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무진기행 ㅣ 범우문고 13
김승옥 지음 / 범우사 / 1986년 4월
평점 :
품절
'지중해'라는 영화가 있다. 전쟁 중에 그리스의 한 섬으로 보내진 몇 명의 군인들은 그 곳에서 전쟁이 끝나는 것도 모르는 채 평안한 나날을 보낸다. 그리고,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으로 갈 수 있게 된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은 고향으로 향한다. 그러나, 몇 십년이 더 지난 후 몇 명은 그 섬으로 다시 돌아온다.
시간이 팽그르르 원을 그리며 침잠하는 곳이 있다. 그 구심점이 행복이든 권태든, 무엇이든간에 말이다. 그 곳에서 앞만 보고 달리던 사람들은 잠시 멈춰선다. 인생의 간이역, 분기점.
무진은 그런 곳이다. 명산물이라면 명산물이라고 할 만한 그 곳의 안개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선은 어떠한가?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 내놓은 입김', '신들을 유배시켜 놓는 것'... 결코 곱지 않은 시선이다. 이렇듯 무진은 주인공에게 끈적끈적한 권태만이 있는 곳, 오욕과 모멸의 기억이 있는 곳, 곧 벗어나야 할 곳이다. 거기서 그는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불렀으며' 결국 세상으로 나가 출세하로 할 만한 것을 했다. 그런데, 그느 그렇게 벗어났던 무진으로 돌아오곤 한다. 때로는 세상에서 도망치듯이, 때로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무엇이 그를 부르는 걸까? 무진은 '자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곳이 아니라 그늘에 가리워 잘 드러나지 않던 또 하나의 자신을 불러내는 곳이 아닐까?
그는 하얀 팻말의 선명한 검은 글씨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를 보면서 무진을 떠나고 있다. 그리고, 무진을 떠남과 함께 그는 그 곳에 또 하나의 자신을 벗어둔다. 그렇지만, 그는 언젠가 무진에 다시 올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