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건 뭐였을까?' 책을 덮으며 떠오른 알싸한 느낌의 질문이었다.

더 이상 손홍규의 소설을 얘기하면서, 탁월한 문체니, 구수한 입담이니, 찰진 문장력이니, 마술적 리얼리즘이니 하는 군말은 쓰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장편소설인 '귀신의 시대'속에는 그의 단편이 가진 매력들이 고스란히 들어와 앉아 있다. 그 예의 배꼽 쥐게 하는 엉뚱한 발상의 유머나, 토속적인 배경에 대한 질박한 묘사, 도저히 끊어 읽을 수 없게 만드는 문장력, 도무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캐릭터들 말이다. '귀신의 시대'는 수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와서 장편인듯 단편인듯 하기도 하다. (무슨 소린지 좀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읽어 보면 안다.)

사실 내가 손홍규의 소설을 읽는데에는 일종의 불순한 의도도 있다. 다름 아닌 '엿보기'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작가 손홍규와 동향은 아니지만 -작가의 표현을 따른다면- 노령산맥의 자손이다. 우리는 분명히 동시대를 살아왔고, 지금 이렇게 하나의 시공간안에 함께 있지만, 그와 나의 어린 시절에는 몇 몇 TV 프로그램과 몇 몇 역사적이었던 사건(86아시안 게임, 88올림픽 같은 것 말이다)에 대한 기억을 빼놓고는 도무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그와 내가 몰랐던 어린 시절, 예를 들어 80년대 초반 즈음의 하루를 툭 잘라내어 내가 겪는 하루와 그가 겪는 하루를 비디오 카메라로 찍어 놓고 비교해 보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공상을 하기도 한다.) 손홍규의 소설은 나에게 그런 그 사람의 어린 시절을 희미하게라도 엿볼 수 있게하는 문틈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글쎄, 다른 독자들에게도 이런 가치는 줄 수 있지 않을까. 동시대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그러나 그 안에 충분히 우리의 근현대사가 다 묻어 나기 때문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

작가가 등장시키는 수많은 인물들에게는 작가의 관심과 애정이 아주 끈끈하게 묻어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묘사하는 산맥, 마을 등 공간에 대해서도 그의 애정이 아주 눅진하게 스며있다. '날 키운 건 뭐 였을까?', '내게도 과거가 있고, 애정이 있나?' 등에 대한 생각이 자꾸만 든다. 내 과거 어디로 손을 뻗어도 잡고 싶은 과거, 귀신으로라도 만나고 싶은 인물들이 전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의 말미가 가슴을 허비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성불이나 해탈 혹은 영생하지 못해도 좋다고 여겼다. 다만 나의 어린 시절을 찾게 된게 기뻤을 뿐이다. 삶이 내게 강요한 것은 복종이 아니었다.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금기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삶은 복종이나 저항으로 완성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를 붙잡고 있던 금기가 나를 놓아주고 있었다. 조금은 두려웠다. 이제 무엇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나. 그래서 나는 소년을 꼭 껴안았다. 너무 세게 껴안으면 빠져나갈 것 처럼 미끌미끌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결코 놓칠 수 없다는 듯이 격렬하게 소년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