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를 망라하고 읽어서 좋았던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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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도정일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1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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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철학
요코야마 고우이츠 / 경서원 / 1989년 9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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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의 구조
다케무라 마키오 지음 / 민족사 / 1989년 12월
8,500원 → 7,650원(10%할인) / 마일리지 42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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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불교와 유식불교
일지 / 세계사 / 1992년 5월
9,000원 → 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4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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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학 입문
오형근 / 불광출판사 / 1992년 11월
7,000원 → 6,300원(10%할인) / 마일리지 3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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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몸짓의 논리 - 박성배 교수 불교철학 에세이
박성배 지음 / 민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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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배 교수의 에세이집이라 학문적인 논문만 실려 있는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수필 같은 글들만 실려있는 것도 아니다. 골고루 섞여 있는데, 수필 조의 글이든, 논문 조의 글이든, 불교에 대한, 한국학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 일관되고 있다.

박성배 교수는 경력이 다채롭다. 동국대 교수였다가, 승려였다가, 미국의 신학대학원생이었다가, 미국 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의 겁없어 보이는 때려침의 경력에서 알 수 있듯 대단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고, 글들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적어도 박성배 교수는 단지 '교수', '전문 지식인'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 든다.

요즘은 철학이든 무엇이든 지식이 단지 책에서 책으로, 논문에서 논문으로 옮겨다니기만 하는 것 같다. 책을 쓰거나 읽는 사람도, 논문을 쓰거나 읽는 사람도 책과 논문을 떠난 일상은 별개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과연 지식이 책과 논문에 쓰여지고 읽히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우리는 단지 많이 읽고 알기 위해서만 책과 논문을 읽는 것일까? 근본적으로는 알아서, 잘 살기 위해서, 바른 삶을 위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 철학을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끊임없이 앎과 삶을 일치시키려 하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는 것은 안심이 되는 일이다. 역시 가장 심혈을 기울여야 할 책과 논문은 우리 인생인 것이다. 앎은 삶을 통해서 그 앎이 맞는 것인지 실험되고 검증될 수 있을 것이며 삶은 앎을 통해서 바른 길로 인도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여기 저기에 실었던 글들, 단상들을 모아놓았기 때문인지 내용이 중복되는 면이 있긴 하다. 그러나 편안하게 진솔한 목소리를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오히여 외국에서 한국학을 하는 학자라서 그런지,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한국학에 대한 애정과 문제의식이 남다르다. 몸과 몸짓은 박교수가 평생을 붙잡고 씨름한 화두이자, 그의 철학을 열어주는 중심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단지 책에서 책이 아니라 그의 삶 속에서 언제나 붙잡고 씨름했던 개념이다. 학술적인 논문들만이 아니기에 그 분투와 성과를 더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박성배 교수의 체계적인 철학을 알기 위해서 이 책을 선택한 사람에게는 주변적인 이야기들을 읽는 게 낭비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주변적인 이야기들을 휴식처럼 읽을 여유가 있는 학자들, 그러면서 자신들의 연구에는 이만큼의 진실성이 있었던가를 되돌아볼 마음이 있는 학자들이 읽으면 좋을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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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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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주위를 불안한 눈초리로 둘러보았다. 현재뿐이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각기 현재 속에 처박힌 가볍고 튼튼한 가구, 즉 탁자며, 침대며, 거울이 달린 양복장과 나 자신이었다. 현재의 진실한 본성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현존하는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현재가 아닌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물 속에도, 나의 생각 속에도 없었다. 확실히 오래 전부터 나의 과거가 나에게서 도주해버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것이 나의 능력 범위 밖에 있는 거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과거는 은퇴한 것에 불과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존재 양식이었으며 휴가 생태, 비활동 상태였다. 각각은 자신의 역할이 끝났을 때, 스스로 상자 속에 얌전히 들어앉아서 명예로운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무(無)를 생각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나는 알았다. 사물이란 순전히 보이는 그대로의 사물인 것이다.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182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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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한형조 지음 / 여시아문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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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는 참으로 다양하다. 그래서 불교에는 없는 게 없다! 불교 공부하는 사람은 거의 모든 철학, 사상 속에서 불교가 자꾸 보이는 병을 앓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비슷한 것을 서양철학에서 발견하고 불교가 어찌 이런 생각을 이토록 빨리 해냈을까 감탄하지만...언제나 한 발 늦는다는 것. 동양철학의 불행한 현실은 그것이 서양을 통해 비추어져야 비로소 빛이 나 보인다는 것이다.

  불교라는 것은 도대체 이게 단일한 사상인가 싶을 정도로 다양한 이론들이 펼쳐지고 있으며 어쩌면 불교의 매력은, 그리고 불교가 인도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하면서도 현대까지 전세계에서 그 영향력이 사그라들지 않는 것은 그 놀라운 생산성, 개방성에 있을 것이다. 선불교가 위세를 떨치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는 불교가 매일 참선하고 화두만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불교에는 그런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소박한 도덕책 같은 초기불교도 있고, 아비달마불교처럼 보통 어려운 게 아닌 아주 현학적, 철학적인 불교도 있다. 아비달마 불교 같은 경우는 고대 원자론이나 희랍철학, 형이상학 같은 게 연상되기도 한다. 그러다 중관불교에서는 논리와 논리를 뛰어넘는 초논리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 때부터 불교는 언어나 논리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점점 더 분명하게 전달하기 시작하는 듯 하다. 유식불교에서는 그야말로 인식론이 전개된다. 불교는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의 ‘인식’에 특별히 주목한 것이다. 유식을 더 파고들면 서양 근대 인식론이나 정신분석학에 못지않은 굉장한 통찰력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선불교도 그러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다양해지는 불교사 속에서 나타난 불교의 한 자락이다. 굳이 선불교의 정통성을 초기불교에서 찾자면 ‘염화미소’의 에피소드에서 찾을 수 있다. 부처님이 꽃 한 송이를 들자 다른 사람들은 다 멀뚱한데 그 중의 한 제자 가섭만 그걸 보고 빙긋이 웃었다는 일화이다. 여기에 근거해서 선불교는 부처님이 말이 아니라 이심전심으로 가르친, 교학과 다르게 전해주는 가르침이 있다고 주장한다. 화두는 그래서 언어를 뛰어넘는 깨우침, 교학을 뛰어넘는 깨달음을 추구한다. 언어와 논리, 교학만을 지나치게 파고드는 불교가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쳐다보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해서 ‘달’ 자체를 보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불교 스토리는 황당한 것들이 많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이미 우리 언어나 논리의 허를 찌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선불교이기에 일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잘 풀릴 수 없는 것들이다. 머리를 써서, 이성으로 이치를 따져서, 논리를 셈해서 선불교를 이해하려 한다면 스승에게 죽비로 얻어맞기나 할 것이다.

  이러한 선불교에서 전해지는 책 중에 <무문관>이라는 책이 있다. 화두들을 모으고, 거기에 풀이와 송(노래나 시 같은 것)을 달아 1228년 무문 혜개 스님이 편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 아닐까? 언어에 얽매이지 말라고 호통치는 선불교에서 다시 언어를 사용해서 책을 편찬한다? 결국 언어란 우리가 경계하면서도 기댈 수밖에 없는 도구라는 생각이 든다. 언어를 벗어나려는 노력과 다시 그 노력조차도 언어로 설명하려는 노력. 선불교는 이러한 상충되는 노력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저자 한형조 교수는 무문 혜개 스님의 풀이도 모자라서 여기에 더 상세하고 더 쉬운,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준다. 이것은 원래 <현대불교>에 연재했던 것을 다시 책으로 묶어낸 것이라고 하는데 책으로 묶으면서 많이 다듬었다 한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무문관>의 풀이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선불교의 역사도 가르쳐주고 나름대로 재미나게 한형조 교수가 이렇게 저렇게 화두를 이해하려는, 현대적으로 풀어보려는, 다른 철학이나 다른 사상들도 떠올려보면서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그대로 펼쳐져 있다. 그래서 무문관 한 권 읽는 게 아니라 선불교에 관련된 이야기도 읽을 수 있어서 일거양득이다.


이 책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말 잘하는 저자

  <왜 동양철학인가?>라는 책에서 한형조 교수의 글발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내가 유학을 선호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한데, 우리말 잘 하는 것도 참으로 어렵다. 우리가 자꾸 까먹어가는 우리 단어도 많아서 자꾸만 우리말은 빈곤해진다. 그래서 맛깔나고 실감나게 우리말을 구사하는 학자들을 의외로 보기 어려운데, 아마 그 원인의 하나가 가장 머리 좋고 공부 많이 할 때 대부분 외국으로 나가 외국어 학습과 외국어 쓰기에만 열중한 탓이 아닌가도 싶다. 그러나 우리말도 계속 읽고 써야, 조금 늘 수 있는 어려운 말 아닐까? 그런 면에서 한형조 교수는 무척이나 우리말을 잘 구사한다. 읽으면서 이런 단어도 있었지..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단 우리말이 잘 되어야 우리말을 가지고 생각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풍부하고 실감나는 언어를 통해 한 교수는 현대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선불교를 풀어주는 것이다. 괜히 어려운 문자 속에 숨지 않고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말 그대로 활기 넘치게 선불교를 전해준다. 그래서 책의 부제도 “한글 세대를 위한 선불교 강의”라 했다.


2. 멋진 한문 번역

  한문은 번역할 때 조사만 갖다 붙이는 식으로 번역하게 되기가 쉽다. 예를 들어, “靑天白日一聲雷”하면 “청천백일에 한 우레 소리” 정도로만 번역을 해 놓아도 별 죄책감을 안 느끼게 될 수 있는데, 그렇게 번역된 것을 읽다보면 우리말 같긴 한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 경우가 많다. 많은 동양고전 번역이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이 경우 이 책에서는 “쨍쨍한 해 마른 하늘을 깨는 한 줄기 우렛소리”라고 번역한다. 그제서야 문자 속에 갖혀 숨 못 쉬던 이미지가 제대로 살아난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런 번역들이 문학적 상상력만 가지고 임의대로 번역한 게 아니라 다 근거가 있는, 오랜 학문적 바탕 위에서 가능했던 믿을 만한 번역이라는 게 중요하다.


<책의 한 대목>

서암 화상은 날마다 혼자서 “주인장!” 하고 부른 다음 “예”하고 대답했다. “정신 차려야 해!” “예.” “차후로 다른 사람한데 속아선 안돼!” “예, 예.”

나 무문이 말한다. “서암 늙은이는 제가 팔고 제가 산다. 어쩌려고 수많은 도깨비가면을 가지고 노는 걸까. 저것 보게. 하나는 부르고 있고, 하나는 대답하고 있으며, 또하나는 정신 차리라 하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한테 속지 말라고 한다. 이 중 어느 하나를 붙들어도 잘못이긴 마찬가지. 그렇다고 서암 흉내를 내려 들면 여우의 견해에 떨어진다.”

송하여 가로되, “길을 찾는 사람들이 참된 소식과 멀어짐은, 분열된 자아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

무시이래(無始以來)의 생사의 근본을, 어리석은 이들이 <본래 나(自己)>라 부르고 있네.”

......................<중략>................

원래 말이 없는 성격이라서 그랬을까. 서암은 혼자 부르고 혼자 대답하고, 혼자 다짐하고 혼자 중얼거리는 일인극을 만들었다. 무문은 이를 그림자놀이에 빗대고 있다. 꽁리가 주연한 <인생>이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손가락 위에 올려진 다양한 인형들의 동작을 장막에 비추고, 거기다 변사의 입담을 곁들이면, 음모와 전쟁, 사랑과 이별의 드라마가 실감나게 펼쳐진다.

  지금 서암도 몇 개의 꼭두각시를 부리고 있다. 부르는 꼭두각시, 대답하는 꼭두각시. 졸지 말라고 다그치는 꼭두각시, 속지 말라고 다짐하는 꼭두각시. 어디 그뿐이겠는가, 이렇게 책도 읽고 컴퓨터도 치고, 근엄하게 정치고 하고, 날라리 사기도 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희노애락 중중무진의 꼭두각시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두는 살아있는 주인공이 아니라 죽은 꼭두각시요 괴뢰일 뿐이다.

  사람들은 대게 이들 꼭두각시들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자아(自我) 혹은 페르소나(persona)를 통하여 세계와 교섭하는 것이다. 모든 비극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중략>..........

어디 서암의 꼭두각시만이겠는가. 우리가 일상의 세계 속에서 표출하는 다양한 생각과 활동은 절대 혹은 본원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사바의 일상은 우리의 진정한 실재 혹은 불성의 무루(無漏)한 활동이 아니라, 무시이래 분열되고 소외되어 온 자아의 꼭두각시 놀이이다. 이 점을 자각하는 것이 불교에 접근하는 첫걸음이다.

 

<이 리뷰는 원래 작년에 내 개인 블로그에 올렸던 글이라 좀 길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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