설득력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가고 있다.

  아가서에 대한 수많은 이전 해석들의 한계와 현대의 해석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아가서에 나타난 개인적, 깊이, 은밀성, 관계적 특성을 들어서 목회자의 사역 이전에 필요한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요함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 관계의 중심에 있는 기도생활의 중요함에 대해 확인시킨다.

  룻기는 성도들의 ‘일상적인 삶’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속사와 같은 중요한 사역과 연관되는지에 대한 고리를 제공하는 책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일상의 작고 잡다한 수많은 인생들이 만들이 내는 이야기들이 거대한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목회자 자신의 사역 역시- 말해준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누구도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해준다.

  예레미야 애가는 목회자가 경험하게 되는, 또는 경험해야 하는 고통의 문제에 대한 성경적 견지를 배운다. 목회자에게 있어 고통의 문제가 피하거나 넘어가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 고통의 문제를 품고 성경적으로 반응하며 가야 하는 문제라고 규정하며 예레미야 애가 속에 드러난 예레미야의 고통을 품고 끝까지 고통으로 사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고통의 하나님의 치유의 과정임을 성경을 통해 확인시킨다.

  전도서는 목회자를 바라보는 수많은 이들의 목회자를 향한 기대, ‘신’의 보이지 않는 모습을 대행하라는 요구에 대해서 ‘거절’하는 것을 가르친다고 말한다. 수많은 이들의 요구가 틀릴 때가 많다. 하지만 목회자는 매 순간 그들의 요구에 부합해야 한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러나 전도서는 그러한 요구들에 대해서 ‘NO !'라고 말할 근거들을 목회자에게 제공해 주는 기초석이다.

  끝으로 에스더서에는 목회 사역 자체가 ‘신앙 공동체’라는 특수한 배경 하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신앙적 유아독존은 없으며 독불장군이 되어서도 안되며 목회가 곧 공동체적 사역을 의미함에 대해서 에스더 속에 나타난 에스더라는 드러난 인물과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그 민족의 위기에서 극복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다섯개의 성경, 유진 피터슨이 말하는 ‘목회 오경’을 통해서 참 목회의 기초석에 대해서 고민하는 기회가 되었다. 수많은 세미나와 수많은 운동들이 이름들이 오가는 지금의 목회 현장에서 가장 기본적인, 그리고 가장 오랜 세월 유지되어온 하나님께서 준비시켜 놓으신 목회의 기초석이 무엇인지에 대한 저자와의 여행을 통해서 마음에서부터 올라오는 확신이 있었다. 저자의 따스한 관심어린 목소리와 또한 현대 사회의 현대 목회자를 향한 위기의식이 느껴지는 간절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각각의 성경책에 대한 쉽게 접할 수 없는 통찰력 있는 해석 속에서 참 좋은, 그리고 바른 선배(?)를 만난다. 나는 저자가 좋다.

   다윗이라는 청년이 골리앗이라는 거인을 향해 올라가며 주었던 그 시냇가의 다섯 개의 돌멩이가 거인의 침몰시켰듯, 수 없이 오랜 세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연마된 이 최상의 성경의 기초 위에 나의 사역과 우리의 사역이 놓여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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