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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지배자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지음, 김정란 옮김 / 문학동네 / 1997년 12월
평점 :
품절
소설은 이야기다. 그게 진실이든 지어낸 허구이든 우리는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어쩔 땐 명확한 사건의 흐름을 그저 따라가기만 해도 준비된 슬픔과 기쁨, 감동들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하지만, 또 어떤 경우엔 분명 작가의 말에 쫑긋 귀를 세웠는데도 불구하고 종종 길을 잃어 헤매곤 한다. 도대체 무얼 말하려고 하는 건지 왔던 길을 다시 되집어 갔다 와도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이고 이제 다 끝났다며 우리의 손을 매정하게 놓는 작가의 말에 어이없어 화가날 때도 있다. 흠… 내가 뭘 읽은 거지?크리스토프 바타이유의 이야기들은 후자에 더 가깝다. 그리고 조금 차이가 있다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화가 나기 보다는 어지러운 몽롱함을 느낀다는 것이다.그의 다른 소설인 ‘다다를 수 없는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지배자’역시 특유의 간결한 문체와 여백이 돋보인다.바타이유 소설에서 여백은 단지 활자가 없는 빈 공간이 아니라 또 하나의 문자이며 의미이다.
여백은 활자 못지 않은 충분한 몫을 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되새기게 하고 상상하게 하고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내게 한다.다다를 수 없는 나라에서 느꼈던 몽환이 이 책에서는 더욱 심해진다.시테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무력한 사람들의 기반을 바탕으로 권력을 잡았다는 공작과 시간의 달인이라고 불리우며 공작의 200여개가 넘는 시계를 관리하는 거인. 그리고 거인의 아름다운 부인 헬렌과 너무나 순수해서 세상의 이방인 듯한 그들의 딸 로도이프스카… 바다를 접한 도시이지만 오직 바라보기만 할 뿐 바다를 향해 나아갈 수 없이 언제나 한 곳에 정박해 있는 배들만 가득한 시테. 안개 덮힌 시테를 헤매노라면 밤의 시간을 지배하는 거인과 무료한 권력을 가진 공작의 미묘한 우정에 또 한번 어지럽게 된다. 두 남자의 지극한 우정으로 신비한 시테의 안개는 걷히게 되는 걸까?
하지만 순수한 로도이프스카에게 여성을 느껴 범하게 되는 공작과 절망으로 사라져버리는 거인. 그리고 누구의 아이인지 알 수 없는 아들을 낳은 헬렌..그럼 단지 여태 3류 치정 연애담 속에서 헤매였던 것일까?책장을 덮고 나서도 난 시테의 회백색 좁은 골목길에서 우두커니 멈춰서 있었다. 떠나버린 거인을 기다리듯 공작의 시계바늘들이 제 자리를 지키듯이.. 역자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글쓰기에 대한 것이라고 하며 이야기 속 상징들을 상세히 풀어나간다.하지만 난 풀어헤친 그 상징들을 이해하기 더 어려웠다. 그냥 내 머리가 이해한 대로3류 치정이 얽힌 이야기일지라도 그대로가 좋았다. 바타이유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날 안개 속으로 이끈다.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동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난 언제나 그의 책 어느 중간쯤의 여백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