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며칠에 한 번씩 동거중인 남자에게 얻어맞곤 소리 질러대는 다방 다니던 젊은 여자의 방 옆에는 머리 감기 전 꼭 마당에서 비듬을 털어대곤 하는 공장다니는 총각의 방이 있었다. 마당을 돌아 안채에는 택시운전하는 아저씨와 한량없이 사람좋은 아줌마의 두 아이들이 비좁은 한 방에서 살았고 그나마 떡하니 가장 넓은 구역은 동네사람들에게 정신이 약간 돌았다고 판정받고 있는 싸움쟁이 주인아줌마가 차지하고 있었다.항상 벌개진 코를 벌를거리던 능글맞은 과일집 아저씨가 그 남편이였고 부부 사이에는 안성맞춤인 멍청한 사내아기가 있었다. 그리고 잘 잠기지도 않은 담 옆에 있어 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옆에 역시 초라하고 작은 방이 우리 집이였다.아버지가 갑작스레 사업에 실패하고 낯선 그 집으로 이사를 간 때의 내 나이도 소설 속 진희처럼 열두살이었다.

그 전까지는 그런 동네가 있다는 것도 영 아귀 맞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도 다 드라마나 책 속에서만 나오는 것인 줄 알았다. 바로 옆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싸워대고 조용할 날 없는 그 사람들의 삶을 보며 난 단지 신기함과 세상의 요지경으로 호기심을 채울 뿐이였다. 그리고 또 이십수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을 통하여 그동안 한번도 생각할 엄두도 내 보진 못한 그 집의 사람들과 어린시절이 떠오른다.소설 속 진희는 열두살 결코 많지 않은 나이에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란 제목의 목록으로 동정심, 불변, 오직 하나뿐이라는 말, 약속등을 지워나간다. 인간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확신을 하며…그래서일까? 진희는 열두 살 이후 성장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는다.열두살 나이로는 너무 조숙하다고 할 만큼의 성숙한 지적 사유로 주변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 나간다.어린 시절 단지 호기심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던 나와는 너무나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알아채 버린 진희에게서 서른이 넘어버린 지금 나는 새삼스레 세상을 다시 쳐다보게 된다.

하지만 십년 전이나 이십년 전이나 혹은 철없던 내 어린시절이나 진희의 조숙한 시절에서의 공통점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였던 것 같다. 비록 약속이나 동정심을 절대 믿지 않고 사랑과 삶에 대해 그저 냉소적이였을 뿐이라고 외치고는 있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런 부르짖음은 그럴 수 없음에 대한 역설적인 외침이 아니였을까?작가란 한 순간도 세상에 대해 시선을 거두면 안된다고 누군가 말한 것 처럼 은희경 씨의 ‘타인에게 말걸기’와 같이 이 작품에서도 인간에 대한 작가의 치밀하고 애정어린 시선을 느낄 수 있다.그리고 이젠 자신에게조차 건조함으로 쩍쩍 갈라질 수 밖에 없는 나 같이 메마른 감성의 인간에게 순간이나마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 준다.지금까지는 심각하지도 비루하지도 않은 회색의 일과들이 나의 일상이였다. 작품 속 쥐의 일과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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