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양·보호시설에 갇힌 노인과 장애인 돌봄, 아이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초저출생 사회, 돌봄의 손길이 부족하여 인공지능과 돌봄 로봇의 가능성에 매달리는 현재를 누구나 ‘돌봄 위기 사회’라고 말할 것이다. 여기에 ‘자기 돌봄’이라는 표현이 보여주듯 사회적으로 취약한 아이와 노인뿐 아니라 누구나 돌봄이 필요하다고 호소하지만, 그 가치를 온당하게 인정받지 못하는 돌봄이라는 짐은 누구도 짊어지지 않으려 한다.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출간된 김준혁 교수의 책 《돌봄의 역설》은 누구나 돌봄을 원하지만 아무도 돌보려 하지 않는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을 분석하고, 모두가 모두를 돌보는 ‘함께-돌봄’ 사회로 나아가는 돌봄윤리를 제시한다.
이책에서는 < 양육, 교육, 의료, 요양> 크게 네가지 돌봄 영역을 제안한다. 돌봄은 너무 당연한 삶의 배경같은 것이었고, 여성이 모든 돌봄을 수행하는것이 당연했던 시대를 지나 돌봄이 특정한 성별이나 위치만의 일이 아니며 우리 세상을 꾸려나감에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일이하는것을 다들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누가 어떤 보상을 받고 어떻게 돌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답하지 못하는 질문이 남아있다. 누구나 돌봄을 원하지만, 돌봄 수행은 피하려 하는 이역설적인 상황에서 좋은 돌봄을 그려보려고 하는것이 이책에서 다루는 이야기이다. 돌봄은 서로 교환하는 것이며, 의지를 갖고 실천하는 것이며, 보살핌받는 이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돌봄은 구조속에서 순환하며, 나는 돌보며 돌봄 받는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각장의 주제들로 돌봄을 관찰하며, 돌봄을 그려간다.
정말 저출생이 '국가 위기'라면 해결책은 명료하다.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는 것이 커리어와 양립될 때에만, 출생률은 돌아설 것이다.
출산과 육아에 대한 잠깐의 지원이나 경제적 부조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돌봄의 첫정의를 내리는 것, 아기이다. 아기를 돌봄의 시작으로 담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는 환경에 부모님의 돌봄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라는 문장처럼, 돌봄을 받아오던 사람이 이젠 돌봄의 주체가 된다.
첫째 돌봄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며, 둘째, 우리의 정체성이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돌봄이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돌봄의 상호성과 관계적 정체성이야말로 돌봄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아야 얻을 수 있는 인식이다.
물론 우리 사회는 돌봄체계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다. 의료와 복지 제도는 돌봄의 사회화를 위한 노력의 결실이며, 가정의 책임이었던 돌봄은 많은 부분 국가의 역할로 바뀌었다. 하지만 국가는 끊임없이 재정 축소의 압력에 시달리며 돌봄은 그에 매우 취약한 영역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지 못하는 사회는 그자체로 병든 것이다. 2020년대, 지금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가장 큰 병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는 어떤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기에, 아이를 돌볼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돌봄의 위기와 돌봄이 사회구조와의 연관성을 설명한다. 인간의 돌봄의 과정을 바라보며, 우리의 삶에 돌봄을 들여야만 돌봄의 위기가 해소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개인의 돌봄, 사회의 돌봄을 다루며, 개인의 차원에서 사회전체의 순환까지 돌봄의 사회로 나아가는 돌봄 윤리를 제안한다. 저마다의 돌봄의 공백을 한탄하는 사회에서
함께 돌봄의로 나아가는 시각이 담겨있다. 다양한 돌봄이 다뤄진다. 돌봄이 노동이 되어있진 않은지, 너무 당연한 돌봄을 받고있는것은 아닌지, 개인으로서의 돌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볼수 있었다.

최근 들어 한국에도 조금씩 소개되기 시작한 ‘장애정의(Disability Justice)’는 2005년 일라이 클레어, 스테이시 밀번 등이 설립한 장애정의집단(Disability Justice Collective)의 흑인, 브라운, 퀴어, 트랜스 구성원들이 만든 신조어로, 백인 중심적이고 단일 쟁점에만 초점을 맞추는 기존의 장애인권운동에서 주변화되었던 장애인 퀴어, 트랜스, 흑인, 브라운의 삶과 필요, 조직화 전략을 중심에 놓는 운동/관점을 의미한다.
나에게 장애정의란 장애가 백인 중심적으로, 남성 중심적으로, 혹은 이성애 중심적으로 정의되지 않는 정치 운동을, 그리고 그런 관점을 공유하는 서로 맞물린 많은 공동체들을 뜻한다. 장애정의와 장애인권운동의 관계는 환경정의운동과 주류 환경운동의 관계와 같다. 장애정의는 아프고 장애가 있는 유색인들, 퀴어이고 트렌스인 유색인 장애인들, 그리고 주류 장애 조직에서 소외된 모든 이들을 중심에 놓는다.
이글은 돌봄에 관한 에세이다. 아프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자율성과 존엄성을 갖고서 우리 고유의 방식대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돌봄과 지원을 받으려고 시도하는 방법들에 대한 글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돌봄을 받는가 그리고 받지 못하는가, 그리고 돌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위의 책 <돌봄의 역설>과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으면서도 다루는 이야기의 주제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율적인 돌봄이라는 것에 대한 주제는 비슷하지만, 이책에서는 이런 주제를 이상적 미래라고 통칭하며 다룬다. 놓여있는 환경이 다른 돌봄의 시각을 담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러니까 돌봄을 창조하고 또 돌봄을 받는 이런 삶을 살아나가면서도, 국가가 좆되고 공동체도 좆될 수도 있고 부족할 수도 있을때 우리가 서로를 살려놓을 방법들을 찾아내는지에 계속해서 깊은 감명을 받는다.
우리가 고쳐지지 않을 때, 극복하지 못할 때, 우리가 40대에도 60대에도 그 이상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트리거에 눌리고 여전히 감정에 휘둘리고 여전히 치유 중일 때, 우리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억하는 중이고, 우리 생존자의 삶으로부터 배우는 중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흉터에 헉, 하고 놀라는 모델로 부터 그 흉터를 통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배우길 원하는 모델로 이동하는 중이다.
돌봄이 필요한 주체들이 돌봄을 받기를 원하는 운동을 하면서도, 돌봄없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모습들을 담은것 같다.
부서진 채로도 잘 살수있다는, 우리는 서로 엮여있고 서로를 생각하고 있고 서로를 버리지 않았다는 마음이 담겨있다.
장애정의는 느려. 사회정의에 가장 정통한 비정아앤들조차 뚫어지게 쳐다보거나 경악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곧 장애정의야. 많은 주류 비장애인들이 실패라고 여기도록 배워온 게 바로 장애정의의 모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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