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전 - 원전총서 원전총서
유향 / 예문서원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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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전(列女傳)』은 중국 전한(前漢, 서한) 말기의 문헌학자 유향에 의해 저술된 중국 여성들의 전기다. 대개의 사람들이 짐작하듯이 나 또한 列女가 아니라 烈女들의 전기라고 생각했다. 유교적 여성 이데올로기에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은 제목만 보고 이 책을 멀리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실제 책 제목은 무던하게도 여인열전 정도다. 제목도 제대로 확인 안 하고 오해해 유향 선생께 미안하다. 변명하건대 유향 선생의 『전국책(戰國策)』, 『설원(說苑)』, 『신서(新序)』 등을 좋아하는 팬이니 너그러이 헤아려주시길.


물론 列女들 가운데 烈女에게 주안점을 두고 읽힌 건 사실이다. 인지전(仁智傳)과 변통전(辯通傳)에는 지혜로운 여성들이 대거 등장한다. 사람을 변별하고 정치적 현상을 조망하는 안목, 전고(典故)를 헤집는 통찰력, 권력의 부조리를 지적하는 용기 있는 여성들이 적잖다. 그런데 이 재주 있는 여성들은 자신의 재능을 자신의 치부를 위해 쓰지 않는 희생정신까지 보인다. 조나라 장수 조괄의 어머니와 조나라 필힐의 어머니 정도가 예외다. 이 분들이 자식의 허물로 말미암아 자신들까지 처벌되는 건 곤란하다며 항변하는 건 인상적이다.


자식과 남편에게 쓴소리를 하는 것도 죄다 그네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는 여성들의 지혜와 식견이 남성을 위한 것으로만 복무하는 구조가 은연중에 엿보였다.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가로막힌 사회에 자식과 남편을 통해 욕망을 실현해야 하는 설움 같은 게 느껴진다. 유리 천정(glass ceiling)은커녕 강철 장벽이 놓여 있을 때 체념하기보다 대리분출이라도 하려는 노력이 애틋하다. 미안하고 고맙다. 옛 여성들의 기록을 복원하는 건 고구려 말기의 사적을 당나라측 기록에 의지해 반추하는 씁쓸함이다.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제나라 재상 안자(晏子)의 마부 아내 이야기는 다시 들어도 기껍다. 남편이 안자를 모시고 말을 끄는 모습을 본 아내는 남편에게 안자는 재상이 되어서도 신중하고 낮추는데 당신은 그의 마부에 지나지 않으면서 뭐가 그리 의기양양하냐고 핀잔한다. “안자의 지혜를 품고서 거기에 팔 척의 키를 더하십시오. 인의를 실천하며 현명한 주인을 섬긴다면 그 명예가 반드시 드러날 것입니다. 또 '차라리 의를 즐기고 천하게 지낼지언정 헛된 교만으로 귀하게 되지는 않는다'고 들었습니다(是懷晏子之智, 而加以八尺之長也. 夫躬仁義, 事明主, 其名必揚矣. 且吾聞, ‘寧榮於義而賤,不虛驕以貴’)”는 충언도 잊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에 나온다. 시기상으로 더 앞서니 열녀전 고사는 이것을 윤색했을 게다. 관안열전의 마부 아내는 남편에게 실망한 나머지 떠날 것을 청할 정도였다. 아마 열녀전의 전체적 분위기에서 이혼 선언은 안 어울려서 빼고 대신 좀 더 곡진한 충고를 삽입한 모양이다. 관안열전에서 안자의 키가 6척이 채 되지 않는다(長不滿六尺)며 마부의 우람한 체격과 비교하는데, 열녀전에서는 3척(長不滿三尺)이 못 된다고 키를 반 토막 내버렸다. 아마 옮겨 적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거나 마부의 떡대를 부각시키기 위해 일부러 과장된 표현을 썼을 게다. 후자라면 열녀전에 소설적 측면이 다분함을 엿볼 수 있다. 유향 선생도 사기를 읽다가 나처럼 이 대목이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남편이 말귀를 알아듣고 몸가짐을 삼가 안자에게 더 중용되었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마부의 아내는 인종(忍從)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관안열전의 기록을 볼 때 남편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생각을 한 거 같지도 않다. 그러나 마부의 아내는 그 누구 못지않게 여성적 매력으로 충만하다(내가 보기에는). 그가 오늘날을 산다면 어떨까? 남편에게 매여 꽃 피우지 못했던 가능성을 펼칠까? 아니면 가탈스러운 페미니스트라며 흘김을 받을까? 이 시대라고 여자의 말을 귀 담아 듣지 않는 남자의 비율이 크게 줄었을 거 같지는 않다. 나 또한 협상의 대상이 아닌 배려의 대상으로만 여성을 보려고 한다. 반성한다.


여하간 열녀전은 다양하게 변주되어 퍼졌다. 한국에서는 이와 같은 시도가 고려사 열전에서 처음 보인다. 조선의 사가들은 열전에 열녀전을 수록하며 한자를 列에서 烈로 바꾸어 놓는다. 옛날 여자는 처녀 때는 현숙한 여자가 되고, 시집가서는 현숙한 부인이 되었으며, 사고를 당해서는 열녀가 되었는데 요즘 여자는 그렇지 않아 “꿋꿋이 서서 어려움을 당하고도 이를 무릅쓰고 죽음으로써 그 지조를 바꾸지 않는 자는 찾기 어렵기에(其卓然自立 至臨亂冒白刃 不以死生易其操者 嗚呼可謂難矣)” 열녀전을 짓는(作烈女傳) 까닭을 밝히고 있다. 列女와 烈女의 작은 뜻빛깔 속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고통을 당했을까 상상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유향 선생의 열녀전이 첫 시도임에도 가장 나은 모습을 보인 편이라는 게 놀랍다. 후세 사가들이 여성의 정절에만 집중해 편의적이고 형식적으로 지면을 할당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물론 전한 성제(成帝)가 애첩 조비연 등과 놀아나는 게 마뜩잖다는 열녀전 저술 동기가 엄연하다. 그러나 유향 선생은 그것을 편협하게 풀지 않고 유교적 덕목의 너름을 뽐내기라도 하듯 무늬만이나마 다채로움(Variete)을 시도했다. 화재 현장에서 보모(保姆)가 올 때까지 방에서 나가지 않는 법도를 지키다가 불에 타죽은 백희(伯姬)가 있는가 하면, 촛값을 못내 쫓겨날 처지가 된 서오(徐吾)가 “한 방에 나 하나가 더 있다 하여 촛불이 따로 닳는 것도 아닌데 촛불을 왜 아끼는가?”라며 재치를 발산하기도 한다.


적어도 몇 대조가 이런 벼슬을 했고 무슨 문집을 남겼다 식의 족보보다 훨씬 재미나고 유익하다. 물론 시대적 상황이 이런 단편적인 기록 하나만 남기도록 허락했겠지만 유향 선생의 글 묶는 솜씨는 역시 빼어나다. 열녀전에서 어떤 여성주의의 밀알을 기대하는 건 과욕이다. 그렇다고 그러면 그렇지라며 샐쭉 토라지는 것도 무성의한 태도다. 비록 남성들에게 재단되긴 했지만 좀처럼 접하기 힘든 옛 여인들의 이야기인 만큼 복선 없이 읽었으면 좋겠다. 상고주의(尙古主義)하자는 게 아니라 희소가치에 대한 호기심과 독점을 막자는 균형감각을 발휘하자는 뜻이다.


열녀전을 덮고 나니 지난 4·25 재·보선에서 아들을 당선시켜 달라며 휠체어를 타고 무안과 신안을 누비던 이희호 여사가 문득 애처로워졌다. 오냐오냐 키우느라 싫은 소리 할 줄 모르는 어머니, 캐비어만 먹을 수 있다면 좌우 볼 거 없다는 아내, 권세의 흐름에만 민첩하고 돈 헤아리는 데만 눈이 밝은 싱글들이 과거에 비해 더 늘었다(내 편견이다). 여성들이 제 욕망을 스스럼없이 발현하는 건 환영할 일이고 권장할 일이다. 하지만 그 욕망이 좀 더 좋은 쪽으로 발현되기를 희망하는 건 여성 억압이 아닐 게다(그렇게 따지면 전 남성 혐오증 환자이려고요?^^;). 내 둘레에 매력적이고 기품 있는 여성들이 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적잖은 남성들의 앙큼한 바람일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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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에게...

네 무사 전역과 복학을 축하한다. 새학기 준비하는 네 모습을 보며 나도 좀 더 신발끈 질끈 묶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 각자의 전공을 침범(?)하며 외도를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네가 사학과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그래도 청일전쟁 관련한 과제물을 작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네 모습을 기억하면 역시 내 둘레에 흔치 않는 사학도라는 걸 실감한다. 내가 너를 위해 골라본 책은 <춘추좌전(春秋左傳)>이다.


네게 <춘추>에 대한 설명을 한다는 게 좀 우습지만 나도 중국사에는 적잖은 관심을 두고 있으니 좀 썰(?)을 풀어볼게. 후한시대 역사가 반고(班固)는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 춘추의 경우 그 전(傳)이 총 23가(家) 948편에 달한다고 정리했지. 23개의 학파에서 춘추 해석서를 948편이나 내놓았다니 춘추의 인기를 대단했던 모양이야. 사실 여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우리가 춘추 본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1만 6천여 자로 분량이 매우 적고, 그 내용도 소략하다. “So what?”이라는 질문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법하지. 결국 너도나도 춘추 해설서를 써냈어.


이 수많은 해설서들이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공정하게 경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치열한 다툼 끝에 세 종류가 명맥을 유지했어. 그 영광의 얼굴들이 바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과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이야. 세 경전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다가 삼국시대 이후에 춘추좌씨전(이하 좌전)이 춘추학을 제패했지. 너도 잘 알다시피 삼국지에서 촉한의 관우가 좌전을 좋아해 전장에서도 좌전을 끼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고사고.


그런데 우리나라는 오로지 좌전이 독점적 지위를 누렸어. 우리나라에서 춘추학의 발달이 더뎠던 것은 이러한 독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좌전을 넘어서는 해설서를 만들어보겠다는 의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고나 할까. 이러한 무관심은 광복 이후에도 다를 바 없어 2005년 자유문고에서 곡양전과 곡량전의 역주본을 내놓은 것이 유일하다. 좌전 편향의 우리 풍토를 투덜거리더라도 좌전이 역사적 사실 해설과 실증적 탐구에 열중해서 높은 인기를 얻게 되었음은 인정해야지. 좌전이 가장 읽을 거리가 풍부한 건 분량 면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여하간 춘추를 놓고 벌어진 현란한 논쟁을 바라보며 춘추시대 여러 나라의 역사서 가운데 유일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노나라의 역사를 경전으로 승격시켜 아낄 줄 알았던 중국인들의 문화의식을 배워야할 듯싶어. 우리의 역사가 간략하다고 한탄하기 전에 유득공이 <발해고(渤海考)>를 엮는 심정으로 매달렸다면 어땠을까. 만약 춘추를 익히는 정성의 반의반만이라도 삼국사기를 위시한 우리 사서들에 대한 주해를 달았다면 어찌 동방에 경전 몇 개쯤 나오지 않았을까 멋대로 생각해본다.


우리나라 과거시험에서 좌전을 단골 시험 문제로 출제한 것은 익히 전해진 사실이잖아. 서로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주창하며 자신의 일을 합리화했고. 약체 중의 약체인 노나라의 역사를 배우려고 우리 선조들이 하얗게 지새운 밤이 그 얼마나 많은가. 이황이 남긴 도서 가운데 주자의 저작과 경전 등 중국서적은 159종인데 조선의 역사, 지리 관련 서적은 1/3 수준인 55종이라고 해. 이이는 <기자실기(箕子實記)>를 지어 중국에서도 전설상 인물인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정성껏(!) 서술하기도 했고. 이러한 모화사상이 17세기 이후 조선 중화주의를 낳는 기초가 되었다지만 마냥 달가운 일은 아니지. 오늘날의 잣대로 선현들에게 험담을 늘어놓겠다는 뜻은 아니야. 하지만 우리 역사에 해설을 붙이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투정을 좀 부려보는 건 뒷사람의 특권일지도 모르지.


중국 대륙을 차지했던 북방 유목민족들이 하나둘 중국화(中國化)하는 와중에도 한국은 아름다운 예외였어. 거의 모든 지배계급이 중국화를 위해 안간힘을 썼는데도 끝내 중국과는 별개의 주체성을 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경이로워.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한 번 탐구해볼 만한 화두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지배층의 중국화 열망을 막아낸 것은 힘없는 백성의 보이지 않는 저항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제 자발적 복종의 시대는 지난 만큼 민초들의 정신을 이어 받아 이 땅에 켜켜이 쌓인 지혜를 정리하고 공유하는 건 우리의 몫이겠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같은 빼어난 기록문화가 조선 이전의 역사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아쉬워. 사기열전의 그 화려한 기록들을 보면서 군침을 흘렸듯이 춘추를 질리지도 않고 잘 우려먹는 중국인들의 은근함에 새삼 부끄럽다. 우리 춘추좌전을 함께 나눠 읽으며 우리가 배워야할 점을 찾아보자. 중국의 고구려사 침탈에 분개하기는 쉽지만, 청나라 건륭제 때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발간한 그 치열함을 배우기는 어렵지. 다가 올 한중일 역사 전쟁에 의연히 맞설 수 있는 방책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을 듯싶어.


좌전에 나오는 구절 중에 문공 3년조 기록인 제하분주(濟河焚舟)을 네게 건네고 싶다. 강을 건넌 다음 배를 불태워버렸다는 말로 배수진과 비슷한 뜻이지. 우리 수험 생활에 필요한 문구다. 잡설이 길었고 뭐든 열심히 읽고 궁리하자.

좌전의 주요 고사를 뽑아 만든 명구집이야. 맛보기로 읽거나 입가심으로 읽으면 좋겠어.

 

 

 

 

동양고전을 부지런히 번역하는 자유문고에서 펴낸 판본이야. 원문에 대한 역주가 비교적 풍부해서 원문에 관심이 많은 경우 추천할 만해.

 

 

 

 

편집디자인이 좋아서 가독성이 뛰어난 판본이야. 특히 권두 해제에는 춘추학에 대한 상세한 해석이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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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에떼 - 문화와 정치의 주변 풍경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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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종석 선생님의 신간 『바리에떼』(개마고원, 2007)의 서문에는 2부의 첫 번째 글인 <식민주의적 상상력>(이하 <상상력>)을 꼼꼼히 읽어달라는 당부의 말씀이 있다. 나는 그 부탁에 기꺼이 호응해 삼일절 새벽에 그 글을 가장 먼저 읽었다. <상상력>은 복거일 선생님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이하 『변호』)를 비판한 글로서 친일 문제에 대한 많은 성찰거리를 남긴다. 『변호』는 일제 식민통치는 가혹했으며 조선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설파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식민통치가 조선의 근대화를 앞당겼다며 인구증가율 등을 들어 논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보인다’는 표현을 쓴 것은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 선생님은 『변호』의 주장을 “과격한 상황론”이라며 『변호』의 저자가 지금껏 취해온 개인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중시하는 우파적 스탠스와 다름을 지적한다. 특히 “이런 환경결정론을 일제 하의 친일 행위에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범죄들, 특히 궁핍에 기인한 강력범죄나 ‘이념 범죄’들로까지 넓혀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의 논거가 한결 진지하고 단단해(93쪽)”질 것이라며 권유할 때는 무척 통쾌했다. 『변호』의 논리를 차용해 삼일절 새벽에 거리를 질주한 폭주족들도 이 날의 역사적 의미를 다소 요상하게 기린다는 상황론으로 넘어가 주면 어떨까? 각종 불법과 비리로 구속된 재벌 관계자들이 어려운 경제여건이라는 상황론으로 말미암아 유유히 옥문을 빠져나오는 것보다 훨씬 작은 너그러움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변호』는 통계적 수치를 통해 식민통치의 경제적 효용을 입증하려고 노력하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유주의자(!)인 나는 그런 식민통치로 이룩한 경제발전이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다. 개개인의 자유를 몇몇 통계수치로 가늠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기도 하거니와 설령 가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훼손된 자유에 대한 비용 처리가 너무 인색하다. 추상적 가치를 계량화하기 즐기는 복 선생님의 장점이 바래는 순간이다. 고 선생님의 의구심대로 “일본 식민통치에 대한 변호의 연장선에서 박정희를 바라보고 있(107쪽)”다 보니 이런 무리수를 던진 건 아니었을까.


복 선생님은 징집제도로 젊은이들이 맛보는 비참함은 우리 사회의 복지를 크게 줄인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또 징집 제도는 병사들의 낮은 생산성도 문제된다며 주관적 측면에 대한 계량적 접근을 시도한다(복거일,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죽음 앞에서』, 문학과 지성사, 1996, 197~203쪽 참조). 이런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복 선생님은 『변호』에서 예의 그 장기를 선보이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니 한국이 징병제 국가가 되고 군사주의 문화에 시달리는 게 일제와 아주 무관하지 않기도 하다.


일제가 조선을 돼지 키우듯이 먹여놓고 탐스러운 살코기를 음미하려했는지, 진심으로 내선일체를 퍼뜨려 이등국민으로나마 편입하려 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도록 하자. 조선과 비슷한 정착자 식민지로 손꼽히는 미국,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상상력>의 논박으로 충분할 듯싶다. “앵글로색슨족의 입장에서는 세 나라가 지상의 낙원일지 모르겠지만,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잃어버린 고향(101쪽)”에 지나지 않음은 또렷하다. 추출 식민지와 정착자 식민지 사이의 섬세한 차이를 헤아리는 것보다 “모든 식민주의는 그냥 나쁘다(105쪽)”라고 외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복 선생님이 힘주어 말씀하시는 그 자유주의가 경제적 자유를 떠받드는데 힘을 다한 나머지 정치적 자유에는 무심해서 당혹스럽다. 조선인들이 제 자유를 헌납하고 이룩한 경제적 이득에 우호적 눈길을 건네는 게 마뜩잖다. 게다가 그 헌납은 자유의지도 아니었다. 이런 점들을 부러 견뎌내더라도 “‘우리 모두가 죄인인데 누가 누구를 탓하랴’ 하는 전 국민적 반성주의(123쪽)”만큼은 단호히 반대한다. “죽은 자는 더 궁극적 소수다. 산 사람들과는 달리, 죽은 사람들은 연합을 이룰 수 없다. 그들은 홀로 누워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후대 사람들의 선고를 받는다”는 복 선생님의 주장에도 거의 동감할 수 없다.


안락하게 자연사함으로써 일신과 가문의 부귀영화를 건사한 이들은 충분히 남는 장사를, 보다 정확히는 부당이득을 취했다. 『변호』를 소수를 위한 변명으로 보기에는 그들은 너무 다수였고 주류였다. 다수파와 주류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강요하는 건 어색하다. 관용은 의무라기보다는 권리다. 친일 행위를 했던 지식인 및 사회 지도층을 더 엄준하게 꾸짖는 것이 사회 발전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억지스럽다. 그네들이 누렸던 자유만큼의 책임을 요청하는 건 그리 지나친 요구는 아니다.


사회 상층부에 대한 윤리적 기대 수준을 낮추려는 시도는 일제시대에 지나지 않고 오늘날까지 그 파장이 전해진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커녕 남들 다 지키는 준법정신도 발휘하지 않은 이들이 사회 상층부에 머무르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아 왔다. 지식인의 변절이 일제에게 적잖은 선전 도구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쩌면 『변호』는 “일정한 생활 근거가 없으면 한결같은 마음이 없어진다(無恒産無恒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이들의 단골 문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맹자는 곧이어 “일정한 생활 근거가 없으면서도 항상 꾸준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오직 선비만이 가능하다(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고 말씀한다. 무항산유항심은 차치하고 무항산무항심도 아니고 유항산무항심이었던 지도층을 보는 씁쓸함이 가시지 않는다.


일전에 유시민 선생님은 민주화 유공자 보상법을 게임이론을 빌려 설명하며 경제정의의 실현으로 볼 것을 주창했다(유시민, 『WHY NOT?』, 개마고원, 2000, 74~84쪽 참조). 나는 그 제안에 공감하며 반복되는 게임에서 대한민국 구성원들이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도록 탄탄한 경제정의를 세우길 희망한다. 일제 치하와 같은 암울한 상황이 다시 벌어질 때 자유를 애호하고 폭력에 반대하는 시민과 지식인들이 더 늘기 위해서라도 친일파에 대한 최소한의 기록과 평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열악한 형편에서도 대한민국에 대한 ‘배신전략’보다 ‘협조전략’을 선택하는 게 장기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보다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접근이라고 본다.


역사는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 복 선생님은 ‘진화’라는 말을 좋아한다. 복 선생님은 진화에도 큰 추세는 있음을 인정한다(“‘친일은 없다’ 발언으로 논란 일으킨 복거일씨.” 동아일보. 2002. 06. 03. 참조). 생존을 선(善)으로 여기는 복 선생님께서도 인간은 점차 이타적으로 나아가는 추세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복 선생님은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에서 개인들의 이기심은 ‘상호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로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게임이론의 “‘되갚기’의 놀라운 성공에 담긴 함의들은, 생명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협력한다는 통찰(“‘게임이론’ 벗어난 對北유화정책.” 동아일보. 2005. 11. 14. 참조)”을 조명하는 칼럼에서도 그런 낙관이 읽힌다(참여정부의 되갚기 정책이 미흡함을 질타하는 칼럼을 읽으며 나는 그의 되갚기가 편향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인간이 상호적 이타주의로 진화해감에 있어 되갚기가 필요불급하다면 왜 친일파는 예외가 돼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물며 여기서의 되갚기는 부관참시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며, 후손들을 단죄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진상을 규명하고 부끄러운 과거를 기록하겠다는 정도다. 광복 이후에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최린이 자신의 친일행적을 사죄하며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달라”고 참회한 것과 같은 반성이 드물고 드문 까닭은 친일파들의 상당수는 확신범이었다는 방증이다. 적어도 부끄러움을 인지할 능력을 잃었다는 징표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헌법이 그렇고 그렇게 살다간 자들과 그네들의 후손(특히 힘센 자들)의 명예권, 인격권까지 보호해야할 가치가 있을까 싶다.


<상상력>은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 부득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책 제목 바리에떼(Variete)는 프랑스어로 ‘다채로움’이라는 뜻이다. <상상력>을 비롯한 여러 정치 에세이를 관통하는 원칙은 균형감각이 아닐까 싶다. “치우침으로 치우침을 치유하지는 못한다(58쪽)”는 명제는 이 책의 핵심 주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사회적으로든 유전적으로든)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차가운 인식과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지녀야 한다는 뜨거운 믿음 사이의 균형(58쪽)”을 찾기 위한 정성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가 고 선생님 글을 달게 읽는 이유는 불완전한 인간의 냄새를 맡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좀 더 기품 있게 살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의 신산함이 거침없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죽음은 그 개인에게 우주의 소멸이다”라는 구절을 늘 가슴에 새기고 산다면 한번 뿐인 삶을 대충 살지 않는 힘이 될 것이다. 책에 실린 각종 평론 외에 선생님이 지인들에게 건네는 사랑 표현도 넉넉한 덤으로 읽어봄직 하다. 아니, 또 하나의 본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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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0 10: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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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 삼인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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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유나영 옮김, 삼인출판사)는 메시지가 또렷한 책이다. 코끼리는 미국 공화당의 상징동물이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공화당이 만든 프레임에 민주당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보다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코끼리가 되라고 주문하고 있다. 자신의 언어와 자신이 만든 틀 위에서 상대방과 경쟁하도록 만들라는 주장이 신선하다.


프레임(frame)은 통상 생각의 틀 정도로 해석되지만 책에서는 정부나 정당이 설파하는 구호나 선전으로 좁게 쓰이기도 한다. 가령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세금 인하(tax cut)’ 대신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용어를 만들어 씀으로써 민주당을 압도하는 프레임 우위를 누렸다. 세금의 압제(?)에서 국민들을 구하는 공화당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애틋한 시선을 보내게 된다는 주장이다.


물론 미국 민주당의 06년 중간 선거 이전의 잇따른 패배는 공화당의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보다 궁극적으로 민주당이 자신들만의 프레임을 만들어야 함을 글쓴이는 주장하고 있다. 상대방의 실책으로 얻은 승리는 그리 공고하지 못한 건 직관적 경험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집권 여당 의원들 위주로 이 책을 많이 탐독했다고 하는데 이 책의 알맹이는 익히지 못한 모양이다. 기껏 한다는 것이 조악한 정치공학이라니 좋은 책을 읽은 보람이 별로 없어 보인다.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 논설위원은 06년 5.31 지방선거 직후 <계급의식은 어디로?>라는 칼럼에서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받은 지지의 크기를 보면, 이 사회의 가장 어려운 계층 사람들 가운데 적잖은 수가 이 부패한 부자 정당에 표를 건넨 것이 분명하다. 이들의 계급의식은 어디로 갔는가?”라고 묻는다. 또한 “사회 상층부가 계급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고 하층부가 거꾸로 된 계급의식을 소비하는 허영에 몰두하는 한, 사회 양극화의 출구는 없다”고 말한다. 한나라당이 거의 싹쓸이한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를 보면 이 정당이 받은 지지에는 그네들이 좀처럼 보살피지 않는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적잖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 이익에 따라 투표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투표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투표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동일시하고 싶은 대상에게 투표합니다. 물론 그들은 자기 이익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이익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기의 정체성에 투표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정체성이 자기 이익과 일치한다면 두말할 것 없이 그쪽으로 투표할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언제나 단순히 자기 이익에 따라서 투표한다는 가정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52~53쪽


레이코프는 유권자들은 자기 이익에 따라 투표하지 않다고 명쾌하게 말한다. 정체성 혹은 가치관은 프레임의 다른 이름인 것으로 보인다. 레이코프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존재이므로, 우리가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기만 하면 그들은 옳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는 가정은 신화라고 말한다. “진실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그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프레임에 부합해야 합니다. 만약 진실이 프레임과 맞지 않으면, 프레임은 남고 진실은 버려집니다(48쪽)”라고 주장한다.


언론개혁에 찬동하시는 분들은 종종 조선일보 프레임, 조중동 프레임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가령 보수 언론에서 세금폭탄이라는 프레임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부동산 이슈를 선점하는 효과를 누린 것을 들 수 있다.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오늘 신문에 종부세가 8배 올랐다며 세금폭탄이라고 하는데 아직 멀었다”라고 말한 것은 세금폭탄 프레임에 걸려든 셈이다. 2006년 1월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구당 서적, 인쇄물 구입에 지출한 돈이 월평균 1만 405에 불과하다고 한다. 2000년 70%에 달하던 신문구독률이 지금은 40%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독서량이 적은데 몇몇 언론들의 프레임이 실재하다면 매우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프레임 재구성의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뉴딜(New Deal)을 잡딜(Job Deal)로 바꾸면서 일자리 창출에 선뜻 반대하기 힘들게 만든 것도 프레임 전환을 꾀한 대표적인 경우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평통 발언을 통해 예비역 장성들의 직무유기를 질타한 것도 전작권 환수가 한미동맹 균열이 아닌 자주권 고취에 주안점을 두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또한 옮긴이의 해제에서 들고 있는 중앙일보 사례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옮긴이는 중앙일보가 ‘양극화’라는 프레임 자체를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중산층 되살리기’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했다고 평가한다(222쪽 참조).


상대방의 주장을 부정하는 흔한 실수를 저지르지 마라. 대신에 프레임을 재구성하라. 프레임으로 구성되지 않은 사실은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없다. 단순히 사실을 진술하고 그것이 상대편의 주장과 모순됨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프레임은 사실을 이긴다. 프레임은 유지되고 사실은 튕겨 나간다. 언제나 프레임을 재구성하라. 211~212쪽


글쓴이는 진실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님을 강조한다. 민주주의 주인의식의 기초는 제 이득에 따른 호불호를 밝히는 것이라고 원론적으로 주장했던 내게는 큰 지적 충격이다. 또한 진심과 선의가 반드시 통하지 않는 현실을 인정하기가 여간 힘이 든다. 앞서 언급한 평통 발언으로 촉발된 노무현 대통령과 고건 전 국무총리의 대립각에서 청와대 홍보수석실은 “전달된 것보다 사실이 중요하다”는 글을 올렸다. 고 전 총리측에서는 “대통령께서는 진의가 아니라고 하시던데 일반 국민들이 무슨 뜻으로 들었는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응수했다. 이 책에 따르면 고 전 총리가 논리의 적부 여부를 떠나 효과적인 반론을 펼친 것이 된다. 물론 지도자나 지식인이 ‘전달된 것’에만 천착하는 건 민망한 일이지만.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vous devez vivre comme vous pensiez sinon aussitot vous penseriez comme vous vivez)”라고 말했다. 나는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이 시구에 있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프레임이라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새로운 자신만의 가치관을 만들어내라는 것이 이 책의 메시지다. 단 자신만의 프레임을 만들 때 듣는 사람을 고려하고 현재의 지배적 프레임을 고려해서 섬세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나는 여전히 진실의 편에 서려는 사람이 늘어날 때 우리 사회의 인간다움이 고양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의 상당 부분이 허상일 수도 있다. 프레임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통해 내 것의 허실을 발견하고 수정할 수 있으리라. 내 신념을 진실 되게 표현하는 프레임을 개발하고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Die Grenzen meiner Sprache bedeuten die Grenzen meiner Welt)”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곱씹어본다. 이 책은 내 인식의 한계를 넓혀준 고마운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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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 윤휴의 절규

  예송논쟁(禮訟論爭)이 한창일 때 서인의 영수 송시열에 대항했던 남인 논객 윤휴가 억지 죄명을 뒤집어쓰고 사약을 마시기 직전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라고 푸념했다. 그의 외침은 예송논쟁에서 당파간 공존의 틀이 무너진 후에 야기될 극한 대립의 전주곡이었다. 이덕일 교수의 『사도세자의 고백』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당쟁의 그늘을 추적해가면서 서로를 타도해야할 대상으로 간주했던 참담함을 돌아보게 한다. 가만히 물어본다. “왕으로 삼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 사도세자의 죽음과 영조 탕평책의 한계

  글쓴이는 영조의 두 가지 콤플렉스에 천착한다.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분과 경종독살설에 대한 콤플렉스가 영조를 평생 괴롭혔다는 것이다. 특히 경종독살설은 그의 재위기간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이는 효종으로 즉위한 봉림대군이 소현세자의 아들이 이어야 할 자리를 가로챘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린 것도 비슷하다. 세자빈 강씨를 역강(逆姜)이라 칭하며 신원 문제를 시종일관 거부했을 뿐 아니라 강빈의 신원과 소현세자 셋째아들의 석방을 직언한 신하를 죽이기까지 한다. 영조가 이인좌의 난이나 나주 벽서 사건 때 분개한 것도 모두 자신의 즉위 명분과 정통성 문제에서 비롯된다. 노론이 나주 벽서 사건을 소론 전체를 역적으로 몰고자 할 때 영조가 추인하게 되는 것도 영조 즉위과정의 한계인 셈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세자와 영조의 생각이 갈리기 시작한다.


  세자는 경종 시절 노론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은 객관적으로 볼 때 문제가 있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분명 신하가 임금을 택한 ‘택군’이었으며, 당시 그러한 행위는 역적으로 공격받을 소지를 충분히 갖고 있었다. 그러니 수십 년이 지난 이제 와서 복수할 만큼 정당성이 있는 행위는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간 당론 조제가 임금의 역할임을 기회 있을 때마다 훈계하던 정치적 가르침에 비추어 보아도, 지금의 옥사는 지나친 것으로 보였다.
- 이덕일. 2004. 『사도세자의 고백』. 휴머니스트. 194쪽

  영조는 탕평을 통해 포용하려했던 소론을 내치려고 하였으나 세자는 이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수십 년 간 절치부심하며 과거사 재평가 작업을 해온 영조로서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표명하는 세자는 아들이라기보다는 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귀국한 소현세자 부부를 정적으로 여기고 냉대했던 인조의 좀스러운 증오심이 재연되는 순간이다. 다만 글쓴이가 누차 강조하듯 눈물 많고 정 많은 영조는 아들만 죽음에 몰아넣었을 뿐, 며느리와 손자들까지 죽인 인조의 비정함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소현세자의 비극은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유구한 경험을 다시금 선보였다. 사도세자의 비극도 비슷한 면이 많지만 당쟁의 틀에서 좀 더 바라볼 필요가 있다. 세자가 반노론의 입장을 밝혀가며 소론쪽으로 기울자 노론은 자신들의 지위를 사수하기 위해 세자를 향한 공세를 펼치기 시작한다. 노론이 조작한 나경언의 고변까지 터지자 영조는 세자에 대한 적개심을 부당(父黨)과 자당(子黨)이란 표현을 통해 드러낸다. 이제 영조는 아들을 정적을 넘어 역적으로 여기고 결국 뒤주에서 가둬죽인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영조의 탕평정치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영조는 자신의 정통성을 옹위하기 위해 결국 노론 중심의 일당 독재체제를 암묵적으로 승인하게 된다.


  사도세자의 비명횡사 이후 세손의 지위도 위태로워졌다. 노론의 견제를 뚫고 등극한 정조는 즉위 일성(一聲)으로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외친다. 뒤주 속에서 비참하게 죽은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추모의 정을 듬뿍 실었을 이 말에 노론 대신들이 얼마나 아연실색했을지 짐작이 간다. 정조는 영조가 못다 이룬 탕평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도 아버지의 원통한 죽음을 갚아 나갔다. 이에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을 지어 친정의 무고함을 항변하려 한다. 이 노회한 정객의 글재간으로 말미암아 사도세자는 실제 이상으로 정신이상자가 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글쓴이는『한중록』의 순수성에 거듭 의문을 제기하며 사도세자의 죽음의 실체를 흥미진진하게 풀어가고 있다. 혜경궁의 눈물이 “진정 애통해야 할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억울한 죽음을 초래한 가해자들을 위해 흘린 것(이덕일. 2004. 『사도세자의 고백』. 휴머니스트. 353쪽)”이기에 동정 받을 수 없다고 일갈할 때 여간 통쾌한 것이 아니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글쓴이의 필력에 힘입어 경종, 영조 연간의 당쟁을 실감나게 전해준다. 이 책은 당쟁의 한 사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당쟁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을 확장하는 데 무척 도움이 된다. 또한『한중록』을 비판적으로 독해하며 당쟁의 끔찍함을 반면교사로 삼을 것을 촉구하고 있다. 현종 연간의 예송논쟁과 숙종 연간의 환국 정치, 경종 연간의 신임옥사를 거쳐 가면서 각 붕당들은 자꾸만 피를 부르는 당쟁의 심각성을 깨우쳤어야 한다.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을 앞세워 난국을 타개하려 애썼지만 대다수 사대부들은 편 가르기에만 몰두했을 뿐 화해와 상생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정조의 마지막 노력이 무색하게 붕당정치보다 더한 세도정치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 당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혹자는 사색당파 운운하며 조선 정치의 후진성을 논하는 것은 일제 식민사학의 주장이라며 의분을 터뜨린다. 물론 조선시대의 당쟁이 한국인의 분열적인 민족성에 기인한다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이론은 부적절하다. 당쟁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최대한 부각시키고 이를 한국사 전체로 일반화 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연구는 최대한 그 시대의 과제와 현상을 들여다봐야 한다. 선악의 이분법으로 두부 자르듯이 재단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유교적 문치주의가 당쟁으로 진행된 것에는 명암이 있게 마련이다.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과거시험으로 관리를 뽑았던 능력 위주의 경쟁이 심하다보면 단결이 잘 안되는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능력 위주의 경쟁 사회에서 단결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능력주의 자체를 문제시하기보다는 능력주의야말로 우리가 계승해야 할 정신적 자산이라는 주장은 음미할 만 하다(이성무. 2000. 『조선시대 당쟁사1』. 동방미디어. 21~22쪽 참조). 당쟁 말기로 갈수록 능력주의는 많이 빛을 발하지만 당쟁을 사갈시하는 것보다는 균형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팔은 안으로 굽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조선 당쟁을 칭찬하기에는 꺼림칙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당쟁에 휘말린 이들이 자당의 이익 수호에만 급급해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마저 잃은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가령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존망의 위기 앞에서도 서로를 비난하느라 바빴던 붕당을 곱게 보기란 힘들다. 사실 임진왜란 때는 모든 당파의 공과가 병존했다. 북인은 김덕령, 곽재우 등 많은 의병장을 배출했고, 남인은 유성룡이 이순실, 권율 등을 중용한 공이 있다. 서인은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고, 부사 황윤길의 침략 예언 보고를 했다(이덕일. 1997.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22쪽 참조). 그런데도 나 잘났다만 외쳤으니 이 얼마나 밉살맞은가. 점임가경으로 당쟁 말기로 가면 갈수록 원한에 사무쳐 서로를 저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쟁의 여러 긍정적인 기능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사대부들만의 잔치를 벗어나지 못한 것 역시 큰 폐단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예송논쟁이 제 아무리 고상한 철학논쟁이요, 고도의 정치이론이라고 한들 민생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탁상공론 혐의가 짙다. 영조가 노론과 소론 간 공존의 틀을 만들려고 애썼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사대부들만의 정치 독점을 흔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배층의 탕평도 중요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피지배층의 사회참여를 확대하고 이들을 아우르는 통합의 정치가 절실했다. 정조는 일반 백성들의 민원사항을 수렴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했고, 모든 노비를 해방시키는 정책을 준비했다. 농업 생산력의 발달과 신분제의 변동으로 말미암은 변혁의 욕구에 유연하게 대처하려 했던 정조의 개혁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정조의 좌절이 더 안타까운 까닭이다.


  사림파는 훈구파의 집요한 견제와 숱한 사화를 이겨내고 마침내 사림의 시대를 열었다. 높은 도덕성과 엄밀한 학문성을 자랑하던 사림파는 사소한 일로 분당을 거듭하더니 종국에는 시대변화에 뒤쳐져 사회발전의 걸림돌이 된다. 진보의 표상이 수구의 온상으로 전락하는데 많은 시일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피를 뿌렸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 눈의 티끌에 성내는 당쟁의 폐해는 김효원과 심의겸의 동서분당 시발점부터 나타났다. 가장 오래 정권을 잡은 서인-노론 계열에 가장 큰 책임을 돌려야겠지만 동인, 서인, 북인, 남인, 노론, 소론할 것 없이 정권을 잡았을 때 반대파를 제거하는 것일 상례였음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점을 볼 때는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다.


  오늘날 한국 정치도 사림시대의 그늘을 경계해야 한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당파 싸움을 “세계에서도 드물 만큼 소아병적이고 추잡한 것”이라 비판했지만, 그 자신도 정권 연장을 위해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국가보안법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사상 공세를 일삼았다. 겉으로는 대의명분과 개혁성을 앞세우면서 독선과 아집, 지역주의, 연고주의, 줄서기에 연연한다면 당쟁의 폐단이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특히나 민주화 세력에게 당쟁의 교훈이 필요하다. 사회 각지에 넓어지는 진보의 영역에서 얼마만큼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실현하고 있는지 겸허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림파는 권력의 달콤함을 맛보면서 훈구파의 과오를 답습하기 시작했다. 세월의 무게는 영원할 것만 같은 것도 녹슬게 만들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도 낯설게 만든다. 개혁의지로 타오를수록 역사를 외경하고, 자신 앞에 솔직할 필요가 있다. 높을수록 낮아지는 정신이 그립다.


  비단 조선시대 당쟁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향한 아귀다툼은 늘 존재했다. 또한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것도 여지없이 증명해보였다. “과거 역사에 대한 판단은 현재의 세계관이 아닌 그 당시의 인식틀과 논리, 그리고 다른 이들의 신앙과 신념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다원주의 원칙에 의거해서 내리는 것이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박노자, 허동현. 2003. 『우리 역사의 최전선』. 푸른역사. 200쪽)”라는 박노자의 견해에 동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당쟁에 몸담았던 유학자들 상당수가 너무 편협했다. 그들이 살아온 환경과 시대적 분위기를 십분 감안한다 하더라도 자신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겨서 당론으로 국론을 통일하려 하고, 반대파를 발본색원하려 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불완전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을 나누고, 비판을 가한다.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주의주장을 없애는 길은 그 주의주장의 제창자와 추종자를 모조리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주의주장 자체의 허실을 가리면 그만이다. 아무리 왕조사회의 인식틀과 성리학적 사고방식이 절대적 진리와 집단주의적 사고와 맞닿아 있다고 하더라도 살육으로 점철된 당쟁까지는 이르지 말았어야 했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인가.


  한국 정치가 당쟁의 병폐를 끊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더군다나 이제 경쟁은 안에서보다 밖에서 더 치열하다. 지연과 학연을 바탕으로 다투던 당쟁의 폐해와는 서둘러 결별해야 한다. 사회 내부의 모순에 허덕이느라 시대 정세를 읽지 못하고 나라를 잃는 수모를 당해야했던 조선의 비운을 되풀이해서는 곤란하다. 이제 예송논쟁 따위나 하며 한가하게 소일할 여유는 그리 많지 않다. 글로벌 경쟁 아래 우리끼리 다퉈서 이기면 세상을 다 차지한 것인 양 좋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상호공존을 추구하는 국내정치, 평화와 번영을 지향하는 남북관계 조성에 더 이상 사도세자와 같은 희생제의가 필요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 칼 포퍼의 세계 3이론을 새기며

  박세채는 1683년 탕평론을 제기하면서, 당파에게는 우열론을 써야 하고, 권력을 쥐고 흔드는 간신과 그들에게 붙은 무리에게는 시비론을 써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붕당은 사리와 분별이 있는 사대부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따지기보다는 ‘누구는 우수하고 누구는 열등한가’를 가리는 우열론(優劣論)이 적절하다는 것이다(박광용. 1998.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149쪽 참조). 조선의 현실에서 주자의 시비분별론(是非分別論)보다는 우열조제론(優劣調劑論)이 단기적으로 불가피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고육책이리라.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와 다원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우열조제론은 단순히 단기적 처방이 아니라 영구한 대책이 될 공산이 크다.


  박세채의 논설도 훌륭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칼 포퍼의 세계 3이론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포퍼는 물질의 세계(세계 1), 주관적 마음(정신, 의식)의 세계(세계 2)와 구별되는 객관적 사상의 세계, 마음의 산물이면서도 그 인식주체와 독립해 존재하는 세계 3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상, 언어, 윤리, 제도, 과학, 예술 등을 설명한다. 세계 3은 그 기원에 있어서는 인공적 산물이지만 일단 그러한 이론이 존재하게 되면 자신의 고유한 생명을 가지며,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귀결을 산출하며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Popper. 1977. 『자아와 두뇌』(The Self and Its Brain) 참조). 이에 따르면 어떤 이론이나 지식을 말하는 사람과 그가 내놓은 이론, 지식은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말에 대한 비판”과 “사람에 대한 비판”을 구분해야한다는 것이다.


  세계 3은 인간의 산물들의 세계로서 일단 존재하게 되면 그것을 생산해낸 인간과 분리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세계 3은 세계 2에서 파생되었으되 의도치 않은 논리적 귀결들과 문제, 인식주체를 벗어난 독자적인 발전과 전개들로 구성되는 자율적 영역이라는 것이 포퍼 주장의 핵심이다. 주관적 인식의 세계인 세계 2와 객관적인 인식의 세계인 세계 3의 구별은 획기적이다. 비판과 토론에서 누가 주장했는가보다 어떤 주장을 했느냐에 주안점을 두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인 것이다. 이 전환은 어떤 “사람”과 그 사람의 “주장”을 동일시하지 않는 혜안을 선물해준다. 자신의 그른 점을 지적하는데 자신을 싫어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은 미성숙하다. 건설적인 토론을 인신공격으로 제멋대로 오해하고 물타기를 하는 사람은 비겁하다. 주장 자체의 잘잘못을 가리기보다는 인간 됨됨이를 걸고넘어지는 것은, “사람=그 사람의 말과 글”이라는 등식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지식의 생산자를 그 지식과 동일시하여 어떤 사상이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경우, 그 사상의 산출자를 없애버렸다. 이는 정치적 해결은 될 수 있어도 학문적 해결은 될 수 없다. 이러한 방식의 정치적 해결은 항상 폭력을 수반한다. 열린 사회는 이러한 정치적 해결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 신중섭. 1999.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자유기업센터. 114쪽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도입될 때 전세계 천주교 역사에 유례없는 극심한 박해가 자행되었다. 천주교를 공격하는 공서파(攻西派)의 강경 대응 주문에 정조는 정학을 지지하면서도 “사교(邪敎:천주교)는 자기자멸할 것이며 정학(正學:유학)의 진흥에 의해 막을 수 있다”고 탄압에 반대했다. 사상의 자유시장을 옹호한 개명군주 정조의 바람과는 달리 정조 사후 혹독한 탄압이 이어졌다. 그러나 교조화된 성리학의 답답함을 서학으로 풀게 된 이상 수천의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선교사에 의한 전파보다 현지인들의 자발적인 수용이 강한 한국 천주교 보급은 사대부 계급 간 밥그릇 싸움에 신물이 난 백성들의 저항이었다. 홍경래가 최후로 버틴 정주성이 관군에 함락되면서 2983명이 사로잡혔을 때 자행된 사건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열 살 이하의 남자 224명과 여자 842명을 제외한 1917명을 모두 처형한 것은 지역 차별을 반성하지 않고 피로써 잘못을 감추려했던 역사의 비극이다. 어디 그뿐인가. 장보고에게 비수를 꽂는다고 신라 골품제의 비효율성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노비 만적을 강물에 던진다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육신을 거열형에 처한다고 해서 수양대군의 찬탈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전봉준을 죽여도 사람을 하늘처럼 귀하게 여기라는 가르침이 식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자기의 이론과 더불어 같이 죽지 않게 되었을 때, 인간은 용감하게 새로운 모험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지적 전통은, 전에는 엄청난 무게를 가지고 방어적 태도로 기존의 교설을 보존하는 데 봉사하였으나, 지금은 탐구적 태도의 뒷전으로 밀려나서 변화를 위한 힘으로 바뀌었다.
- 브라이언 매기. 1998. 『칼 포퍼』. 문학과 지성사. 78쪽


  이제 사람을 없애 그 사람의 이론과 사상을 손쉽게 정리하는 야만을 저지르기 힘든 세상이다. 세계 3이론은 그 사람이 내놓은 지식과 인식, 내뱉은 말과 글을 비판함으로써 보다 자유롭고 열린 세상을 만든다. 가수 김민기는 자신의 노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무덤덤한 이유를 “내가 만든 노래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났고, 노래란 향유하는 사람들 나름의 창조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정혜신. 2005. 『사람 VS 사람』. 개마고원. 159, 160쪽 참조)”이라고 말했다. 이 말처럼 세계 3 속에서 끊임없이 수정되는 지식들을 모두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지지 않는 겸손함을 가져야한다. 세계 3이론은 치열하게 토론하고 정직하게 경쟁하되 겸허하게 수용하고 깨끗하게 승복하라는 깨달음을 준다. 사람을 원망하기는 쉽지만 그 사람의 생각을 반박하는 것은 많은 노력이 드는 일이다. 세계 2와 세계 3을 분간함은 건전한 정쟁을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다.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관용!

  윤휴의 볼멘소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현재진행형인지 모른다.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를 적대시하는 풍토가 잦아들지 않는 한 이 세상은 성인과 악당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광경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다원주의 사회에서 절대선과 절대악이란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고, 선악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기 일쑤다. 『사도세자의 고백』에서 배워야할 것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관용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고 싶은 유혹을 버리기가 마음만큼 녹록지 않을 것이다. 고종석의 다음과 같은 말을 늘 곁에 두자. 버리면 가볍다. - [憂弱]


  문화로서의 전체주의를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우선 진리의 전유권(專有權)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남들이 진리를 전유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에 대한 사랑을 줄이는 것, 열정의 사슬을 자유로써 끊어내고, 광신의 진국에 의심의 물을 마구 타는 것이다.
- 고종석. 2002. 『자유의 무늬』. 개마고원. 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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